우리는 이야기를 보러 영화관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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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완전 정복 – 6개의 테마로 본 영화> 미리보기

아주 단순하고 뻔한, 진부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대체 영화란 무엇일까? 아니, 영화는 무엇을 위해 나타났을까? 오늘날 영화는 그토록 친숙한 도구지만 의외로 이 질문에 답을 내리기는 영 쉽지 않다. 사실 몰라서가 아니다. 영화들을 즐겨보기만 했을 뿐,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아서이다. 하지만 만일 영화를 더 즐기고 싶다면 생각해볼 가치는 충분하다. 그것이 영화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영화는 과연 무엇일까!

맨 먼저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렇다. 영화는 이야기를 하는 도구이다. 우리 모두 이야기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으며 그것의 완성도 여부에 따라 영화를 판단한다. 이야기가 없는 영화를 경험한 바도 거의 없으니, 딱 이것이 정답 같아 보인다. ‘이야기를 하는 도구’! 하지만 아니다. ‘이야기’는 영화의 정체성과는 전연 상관이 없다. 생각해보라, 이야기는 영화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글과 그림, 말과 음악에 실려 이미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영화는 오히려 상당시간동안 이야기를 담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들에 비해 아직 초라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 영화에게서 ‘이야기’는 떼어놓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지? 영화는 이미지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도구이다? 제법 흡족한 답처럼 보이지만 아직 부족하다. 이미지라는 단어에는 무언가가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라면 인류에게 이미 그림이 있었다. 그것과는 다른 점, 바로 움직임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움직이는 이미지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도구이다!

이제 틀이 잡힌 듯하다. 영화는 분명히 움직이는 이미지이며, 그로 인해 그토록 영화의 출현에 난리법석을 떤 것이다. 영화는 모든 이미지가 정지에 머물러 있던 시대에 발명품으로써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한 뤼미에르(Auguste &  Louis Lumière) 형제

20세기를 불과 5년 앞둔 19세기,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자신들의 발명품을 발표했고 그것이 영화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좀 전에 끌어낸 정의는 어쩐지 여전히 미흡하다. 다음은 당시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 시내 여기저기에 붙인 공고문의 문구이다.

시네마토그래프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이 도구는 일련의 즉석 프린트에 의해서 일정한 시간 동안 렌즈 앞에서 이어지는 모든 움직임을 담을 수 있도록 해주며, 있는 그대로의 크기로 관객들이 볼 수 있도록 모아 놓은 것들의 이미지를 스크린 위에 영사함으로써 재생해 낸다.

보라, 여기에 나와 있는 대로 정리하면, 영화는 결코 단지 움직이는 이미지로의 재생이 아니다. 뤼미에르 형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쓰지 않고, 언뜻 이해가 안 가리만큼 구구절절 풀어썼는데 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처음 세상에 나타난 발명품이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야했기도 하거니와 영화가 하는 일을 정확하게 이해시켜야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이미지를 스크린 위에 영사함으로써 재생해 낸다.’고 씀으로써 기능을 소개했다면, 그것이 어떤 이미지인지를 소개함으로써 영화의 의의까지 깃들여 분명하게 정체성을 드러냈다. ‘렌즈 앞에서 이어지는 모든 움직임’, 그러니까, 영화는 ‘모든 움직임’을 움직이는 상태 그대로 스크린에 재생하는 장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렌즈 앞에 있는 모든 움직임이 대체 뭐지?

좌) cinematographe lumiere 포스터  우)1896년 9월 22일 미국 상륙 포스터

영화는 단지 ‘이야기’를 움직이는 이미지의 상태로 재생하는, 보도록 해주는 장치가 아니다.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것을 그 상태대로 보여주는 데 바로 ‘세상’이었다. 렌즈 앞의 세상 말이다. 이것이 발명품 영화가 지닌 놀라운 가치였다. 생각해보라, 인류는 그 어느 누구도 영화가 나타나기 이전까지 한번도 이 ‘세상’을 눈에 포획한 일이 없다. 세상은 시간의 무지막지한 힘에 밀려 ‘눈’에서 사라졌으며 오직 기억 속에만 남을 뿐이었다. 인간이 세상에 대해서 따라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글로 묘사하거나, 그림으로 인상적인 면모를 정지시키는 것이거나 노래나 음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영화 이전의 전통적인 예술들이 사실상 재현보다 경험한 ‘세상’의 의미에 대한 표현으로 나아간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와 함께 이제 인간은 ‘눈’에 지나가는 것들을 재현할 수 있게 된다. 달리 말해서 ‘세상’이 비로소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 이전에도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았냐고? 아니, 본 것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했다. 경험은 지나간 것으로써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사건이다.

반면에 영화는 이것을 언제나 ‘현재’ 경험하게 해준다. 이는 영화를 뒤로 돌려서 다시 재생 하는 경우에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말이야 ‘되돌려본다’고들 하지만, 천만에, 현재, 또 한 번 경험하게 된다. 이 의미는 아주 의미심장한 변화였는데, 물론 당시에는 아무도 영화가 지닌 이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때 사람들은 그저 놀라는 것 외에는 더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영화의 초창기가 의미심장한 논쟁, 논의로 이어지기 보다는 경이로운 쇼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사라지지는 않는다. 초창기 쇼로 난무하다가 결국 영화는 이 의미를 발전시키고 재발견했으며, 더더욱 경이로운 단계로 몰아갔다. 여기서 우리가 앞서 부족하다고 여긴 정의를 다시 가져와보자.

우리는 영화가 이야기를 움직이는 이미지로 풀어내는 도구라고 했었다. 이제 우리가 알게 된 영화의 참 정체성에 맞게 이 말을 살짝 바꿔보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영화는 이야기를 세상의 모습으로, 움직이는 상태의 이미지로 풀어내는 도구이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아직도 긴가민가하다면 아예 정확하게 옮겨보자.

영화는 이야기의 세상을 움직이는 상태로, 세상답게 재현하는 도구이다!’

사실 이것이 우리를 영화에게 더욱 빠져들게 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영화 이전에는 이야기의 세상을 경험한 일이 없다. 그것은 추상되고(언어) 연상되며(그림) 상상되는(음)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그 세상을 그대로 경험하게 해준다. 이야기 안의 철수와 영희를 실재화 시켜 진짜 세상에서처럼 움직이고 뛰어다니게 만들며, 그들을 생생하게 ‘눈’으로 목격하게 해주는 데, 심지어 그들의 눈으로 그 세상을 보기도 하며, 그들의 내면이 하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게도 한다. 물론 이즈음 사람들은 모두 영화가 가짜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어서 영화가 조금이라도 서툴게 만들어지면, 우리는 스크린에서 대번 떨어져 나오게 된다. 이야기 속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우리 몸이 있는 실제 상태를 의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그러지 못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는 철썩 같이 진짜라고 여겼는데, 스크린에서 다가오는 기차가 진짜 자신들에게로 돌진한다고 여겨 혼비백산해 객석에서 도망치느라 난리를 치기도 했다. 그것이 <시요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라는 뤼미에르의 영화 상영 때 벌어진 일이다. 그들은 그러니까 객석에서 도망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선로에서 도망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는 객석에 앉아 있었는데 말이다.

영화 <열차의 도착(Arrival of a Train at La Ciotat)>을 감상해보자!

이야기가 세상으로 경험된다는 말은 바로 이 상태를 지시한다. 이야기가 진짜로 여겨지게 되는 상태. 사실 이점에서 우리는 19세기 혹은 20세기 초에 처음으로 영화를 접했던 이들보다 더 어리석다. 말했듯이 이즈음 사람들은 모두 영화가 가짜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속에 두 시간 동안 진짜처럼 빠져있으니 말이다. 살면서 뱀파이어를 만난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더구나 시고니 위버가 만난 에이리언을 본 일도 없다. 우주에 간일조차 없으니……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동안 뱀파이어는 확실하게 존재하며, 에이리언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그때, 그들과 함께 우주에 가 있다!

영화가 인류에게 열어젖힌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야기를 경험의 대상이 되게 했으며, 이야기가 아니고 진짜 세상의 기록일 경우, 우리로 하여금 그 세상을 경험하고 느끼게 해주었다. 말하자면 이야기이든, 진짜 실제 세상이든, 공감하게 해주고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영화의 능력을, 공감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영화 자체의 가치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인간에 관해 깊고 진지한 감독들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 ‘세상’의 모습을 느끼도록 몰고 가는 이유는 분명하다. 영화가 ‘세상’을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으로써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장-뤽 고다르라고 하는 프랑스의 대단한 감독은 그래서 영화가 우리를, 우리의 병을 치유하는 도구라고 했었다. 그리고 영화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 분명히 그 치유의 역사였다.

 

글. 김성태(영화연구가)

<영화 완전 정복 – 6개의 테마로 본 영화>

6.19~7.24│15:30~17:30│매주 화요일

영화 역사를 반드시 길고 무수한 지식들과 함께 봐야 할까라는 물음에 본 강좌는 속 시원한 답을 내어 놓는다. 발명품으로, 20세기를 겨우 5년 앞둔 19세기 끝에 세상에 나타난 이 ‘영화’를 우리가 이미 가진 충분한 상식 위에 상상을 얻어 보자고. ‘영화’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6개의 테마 – 이야기, 스펙터클, 액션, 블록버스터, 장르, 예술로 영화의 모든 것을 정리해보는 본 강좌를 따라,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영화의 묘미를 더 즐기고 느낄 수 있도록 상상의 여행을 함께 떠나보자.

▪ 강사 김성태
– 영화연구가, 서강대학교 겸임교수, 성균관대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강의
– 프랑스 리용 2대학 영화학 석사, 파리 3대학 영화학 박사
– 영화 <이리>, <검은 갈매기> 각본
– 저서 <영화, 존재의 이해를 위하여>
공저 <네 정신에 새로운 창을 열어라>, <세계 영화사 강의>, <필름 컬쳐 5> 등

2018 아람문예아카데미 여름특강

기 간  6.18(월) ~ 7.31(화)

장 소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감상실

문 의  1577-7766 / www.artg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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