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화의 음악은 2010년대와 그 이전이 완전히 다르다. 2010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부터 예민함을 대신해 부드러움이 새로운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기교의 쇠퇴를 염려하는 팬들에 자신의 그대로를 보이려는 순수함이 공연에 그대로 드러났다. 1948년생, 당시 육순에 접어든 정경화는 은퇴 대신 변화를 모색했다. 필하모니아와 협연 이후 공식 무대를 갖지 않은 정경화는 2011년 7월 대관령국제음악제의 공동 예술감독을 맡아 후진을 양성하면서, 본인 역시 서울을 벗어난 무대에서 서서히 재기의 칼을 갈았다.
바로 이 무대, 브람스 피아노 트리오 1번의 파트너가 언니 정명화,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였다. 정경화의 연주에선 부상의 악령을 떨쳐내고픈 의지가 역력했고, 슬슬 회복의 조짐이 보였다. 젊은 시절의 날카로운 보잉은 사라졌지만 천천히 숨을 고르고 활을 지긋이 현에 가져다 대는 순간부터 주위를 압도했다. 차분했던 분위기에서 급격하게 도약하는 패시지에선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한 단계씩 올라가는 현자의 지혜가 선했다. 정경화는 이 무대를 통해 무한한 자신감을 안고 평창 알펜시아를 떠났다. 자신감의 원천은, 이제는 지음(知音)으로 칭할 만한 케너와의 만남이다.
케너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에서 건반의 역할이 소극적 반주가 아니라, 적극적 2중주여야 하는 당위를 일깨운 방식으로 정경화와 조응했다. 바이올린이 돋보여야 할 때 케너는 풀을 죽였고 박진감 넘치는 어택으로 열정을 표출할 땐 기름에 불을 끼얹은 듯, 같이 타올랐다. 케너는 단순히 정경화 사운드의 여백을 채우는 역할이 아니다. 케너와 점점 더 어우러지면서 정경화는 젊은 시절, 본인이 원하는 소리와 색채를 위해 스스로의 몸을 짜내던 야무졌던 매무새를 느슨하게 풀었다. 공연을 보면 기교가 쇠잔한 대신 연륜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고 따스한 내면의 성숙이 얼굴에서 나왔다.
2012년 1월 서울시향 신년음악회도 마찬가지였다. 복귀 때부터 “(정)명훈이랑, 서울시향과 연주하고 싶다”고 거의 노래를 부른 그는, 브루흐 ‘스코틀랜드 환상곡’으로 그 바람이 이뤄졌다. 눈부신 기교의 향연이 사라진 대신, 아르투르 그뤼미오의 해석처럼 리듬감을 부각하고 열정으로 노래하는 모습은 오래전 정경화의 자태 그대로였다. 세세한 소리에 집중하기보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연주하는 자세는 악장이 거듭될수록 뚜렷해졌다. 자의적으로 템포를 조절하려는 희망이 명백했고, 작곡가가 남긴 풍부한 정서를 천변만화의 표정으로 시각화하는 걸 특히 국내 올드팬들이 좋아했다.
2014년 12월 런던 로열 페스티벌 무대. 정경화는 44년전 자신의 세계 데뷔 무대에 케너와 함께 돌아왔다. “1970년 5월 13일”. 그녀의 영국 매니지먼트가 촬영한 카메라에 이곳에 섰던 날짜도 정확히 구술할 만큼 이곳은 정경화에게 특별한 장소다. 세계 최대의 음악 시장 런던에서 정경화는 실력으로 정면 승부해 비로소 세계 정상에 올랐다. 일정 수준에 오른 연주자가 런던에서 버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정경화 만큼 잘 아는 아시아 연주자는 없다. 젊은 시절 런던에 살았고 이곳에서 결혼했으며 런던 주재 오케스트라와 레이블에서 커리어를 쌓았다. “서울을 제외하면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청중은 런던 관객”이라고 애정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런던 관객들은 정경화의 공백이 궁금했고 정경화는 케너의 손을 잡고 무대에 섰다. 모차르트 소나타 K.379,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1번, 바흐 샤콘느, 프랑크 소나타로 이어지는 공연이 끝난 후 런던 정론지의 반응은 중립적이었다. 대개의 신문들이 무난한 연주를 의미하는 별 셋을 줬고, 공연 중 기침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 걸 주목한 ’더 타임즈‘는 별 둘을 줬다. 정경화는 ’가디언‘에 어린 관객을 언제나 환영한다는 실명 기고를 보냈다.
필자는 정경화의 적극적 대응에서 희망을 봤다. 청중과 미디어의 반응에 이렇게 예민하다는 점은 정경화가 여전히 완벽을 추구한다는 증명이다. 마치 2011년 예술의전당 독주회에서 본인의 기침 때문에 공연을 스스로 중단했을 때, 이를 응원하는 관객의 박수를 거부한 것처럼 정경화는 본인의 음악에 외부 요소가 불순물처럼 개입되는 걸 지금도 허용하지 않는다. 본인의 해석으로 결국 관객의 마음을 흔들고 싶은 욕심이 여전하다는 증거다.
그리고 런던 비평계의 냉담한 반응이 오히려 정경화의 파이팅을 불렀다. 열광하는 관객에 취하지 않고 청중의 리액션을 믿기보다 여전히 그날 자신의 감을 믿고 있다. 특히 바이올린을 바꾸고 난 다음, 정경화는 황혼녘을 더욱 붉게 물들이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에게 궁합이 맞는 악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정경화의 70대가 기대되는 근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