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아람문예아카데미 하반기 수업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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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으로 접근하는 미학입문’

우리는 미(美)를, 그리고 예술을 해석하고자 한다. 해석의 대상은 언제나 어떤 맥락 속에 위치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해석자로서의 우리도 역시 어떤 맥락 속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미와 예술, 그리고 이것들을 해석하고자 하는 우리는 지금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가?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 다양한 맥락들 중에서 무엇을 고를 것인가? 2018 아람문예아카데미 하반기 ‘개념으로 접근하는 미학입문 – 현실을 바꾸는 비-현실(예술)?’ 강좌는 이처럼 어려운 철학과 미학을 본격적인 개념으로 준비하기 위한 예비과정으로 기획되었다. 12주간 이어질 이번 강좌가 어떤 흐름으로 이어질지 미리 만나보자. [편집자주]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왼쪽부터 헝가리의 철학자 루카치(1885~1971), 영국의 철학자 실러(1864~1937) 

오늘날 약자들은 연대하지 않는다. 약자가 다른 약자를 위해, 하나의 소수자 집단이 다른 소수자 집단을 위해 저항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왜? 그 이유는 첫째,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배제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 약자들은 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사태의 두 가지 외양에 지나지 않는다. 약자들에 대한 배제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약자들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이라는 미술관 위에서 보이는 것은 약자들의 추한 모습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가해지는 배제인 것이다. 이러한 가시성과 비가시성 사이에서 우리, 즉 관람객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고는 한다. ‘혹시 약자들은 배제의 망상에 빠져 있거나 배제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추한 약자들도 도움 받을 자격이 있을까?’

그러나 약자들의 추한 전시를 구경하고 있는 우리, 즉 관람객이 보고 있는 것은 과연 참일까? 참으로 약자들은 추한 것일까? 참으로 배제는 없는 것일까? 전통적으로 예술은 현실과 확연히 구분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예술과 현실 간의 경계는 흐려졌다. 예술과 현실의 차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꿈과 광기는? 철학자인 데카르트는 현실을 꿈에, 꿈을 광기에 비유한다.

사실 현실은 꿈과 광기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만일 우리의 눈에 약자들이 추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꿈이거나 망상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의 눈에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배제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꿈이거나 망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저항은? 지금 이 순간 저항하고 있는 이들은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달려드는 돈키호테와 크게 다를까? 오늘날 저항한다는 것은 한편의 자기망상적인 희극을 연출하는 것은 아닐까? 꿈과 현실이, 광기와 현실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저항이 꿈이나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이번 아람문예아카데미 하반기 미학 강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미학입문 – 현실을 바꾸는 비-현실(예술)?」이 던지고자 하는 물음이 바로 이것이다.

미학은 왜 어려운가? 철학은 왜 불편한가?

왼쪽부터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1804), 슐레겔(1772~1829), 마르크스(1818~1883)

미학은 어렵다. 미학을 쉽고 편안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없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을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학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철학은 의심으로 시작되었다. 철학은 쉽게 갈 수도 있을 삶의 길에 대한 회의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현실 속에 놓여 있는 이른바 ‘성공한 삶’으로 통하는 안전하고 편한 길에 대한 의혹에서, 모두가 옳다고 여기는 확실한 삶의 의미나 가치 또는 방식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했다.

물론, 철학에서 길어낼 수 있는 교훈은 일상적으로 유통되는 속견(doxa)이 제공해주는 교훈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플라톤이 말했던 것처럼, 동굴을 떠났던 철학자는, 그렇게 현실 속에서 이미 닦여진 길을 회의했던 철학자는 어쨌든 다시 동굴로 돌아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은 미학을 모르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방식으로, 즉 일상적 현실 속에서 대개 통용되는 방식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미학적 탐구의 결과로서의 아름다움과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일견 비슷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는 동굴을, 속견의 세계를 적어도 한 번은 떠났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를 사유하고자 하는 이는 아름다움에 대한 속견을 떠나야만 한다.

미와 예술을 사유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떠나야만 한다. 오늘날에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게 되었지만 한때 미를 대표했던 미술관을 떠나야만 하며,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즉 때때로 또는 빈번히 예술작품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이는 우리의 현실을 떠나야만 한다. 그리고 철학이나 미학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떠남’ 때문이다. 떠나는 것은 불편한 일이며, 또 더 나아가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고, 결국 불편하거나 불쾌한 것을 대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떠남을, 이 불편함을, 이 불쾌를 굳이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적어도 현실 변혁에 대한 (사막에서나 느낄 법한!) 갈증으로 인해 목이 바짝 타들어가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우리가 강의에서 보아야만 할 것은 예술적인 것이 우리가 현실을 보는 관점을, 그리고 (심지어!) 현실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가능성을 보기 위해서는 일단 떠나야 한다. 우리의 미학 강의는 본격적인 미학적 ‘떠남’을 개념적으로 준비하기 위한 예비 과정으로서 기획되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가?

왼쪽부터 독일의 철학자 블로흐(1885~1977), 아도르노(1903~1969), 벤야민(1892~1940)

이 강의에서 우리가 하게 될 일은 결국 미를, 그리고 예술을 해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해석을 시작해야 할까? 어떤 해석 혹은 어떤 맥락(context)으로부터 해석을 시작해야 할까? 앞으로부터, 아니면 뒤로부터? 해석의 대상은 언제나 어떤 맥락 속에 위치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해석자로서의 우리도 역시 언제나 어떤 맥락 속에 위치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언어를 통해 알려진 것들, 즉 말해진 것들이다. 그리고 모든 말해진 것들은 해석된 것들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미’나 ‘예술’과 같은 단어들을 알고 있다면, 그것들은 이미 말해진 것들이며, 바로 그렇기에 해석된 것들이다. 왜? 그 이유는 해석하는 우리가 이미 언제나 어떤 (해석적) 맥락 속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는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시도할 경우 이미 이 이해를 착수하기 전에도 사실 그것을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달리 말해, 맥락적 이해는 명시적 이해를 조건 짓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언가를 처음으로 알게 된다는 것은, 결국 이미 나도 모르게 알고 있는 것을, 즉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명시적으로 확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모든 첫 해석은 언제나 해석의 해석, 즉 재해석 혹은 해석의 반복일 뿐이다. 무언가를 해석한다는 것은 이미 해석된 것을 다시 해석하는 것이며, 이미 알려진 것을 다시 인식하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인식은 재인식이며, 모든 해석은 재해석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미에 관해서도 유효하다. 우리가 미와 예술을 해석하고자 할 때 이미 우리는 그것들을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해석적 맥락 속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만 한다. 미와 예술, 그리고 이것들을 해석하고자 하는 우리는 지금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가? 해석의 대상과 관련해서 현재 우리가 처한 맥락을 지정하기, 이것은 재맥락화의 과제이며,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 다양한 맥락들 중에서 무엇을 고를 것인가? 우리는 정치적으로 선택하고자 한다.

또는 동일한 국면을 달리 표현해 보자면, 우리는 미와 예술의 정치적 맥락을 재맥락화시키고자 한다. 왜 우리는 예술을 하는가? 예술적 창조는 신적 창조가 아니다. 예술적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 현실에 무언가를 덧붙이거나 또는 기존 현실에서 무언가를 빼내는 것이며, 그렇게 더하거나 뺌으로써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분할의 질서에, 강자와 약자를 나누고, 포함시킬 자와 배제할 자를 구분 짓는 상징적 질서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더하기와 빼기, 구상과 추상은 현실에 비-현실을 접목시키는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낯설게 느끼도록 만들 수 있다. 현실의 자명성을 예술이라는 가상(=비현실)으로 전복시키기, 현실의 투명성을 불투명하게 뒤흔들기, 즉 혁명(revolution). 어쩌면 예술은 현실을 바꾸도록 우리를 추동하는 것이 아닐까?

현실을 바꾸는 비-현실(예술)?

왼쪽부터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1940~), 바디우(1937~), 데리다(1930~2004)

어쩌면 우리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예술은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제1강: 예술의 자율성과 예술의 현실 참여(1)-아방가르드의 정치적 딜레마] [제2강: 예술의 자율성과 예술의 현실 참여(2)-저항하지 못하는 예술적 저항?]) 예술은 사회 변혁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에 있을까?([제3강: 제삼자로서의 예술(1)-루카치의 미적 미메시스, 칸트의 상상력과 취미판단] [제4강: 제삼자로서의 예술(2)-슐레겔과 실러의 낭만주의, 루카치의 기울어진 모방] [제5강: 예술의 자율성과 무관심성-칸트에서 유미주의까지] [제6강: 자기의식적 가상으로서의 예술-의심하는 꿈, 현실을 의심하는 예술, 팝아트] [제7강: 현실을 의심하는 예술-마르크스, 블로흐, 아도르노]) 달리 말해, 예술을 통한 정치적 변화는 가능한가? ([제8강: 꿈으로 꿈을 구제하기-벤야민] [제9강: 부당한 현실에 대한 증언-아도르노] [제10강: 미학의 정치-랑시에르] [제11강: 현실을 바꾸는 예술의 진리-바디우] [제12강: 애도의 작업으로서의 그림-데리다]) 그러나 만일 미적 가상으로서의 예술이 일종의 꿈에 불과하다면, 꿈꾸는 예술을 통해서 부당한 현실에 저항한다는 것도 역시 일종의 꿈이 아닐까? 그것은 헛된 망상이 아닐까? 글쎄? 강의에서 함께 꿈꿔보자(찡긋).

 

글. 장의준(철학자)

2018 아람문예아카데미 하반기

기 간  9.3(월)~12.12(수)

장 소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감상실

문 의  1577-7766 / www.artg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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