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독일의 철학자 블로흐(1885~1977), 아도르노(1903~1969), 벤야민(1892~1940)
이 강의에서 우리가 하게 될 일은 결국 미를, 그리고 예술을 해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해석을 시작해야 할까? 어떤 해석 혹은 어떤 맥락(context)으로부터 해석을 시작해야 할까? 앞으로부터, 아니면 뒤로부터? 해석의 대상은 언제나 어떤 맥락 속에 위치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해석자로서의 우리도 역시 언제나 어떤 맥락 속에 위치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언어를 통해 알려진 것들, 즉 말해진 것들이다. 그리고 모든 말해진 것들은 해석된 것들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미’나 ‘예술’과 같은 단어들을 알고 있다면, 그것들은 이미 말해진 것들이며, 바로 그렇기에 해석된 것들이다. 왜? 그 이유는 해석하는 우리가 이미 언제나 어떤 (해석적) 맥락 속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는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시도할 경우 이미 이 이해를 착수하기 전에도 사실 그것을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달리 말해, 맥락적 이해는 명시적 이해를 조건 짓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언가를 처음으로 알게 된다는 것은, 결국 이미 나도 모르게 알고 있는 것을, 즉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명시적으로 확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모든 첫 해석은 언제나 해석의 해석, 즉 재해석 혹은 해석의 반복일 뿐이다. 무언가를 해석한다는 것은 이미 해석된 것을 다시 해석하는 것이며, 이미 알려진 것을 다시 인식하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인식은 재인식이며, 모든 해석은 재해석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미에 관해서도 유효하다. 우리가 미와 예술을 해석하고자 할 때 이미 우리는 그것들을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해석적 맥락 속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만 한다. 미와 예술, 그리고 이것들을 해석하고자 하는 우리는 지금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가? 해석의 대상과 관련해서 현재 우리가 처한 맥락을 지정하기, 이것은 재맥락화의 과제이며,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가 위치하고 있는 다양한 맥락들 중에서 무엇을 고를 것인가? 우리는 정치적으로 선택하고자 한다.
또는 동일한 국면을 달리 표현해 보자면, 우리는 미와 예술의 정치적 맥락을 재맥락화시키고자 한다. 왜 우리는 예술을 하는가? 예술적 창조는 신적 창조가 아니다. 예술적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 현실에 무언가를 덧붙이거나 또는 기존 현실에서 무언가를 빼내는 것이며, 그렇게 더하거나 뺌으로써 현실적으로 통용되는 분할의 질서에, 강자와 약자를 나누고, 포함시킬 자와 배제할 자를 구분 짓는 상징적 질서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더하기와 빼기, 구상과 추상은 현실에 비-현실을 접목시키는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낯설게 느끼도록 만들 수 있다. 현실의 자명성을 예술이라는 가상(=비현실)으로 전복시키기, 현실의 투명성을 불투명하게 뒤흔들기, 즉 혁명(revolution). 어쩌면 예술은 현실을 바꾸도록 우리를 추동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