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경험 조차 레디메이드(ready-made : 기성품)되는 세상

2018 고양호수예술축제 – 해외초청작 미리보기
2018년 9월 14일
2018 문화가 있는 날
2018년 9월 14일
42018년 9월 14일
길을 아는 것과, 길을 직접 걷는 것에는 차이가 있지.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knowing the path and walking the path.


영화 <매트릭스>(matrix) 中 모피어스의 대사

The Buggles Video killed the radio star

요즘 사람들은 더 이상 ‘본방사수’에 매달리지 않는다. 방영 후 2~3시간만 지나도 인터넷을 통해 ‘다시보기’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뿐일까, 방송사에서 핵심 장면만 2~3분 분량으로 쪼개어 올려놓은 스트리밍 동영상 클립을 몇 개만 훑어보면 1시간짜리 프로그램 전체를 다 본 것과도 같다. 저마다 보고 싶은 TV 프로그램을 스마트폰으로 검색만 하면 장소와 시간에 구애 없이 편리하고 쉽게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는 세상인 것이다. 이것은 비단 TV 콘텐츠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책, 음악, 미술 등 모든 콘텐츠가 동영상 클립으로 가공되어 웹상으로 퍼뜨려지고 있다. MCN(Multi Channel Network)이라는 개념으로 운영되는 동영상 웹사이트의 크리에이터들이 끊임없이 이러한 콘텐츠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콘텐츠들은 이제 사람들이 검색한 키워드에 대해 보여주는 단순한 구조를 벗어나, 좀 더 진보된 형태로 사람들에게 노출되고 있다. SNS와 만난 검색엔진의 인공지능은 이제 사람들이 관심 있을 만한 키워드의 동영상을 미리 예측하여 보여준다. 예를 들면 영화 <러빙 빈센트>의 티저 예고편을 플레이하면, 추천 동영상으로 크리에이터 누군가가 업로드한 반 고흐 소개 동영상이 보여지는 것이다. 마치 사용자의 사고체계를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시스템에 당혹스러우면서도, 편리하게 내 관심사의 관련 콘텐츠를 볼 수 있으니 검색의 귀찮음을 줄여준다는 면에서 고마울 따름이다. 이러한 서비스를 웹 업계의 전문용어로 ‘큐레이션’ 이라고 한다. 마치 박물관의 큐레이터처럼 실시간으로 사용자의 니즈에 호응하고 친절하게 정보와 콘텐츠를 제공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제 적어도 문화 생활을 향유하는 데 있어서 만큼은 고민하거나 생각할 필요가 없다. 몇 글자의 키워드만으로도 그와 관련한 모든 정보와 자료를 동영상의 형태로 열람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작품을 읽어주는 동영상이 될 수도 있고, 어렵게 보이던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을 쉽게 해설해주는 동영상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충분히 실감나게 간접 경험의 형태로 콘텐츠를 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실제 내가 접한 것은 어떤 기업 또는 개인이 만든 콘텐츠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실제 그 콘텐츠를 경험하고 사유한 것처럼 스스로 여길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타인에 의해 가공되고 구성된 경험과 감상에 아무 생각없이 편승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편리해질수록 인간 본연의 생활 양식을 유지하려는 최소한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차를 타고 편하게 다닐 수 있을수록, 걷고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싼 가격에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더라도, 한 두 가지 음식은 스스로 맛있게 요리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온전하게 내가 원하는 것들의 가치를 음미하고 느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대가 원하는 콘텐츠가 있다면 조금 더디고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원래의 것에 가깝게, 원작 그 자체로 즐기도록 해보자. 몇 분짜리 내레이션과 몇 줄의 자막으로 정리된 동영상 콘텐츠가 아무리 쉽고 편해도, 온전히 나만의 느낌과 경험으로 나의 세계관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는 소중한 시간마저 맡겨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글. 김승훈(TAGN)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