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교적으로 도저히 연주 불가능하다.”
“사상 처음으로 음악작품에서도 악취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위의 첫 번째 문장은 이 곡을 헌정 받은 당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였던 레오폴트 아우어가, 두 번째 문장은 이 곡의 초연 후 당대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한슬릭이 한 말이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만큼 엄청난 혹평에 시달린 작품도 드물 것이다. 이 곡의 진가를 제대로 안 바이올리니스트 아돌프 브로즈키만이 유일하게 연주여행 때마다 자진해 연주하면서 차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오늘에 와서는 베토벤, 브람스(또는 멘델스존)의 것과 더불어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평가 받고 있으니 이 곡은 그야말로 고진감래(苦盡甘來), 화씨벽(和氏璧)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현실에 좌절하는 대신 희망을 품고, 나의 진가를 알아주고 그것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힘차게 정진하게 만드는, 우리네 인생에도 큰 힘을 주는 작품이다. 바이올린 독주의 눈부신 근대적 연주 기교와 오케스트라의 풍부한 색채, 러시아 민요의 가미로 인한 애수에 젖은 아름다운 선율 등은 참신하고 독창적이다. 처음에 아우어에게 바쳐진 이 곡은 후에 브로즈키로 헌정자가 바뀌었다. (연주시간 약 35분)
1악장 : 알레그로 모데라토
조용하고 명상적인 1주제, 차이코프스키 특유의 러시아적 애수가 녹아 있는 가요풍의 2주제와 함께 웅장한 오케스트라 합주가 대비를 이룬다. 아우어가 거부한 카덴차(독주자가 반주 없이 자신의 기교를 최대한 과시하기 위해 연주하는 부분) 후에 살포시 얹어지는 플루트의 선율은 짜릿하다. 이후 격렬하고 활기차게 1악장이 마무리된다.
2악장 : 칸초네타, 안단테
‘작은 노래’라는 뜻의 칸초네타라고 명명되어 있듯이 감미롭고 서정적이다. 관악기의 서주가 흐른 후 나오는 주제는 슬라브적인 정서가 농후한 애수어린 선율로서 바이올린의 음색에 최적화되어 있다. 바이올린의 고음으로 선율이 연주되고 플루트가 대선율로, 클라리넷이 셋잇단음표 반주하는 악장의 후반부는 황홀경을 자아낸다. 자연스럽게 소리가 잦아들면서 3악장으로 쉬지 않고 넘어간다.
3악장 : 알레그로 비바치시모
강렬한 팡파르와 함께 짧지만 화려한 카덴차가 이어지고 빠르고 경쾌한 3악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러시아 전통민요 트레팍의 변형으로서 러시아 농민들이 춤을 추든 듯한 활기찬 곡조이다. 이런 활발함은 중간 부분에서 목관악기군과의 대화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불꽃이 터지는 것처럼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열광적으로 끝맺는다.
2 Comments
클래식은 배우면서 듣는 음악이다.
알면 알수록 깊이를 알아가는게 클래식이다.
고전을 읽고
듣고
즐기고 소화하는 것은
내 수준을 넘어서는 수학문제를해결하는 쾌감을 준다.
음악은 수학에 가까운 예술이라 생각하기에,
좋은 글이다.
정보가 듬뿍 담겼다.
글을 쓴 작곡가 성용원의 폭넒은 인문학적 소양과 통찰력아 번듯이는 거 같아 읽기만 해도 음악을 듣고 싶게 만든다.
러시아 음악의 흐름부터
신지아라는 자생적 음악인의 자립에 관한 느낌.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클래식 관객의 수요등도 생각되었다.
불가능했던 음표의 연주가
누군가에 의해
개척되고
이제 표준이 되는 모습은
사업을개척하는 비지니스 맨의 그것과도 일치한다.
즐겁다.
허나
고양시가 특례시가 되었다고
대도시라 불리는게 조금 거북했으며,
마치 이유식을 먹이는 아빠가
아이에게 과도한 몸짓으로
감정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특히 조지아가 발칸반도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언제 카프카스 산맥이
알렉산더 대왕의 고향으로 이사했는지 궁금했다.
내가 모르는 이 지식들이
어디서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그냥 가벼운 가십으로 넘어가도
좋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식을 전하고
보급하는 사람이
글을 써간다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새기게된다.
글 잘 읽었습니다. 단순히 곡 소개. 정보를 제공하고 연주자 약력을 읊은것이 아닌 글쓴이가 작품을 제대로 알고 숙성해서 전달하는 느낌을 받아 음악을 듣고 싶어지게 만드네요~~~
지난 10월의 후기도 사회 관점에서 잘 풀어써서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