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018, 겨울 (대한민국 어느 30대의 초상)

생각 그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하여
2018년 11월 26일
2018 문화가 있는 날
2018년 11월 26일
42018년 11월 26일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김승옥, 단편소설 <무진기행> 中

이승열 「아도나이」

특별히 기억에 남길 만한 사건이 없는 순간의 연속이었던 오늘 하루가 이렇게 또 저물어가고 있었다. ‘무난함’이라는 표현 이상의 다른 형용사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의 ‘평범함’. 그저 언제나와 같던 저녁의 퇴근길 지하철이었다.

2호선 내선순환 열차를 타고 합정역을 지나 당산역으로 향해가며 한강 위 철교를 지나면서,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를 빼곡히 채운 퇴근길 자동차들의 불빛을 바라보며 그제야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고 집으로 가고 있다는 안도감에 나도 모르게 슬쩍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매번 똑같은 일상의 반복일지라도 그 일상 덕분에 불확실한 생활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접어두고 조금이라도 웃어볼 수 있다는 것이 고맙고 행복했다.

마음 한 편에는 나의 삶이 세탁기 드럼처럼 빙글빙글하며 대충 4분의4박자 정도쯤 되는 무미건조한 리듬으로 일정하게 돌아가고 있음에 불안함도 있지만, 어떻게든 되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세상을 도모할 야망을 품은 것도 아니고, 엄청난 대부호가 될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일상 안에서 안정적으로 소소한 행복를 정도 누리고 싶은 마음이니, 굳이 무리를 하지만 않으면 그렇게 큰 고난이 닥칠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20세기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고, 21세기에 청년이 된 나는 ‘무한경쟁시대’라는 낡아빠진 캐치 프레이즈에 휘둘려 내 삶의 템포도 설정 못하고 있을 정도로 사는 게 녹록하지 않으니, 이대로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내 삶의 방향성을 발전적으로 설계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경쟁하라고 이야기한다. 도태되지 않으려면 앞으로 계속해서 전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안정을 추구한다고 해서,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만도 아닌데 말이다. 시대가 변화하는 관성을 거스르면서까지 외골수가 되어 가만히 있는 것이 결코 안정을 지향하는 것이라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 ‘무난하게 시대의 흐름에 맞도록 내 일신의 처신과 쓰임을 다한다’ 정도가 내가 말하는 안정 추구적 삶에 대한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소박한 일상의 행복을 이어나가기 위해 그 어떤 저항과 이질감 없이 세상의 흐름에 녹아드는 것이다. 농담 조금 섞어 말하자면 ‘도시 속의 자연인’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30대 중반의 사람들은 변화에 지친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는 IMF를 겪었고, 비로소 사회에 나와 첫 번째 직장에 취업할 즈음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겪었다. 그들의 유년기는 대체적으로 가난했고, 청년이 된 지금은 운이 좋게도 조금은 형편이 나아져서 그럭저럭 소소한 행복이나마 이야기하며 살 수는 있게 되었다. 변화란 것이 결과적으론 현제 좋은 쪽으로 이끌어져 왔지만, 계속 그렇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할 수는 없기에 이대로 머물고 싶은 마음이 크다. 특별히 지금의 무언가가 바뀌는 것보다, 지금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저 소망처럼 소소한 일상이 앞으로도 계속 지켜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Happily ever after.

글. 김승훈(TA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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