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 전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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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썬샤인의 전사들> 리뷰

자기만의 자장(磁場)을 형성한 동시대 젊은 연극인들을 주목하는 프로젝트, 2018 새라새 스테이지가 성기웅의 <소설가 구보氏와 경성사람들>, 김은성 작·부새롬 연출의 <썬샤인의 전사들> 등 두 편의 명작을 선보이고 막을 내렸다. 우리 근현대사의 아프고 쓰라린 순간들을 거대 관점으로 들여다보고자 한 <썬샤인의 전사들>은 여러 시대를 관통하며 수많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기에 다채로운 공간 활용, 허를 찌르는 인물 등장과 동선 등 ‘무대성’과 ‘연극성’이 특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광활한 스케일의 서사물이 가변형 극장인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 어떻게 펼쳐졌는지 돌아보고, 2년 만에 비교적 일찍 이루어진 재공연의 의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편집자주]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은 제주 4·3사건, 한국전쟁, 해방 직후 혼란기, 그리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까지 다루는 극중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극중극에 등장하는 ‘갇혀 있는 아이들’이 작품 속 화자이자 소설가인 한승우를 찾아오면서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이 환기된다.

2018년 어쩌면 2019, 채워지지 않은 허기

2016년 극단 달나라동백꽃의 극작가 김은성이 쓰고, 극단 대표 부새롬이 연출한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이 ‘2018 새라새 스테이지 : 젊은 연극인 시리즈’의 일환으로 2년 여 만에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2018.11.28. ~ 12.01.)에서 다시 선보여졌다. 두산아트센터에서의 초연(2016.09.27. ~ 10.22.)과 이번 새라새극장에서의 재공연을 비교하자면, 13명 배역 가운데 7명 정도의 캐스팅이 바뀌고 공연시간이 15분 정도 줄었으나, 가장 크게 달라진 건 극중 현실이라 하겠다.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제주 4·3사건, 한국전쟁, 해방 직후 혼란기, 그리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까지 다루는 극중극은 마찬가지지만 초연은 첫 장면을 2019년 봄으로 상정해 2020년 겨울로 마무리 짓는 반면, 이번 재공연의 극중 배경은 2018년 봄이다. 2016년 9월 초연 당시 2017년에 정권 교체가 이뤄질 줄 몰랐던 작가가 통상적인 19대 대통령 선거(2018년 12월)를 반영한 것이 이유이다. 하여, 초연은 반성과 회개를 통해 희망을 찾고는 있지만 현실이 아닌 몇 년 후를 상상한 바람이었다. 반면, 이번 재공연은 극중 상황이 마치 허구처럼 시간을 앞당겨 실제 현실에서 펼쳐지면서 과거와 미래를 부유하는 허무함을 떨치게 되었다.

‘작가를 찾아오는 갇혀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부제목이 의미하듯 세월호 침몰과 이후 대처 과정이 이 작품의 모티브였고, 극중 세월호에 갇힌 단원고 아이들의 단체 영정사진이 흐릿하게 스쳐 등장하지만, 작품에서 화자이자 주인공인 소설가 한승우가 아내와 딸을 잃은 3년 전 사건은 K타워 붕괴 사고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 사고 가운데 중 유일한 허구로 2019년 어쩌면 2024년 이후에도 3년 전이라는 설정을 고려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작품 속 화자이자 소설가인 승우는 3년 전 K타워 붕괴 사고로 딸 봄이를 잃고 절필한 채 슬픔에 빠져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 어딘가에 ‘갇혀 있는’ 봄이가 승우를 찾아와 자신이 좋아하던 애니메이션 ‘썬샤인의 전사들’을 이야기한다.

재공연이자 다시 초연

초연 당시 인양을 미룬 채 바다에 잠긴 세월호를 알면서도 허구의 재난사고를 설정에 우겨 넣어야 하는 작가의 현실 부정은 서글픈 일이었다. 역사의 아픈 과거를 외면하지 않고 진실을 직시하고 있지만, 현실에 발을 디디지 않는 작품은 헛헛한 허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차범석 희곡상을 받을 만큼 완성도를 갖췄으나 극복하지 못하는 무엇이었다.

하여 재공연을 올리는 2018년 11월, 작품이 현실과 맞닿아 괴리를 극복하면서 관객 입장에서는 극장 안팎의 밀도 차이를 극복하기가 한결 나아졌다. 초연을 보는 마음으로 작품을 봤으나 초연이라고 우길 수는 없다. 다만 작품을 대하는 작가와 연출과 배우의 자세가 달라졌을 것이니, 그것은 작품에 녹아들었을 것이다. 작가는 “아니,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야”라는 대사로 소회를 대신했고, 연출 역시 ‘한승우의 소설은 완결이 나지 않았다’고 했다.

객석 정중앙을 80석가량을 덜어내고 중앙으로 길게 뽑아낸 새라새극장 무대에서는 연기를 대하는 배우의 자세나, 뒷모습에서도 얼굴 표정을 짐작할 수 있는 그들의 연기력이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제주 출신 15살 미군 카투사 소년병 나선호 역할의 김정화 배우.

객석을 덜어내 무대를 만든 극장

김정화 배우의 짧게 빡빡 민 뒤통수에서 땀이 주르륵 뒷목을 타고 흐른다. 극중 배경은 한반도 북동쪽에 위치한 인공저수지 장진호, 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를 앞둔 어느 날이다. 그해 겨울 장진호는 미군 역사상 영하 30도를 밑도는 지독하게 추운 가장 추운 전장이라는 설정이다. 김정화 배우는 제주 출신 15살 미군 카투사 소년병 나선호 역을 맡아 제주도 사투리를 익히고 동시에 어수룩한 영어를 구사했다. 제주도에서 동생 명이를 잃고 장진호 전투에 오기까지 많은 장면을 짧은 시간 안에 소화하기 위해 빠르고 정확하게 호흡을 맞췄다.

배우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직한 몸은 서늘한 극장에서도 마치 3라운드 권투 스파링을 뛴 듯 땀을 흘린다. 객석 200석 가운데 80석가량을 덜어내고 중앙으로 길게 뽑은 무대라, 패션쇼가 그렇듯 정면 외에도 전체를 볼 수 있다. 종종 배우의 뒷모습만 봐야하는 마주보는 객석 구조는 연기를 대하는 배우의 자세가, 뒷모습에서도 얼굴 표정을 짐작할 수 있는 연기력이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등퇴장을 하기에 좁은 무대를 대신해 객석 뒤로 오가는 공간을 내어 앞, 뒤, 좌, 우 어디에서 배우가 등장할지 몰라 긴장감을 더한다. 소극장치고 크고 넓은 새라새극장의 양 옆으로 난 출입구마저 배우가 자유롭게 활용한다. 무대에 설치하지 않은 문을 대신해 극장 출입구를 열고 닫는 설정은 단순한 등장과 다르게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제약이 없다시피 한 공간 확보는 연출과 배우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지만 객석에 따라 시야 제한이 커지기 마련이다. 특히 객석 2층에서 사각이 심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를 감안하여 1층보다 훨씬 저렴하게 가격을 낮추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배우 13명이 등장하는 연극은 무대 크기를 고려하기 전에 200~300석 내외의 관객을 수용하는 소극장 수익으로는 순익은커녕 제작비를 감당할 수 없어 민간 기획사가 할 수 있는 기획이 아니다. 중간에 휴식을 두지만 160분이라는 긴 공연시간도 중극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고 낮아 관객이 답답함을 느끼는 소극장에는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젊은 연극인 시리즈는 수많은 소극장용 연극 가운데 가장 길고 배역이 많이 등장하는 두 편(시리즈 1은 <소설가 구보氏와 경성 사람들>)을 고른 셈이다. 대학로와 달리 관객 유치가 고민이겠지만 손에 꼽는 좋은 연극을 지역주민에게 선보이고, 이후 서울 공연과 연계해 작품의 재공연에 이바지 한다는 의미에서 공공 문화재단이 극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좋은 방향을 제시했다.

명이와 막이가 전하는 말

극에서 정한 2018년 봄, 그러니까 실제로도 올해 봄부터 뭔가 달라지긴 달라졌을까. 딱히 와 닿지 않는다 싶어도 이런 것이 있었다. 한겨레신문이 3월부터 주 1회씩 [제주 4·3 70주년 기획 ‘동백에 묻다’] 기획 연재를 시작했다. ‘12살 소녀의 몸에 새겨진 제주 4·3의 기억’(등록 : 2018-10-23) 기사를 읽으면 극중 토벌단에 부모가 총살당하고 청년단을 피해 오름 동굴에서 숨었다가 숨진 7살 명이의 사연이 팔순 노인의 입에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

명이가 죽지 않고 살아나 70년 동안 가슴팍에 품었던 응어리는, 초연의 극중 시간대처럼 2019년 봄이 되어서야 풀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끝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을 지도 모르겠다. 극중 만주로 끌려가 위안부가 된 꼬맹이 막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故 김순옥 할머니(97세)께서 일본 정부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지 못하고 며칠 전인 12월 5일에 별세하셨듯이 말이다.

곽지숙 배우가 연기한 송시춘은 소학교 학생, 방직공장 여공, 국문과 교수까지 다양한 연령으로 등장한다. 작가 지망생 선호, 화가 지망생 호룡, 그리고 시춘의 언니 시자가 손에 쥐었던 낡은 수첩은 결국 시춘에게 이르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모티브’가 된다.

이제 막, 1차 보고서

연극이 끝나고 한적한 극장, 곽지숙 배우가 가장 먼저 로비로 나왔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마스크를 올려 쓴 모습이 흘낏 보기에도 피곤하고 지친 모양새였다. 노기용 배우가 선배 배웅을 나왔다. 초연을 보러온 장재호 배우가 인사를 건넸고, 곽지숙 배우는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집에 가는 길이라고 하는 듯 했다. 20대 젊은 배우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작품에서 곽지숙 배우는 권태건 배우와 함께 초연에 이어 극의 중심을 잡고 있다.

그녀가 소학교 시절과 방직공장 여공을 거쳐 교수까지 연령대를 달리해 연기한 송시춘은 한승우가 소설을 쓰게 된 직접적인 연결고리이자, 승우에게 참회의 대상이다. 극중 문인학생연합 간첩단 조작 사건(1984)의 주모자로 몰린 송시춘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은 생생하고 지독하다. 하지만 극에서는 옥고를 치른 이후 그녀가 고문 후유증을 겪지는 않았는지, 어떤 노년을 보냈는지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재공연이 올라가는 즈음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실태 조사연구>(1976~2005)를 발간했다.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 ‘송시춘’들의 사연과 함께 그 이후의 삶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긴 셈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이번 연구서를 완성본이 아닌 1차 보고서로 정한 이유는 김은성과 부새롬이 한 말과 취지가 다르지 않다. 이제 발을 내딛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세상이 조금 좋아졌다’는 김은성의 판단에 동의한다면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귀를 닫고 외면하였던 시절을 지난, 듣고 채록하고 남겨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절실한 반성 같은 것이다. 언론이든 기관이든 그리고 소설이든 연극이든 이야기를 끝맺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그래서 독자가, 관객이 기억하고 더불어 반성할 여지를 준다면 올해 젊은 연극인 시리즈는 성공이다. 내년에도 좋은 작품을 가지고 찾아오길, 그리고 객석이 만석으로 채워지길 기대한다.

극중 봄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제목이기도 한 ‘썬샤인의 전사들’은 “어둡고 그늘지고 고통스러운 곳에서도 밝은 세계를 꿈꾸고, 그 세계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이 작품의 작가 김은성은 말한다.

 

글. 이태욱(공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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