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양심을 깨우는 ‘그녀’의 방문

카혼을 아시나요?
2019년 1월 5일
2019 문화가 있는 날
2019년 1월 18일
명작으로 읽는 세계 연극 ① 스위스 편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

2019년을 맞아 ‘온라인 누리’가 ‘웹진 누리’로 이름을 바꾸고 개편을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2019년 첫 호부터는 문화예술에 관한 교양지식과 삶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유익한 읽을거리를 선보일 예정이다. ‘명작으로 읽는 세계 연극’ 시리즈는 세계 연극사에서 손꼽히는 희곡들을 국가별로 한 편씩 골라,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 작가가 희곡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각해보는 칼럼이다. ‘명작으로 읽는 세계 연극’은 2019년도 ‘웹진 누리’ 홀수 발행호에 연재된다. [편집자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스위스의 자연. 하지만, 스위스를 대표하는 극작가들의 작품은 이런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장엄한 알프스 산맥과 맑은 호숫가, 푸른 들판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집들이 어디를 봐도 그림엽서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는 곳. 에델바이스가 곱게 피어 있는 산기슭에 오르면 어디선가 요들송이 들려올 것 같고 도시에서는 달콤한 초콜릿 향기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곳. 바로 스위스다. 스위스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중부 유럽의 작은 나라이지만, 수려한 자연경관과 영구중립국이라는 특수한 상황 덕분에 오래 전부터 아름답고 평화로운 ‘지상낙원’의 이미지를 이어온 곳이다.

하지만 스위스를 대표하는 극작가들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떠올리는 이 나라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독일어권 문학계로 분류되는 스위스의 대표 극작가로는 막스 프리쉬(Max Frisch)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ürrenmatt)를 들 수 있는데, 이들 작품 대부분이 상당히 어둡고 그로테스크하다. 이들은 모두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으며 인간의 윤리와 사회 정의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날카로운 비판의식으로 무장한 작품들을 써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뒤렌마트는 부조리 연극으로부터 출발해 과장과 풍자, 폭로 등의 방식으로 비뚤어진 사회와 위선적인 시민의식을 고발하는 작품들을 주로 썼으며, 그의 작품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뒤렌마트는 우리를 단죄하려는 재판관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가만 놓아두지 않는 양심이다”라는 독일의 문학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Marcel Reich-Ranicki)의 평은 뒤렌마트의 작품세계를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뒤렌마트는 우리를 단죄하려는 재판관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가만 놓아두지 않는 양심이다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

전후 독일문학의 구원투수, 뒤렌마트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독일어권 문학계에 뒤렌마트는 그야말로 구원투수와 같은 존재였다. 전후(戰後) 프리쉬나 뒤렌마트 같은 뛰어난 극작가들이 스위스에서 많이 나올 수 있었던 데는 영구중립국이라는 스위스의 정치적 조건이 크게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포화와 폭격이 난무하던 세계대전 중에도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은 스위스는 상대적으로 예술활동이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만큼 예술가들이 활발한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시기 대학을 다니고 있던 젊은 뒤렌마트는 문단에 혜성처럼 등단해 정체되어 있던 전후 독일어권 문학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었다.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렌마트는 냉소적인 무신론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았고, 대학에서는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읽으면서 더욱 단단한 무신론에 빠져들었다. 철저한 무신론과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한 뒤렌마트의 사고방식은 그의 희곡 작품들에서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삶과 죽음, 신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갈등에 대해 언제나 한 발짝 떨어진 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뒤렌마트 특유의 풍자와 기지, 진지함과 허무한 웃음이 공존하는 위트가 생겨난다.

뒤렌마트의 대표작으로는 <로물루스 대제>(1952) <미시시피 씨의 결혼>(1952) <천사 바빌론에 오다>(1953) <노부인의 방문>(1956) 등이 있다. 1950~60년대에 왕성한 집필활동을 펼친 뒤렌마트는 이 시기 이후에는 주목할 만한 희곡을 발표하지 못했으나 사회활동에는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1968년 소련이 체코를 침공했을 때는 막스 프리쉬, 귄터 그라스 등 동료작가들과 함께 강력한 항의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왼쪽부터 스위스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wikipedia)와 《뒤렌마트 희곡선》(민음사)

천억보다 저렴한 우리의 ‘정의’

뒤렌마트를 세계적 지성으로 부각시켜준 희곡 <노부인의 방문>(Der Besuch der alten Dame)은 돈으로 정의를 구매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노부인의 방문>은 어느 몰락한 유럽의 작은 도시 귈렌을 배경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기차역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이 도시 출신으로 갑부가 되어 금의환향하는 자하나시안 부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극도의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던 시민들은 그녀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고, 그녀를 환영하기 위한 각종 행사를 준비하는 데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런 그들 앞에 급작스럽게 나타난 노부인 자하나시안은 환영행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곧장 자신의 용건부터 이야기한다. 그녀는 시민들 앞에서 이 도시에 천억(번역된 시대에 따라 구체적인 액수는 다르지만, 도시 하나를 재생시킬 만한 어마어마한 금액을 상상하면 된다)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하는데 단,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클레어 자하나시안 : 조건을 말하지요. 여러분에게 10억을 주고 정의를 사겠습니다.
(쥐 죽은 듯한 고요.)
시장 :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요, 여사님?
클레어 자하나시안 : 말한 그대로.
시장 : 하지만, 정의를 살 수는 없습니다.
클레어 자하나시안 : 살 수 없는 건 없어요.

– 《뒤렌마트 희곡선》(김혜숙 옮김, 민음사)에 수록된 <노부인의 방문> 중에서 –

구체적으로 자하나시안이 말하는 조건이란, 젊었을 때 자신을 배신하고 거짓 증언을 사주해 임신 중이던 자신을 마을에서 쫓겨나게 만든 옛 애인 알프레드를 죽여 그 시체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누가 죽여도, 언제 죽여도 상관없다. 다만 그가 죽을 때까지 자신은 이 마을에 계속 머무를 것이며 그가 죽는 순간 수표를 써 주겠다는 노부인의 섬뜩한 제안에 시민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처음에 시민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만, 결국 풍요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알프레드를 살해하는 데 집단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천억과 옛 애인의 시체를 맞바꾸자고 하는 노부인의 제안은 그로테스크하기 그지없지만, 이 작품에서 그보다 더 그로테스크한 것은 이 제안을 받고 점차 변해가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노부인의 제안을 거절하며 동료인 알프레드를 지키겠다고 당당히 선언하지만, 어느새 알프레드가 어디로 도망가지는 않는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그가 스스로 죽어주기를 은근히 바란다.

그런가 하면 ‘약속된’ 천억에 대한 기대감에 부푼 시민들은 생필품과 사치품 등을 끊임없이 사들이는데, 이러한 이웃들의 달라진 삶은 그 자체로 알프레드를 죽음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와 아들, 딸마저 자신을 담보로 한 이 흥정의 결과를 기대하며 사치품을 사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알프레드는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마을 사람들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맡긴다. 마을 시민 모두가 모인 회의장. 어둠 속에서 알프레드는 누군가의 손에 목이 졸려 죽지만, 결국 그를 죽인 것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이웃인 마을 사람 모두인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 정유나

검은 표범과 후불식 소비 패턴

한편 <노부인의 방문>은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과 이를 보여주는 과정에 있어 흥미로운 점이 두 가지 있다. 먼저 극중 ‘검은 표범’이란 상징이 지니는 중의적인 의미다. 작품 속에서 노부인은 검은 표범을 애완동물처럼 데리고 다니는데, 알프레드와의 대화 속에서 검은 표범은 이들이 연인이었을 당시 자하나시안 부인이 알프레드를 부르는 애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극중 노부인의 제안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질 무렵, “표범이 도망쳤다!”고 외치며 사람들이 이를 잡으러 나서는 장면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우선은 실제로 자하나시안 부인의 우리로부터 도망친 검은 표범을 잡으러 가는 것이고, 이는 곧 젊은 시절 자하나시안 부인이 ‘검은 표범’이란 애칭으로 불렀던 알프레드를 쫓는 죽음의 사냥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은 그들 마음 속, ‘검은 표범’과 같은 검은 욕망이 드디어 윤리와 도덕의 울타리를 뚫고 밖으로 뛰쳐나왔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표범이라는 상징을 통해 이렇게 풍부한 의미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작가 뒤렌마트의 재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마을 사람들이 알프레드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가는 과정이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의 후불식 소비 패턴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아직 노부인으로부터 약속한 천억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알프레드의 잡화점에 찾아와 이런저런 물건들을 끊임없이 사 들인다. 그리고 대체 어떻게 값을 지불할 것이냐는 알프레드의 절규에 그냥 “달아놓으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달아놓은 금액이 점점 커져갈수록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는 알프레드의 죽음이 더욱 절실하게 되고, 결국 이들의 소비 욕망은 알프레드를 죽음으로 내모는 주된 동력이 된다. 이러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신용카드로 일단 소비 욕망을 채운 뒤 그 돈을 갚기 위해 살아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의 소비 욕망으로 굴러가는 자본주의의 본질과 그 폐해를 일찌감치 꿰뚫어본 작가의 날카로운 안목이 돋보이는 설정이다.

1959년 독일에서 텔레비전 영화로 제작된 <노부인의 방문>

‘노부인’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올 수 있다

결국 모두가 지켜보는 속에서 알프레드가 죽음으로써 종결되는 이 드라마는 인류의 고귀한 가치인 ‘정의’라는 것이 돈에 팔려갈 수 있다는 암울한 결론을 그로테스크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처음에는 동지의 눈빛으로, 그러나 점차 자신들의 지겨운 가난을 종식시켜줄 사냥감을 바라보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알프레드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 변화다.

누구보다 큰 소리로 알프레드를 지키겠노라 다짐했던 교장마저 나중에는 술에 취해 알프레드에게 본심을 고백하고 만다. “인간성에 대한 믿음은 힘이 없어요. 그걸 알기에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소. 나는 두렵소. 우리에게도 언젠가 한번은 저런 노부인이 오게 되겠지요. 그러면 지금 당신이 겪는 일을 우리도 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교장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뒤렌마트의 ‘노부인’은 단순히 이 작품 속 자하나시안 부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찾아올 수 있는, 정의와 양심을 시험하는 유혹과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절대권력인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그러한 ‘노부인’의 방문에 흔들리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없기에, 뒤렌마트의 경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글. 김주연(연극칼럼니스트)

필자 김주연은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고, 월간 <객석>에서 연극 담당 기자로 활동하면서 『우리 시대의 극작가』(공저)를 출간했다. 연극학으로 박사학위를 마친 뒤 현재 연극칼럼니스트와 드라마터그, 그리고 연극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