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을 맞아 ‘온라인 누리’가 ‘웹진 누리’로 이름을 바꾸고 개편을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2019년 첫 호부터는 문화예술에 관한 교양지식과 삶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유익한 읽을거리를 선보일 예정이다. ‘명작으로 읽는 세계 연극’ 시리즈는 세계 연극사에서 손꼽히는 희곡들을 국가별로 한 편씩 골라,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 작가가 희곡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각해보는 칼럼이다. ‘명작으로 읽는 세계 연극’은 2019년도 ‘웹진 누리’ 홀수 발행호에 연재된다. [편집자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스위스의 자연. 하지만, 스위스를 대표하는 극작가들의 작품은 이런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장엄한 알프스 산맥과 맑은 호숫가, 푸른 들판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집들이 어디를 봐도 그림엽서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는 곳. 에델바이스가 곱게 피어 있는 산기슭에 오르면 어디선가 요들송이 들려올 것 같고 도시에서는 달콤한 초콜릿 향기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곳. 바로 스위스다. 스위스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중부 유럽의 작은 나라이지만, 수려한 자연경관과 영구중립국이라는 특수한 상황 덕분에 오래 전부터 아름답고 평화로운 ‘지상낙원’의 이미지를 이어온 곳이다.
하지만 스위스를 대표하는 극작가들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떠올리는 이 나라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미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체로 독일어권 문학계로 분류되는 스위스의 대표 극작가로는 막스 프리쉬(Max Frisch)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ürrenmatt)를 들 수 있는데, 이들 작품 대부분이 상당히 어둡고 그로테스크하다. 이들은 모두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으며 인간의 윤리와 사회 정의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날카로운 비판의식으로 무장한 작품들을 써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뒤렌마트는 부조리 연극으로부터 출발해 과장과 풍자, 폭로 등의 방식으로 비뚤어진 사회와 위선적인 시민의식을 고발하는 작품들을 주로 썼으며, 그의 작품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뒤렌마트는 우리를 단죄하려는 재판관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가만 놓아두지 않는 양심이다”라는 독일의 문학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Marcel Reich-Ranicki)의 평은 뒤렌마트의 작품세계를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뒤렌마트는 우리를 단죄하려는 재판관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가만 놓아두지 않는 양심이다”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독일어권 문학계에 뒤렌마트는 그야말로 구원투수와 같은 존재였다. 전후(戰後) 프리쉬나 뒤렌마트 같은 뛰어난 극작가들이 스위스에서 많이 나올 수 있었던 데는 영구중립국이라는 스위스의 정치적 조건이 크게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포화와 폭격이 난무하던 세계대전 중에도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은 스위스는 상대적으로 예술활동이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만큼 예술가들이 활발한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시기 대학을 다니고 있던 젊은 뒤렌마트는 문단에 혜성처럼 등단해 정체되어 있던 전후 독일어권 문학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었다.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렌마트는 냉소적인 무신론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았고, 대학에서는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읽으면서 더욱 단단한 무신론에 빠져들었다. 철저한 무신론과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한 뒤렌마트의 사고방식은 그의 희곡 작품들에서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삶과 죽음, 신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갈등에 대해 언제나 한 발짝 떨어진 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뒤렌마트 특유의 풍자와 기지, 진지함과 허무한 웃음이 공존하는 위트가 생겨난다.
뒤렌마트의 대표작으로는 <로물루스 대제>(1952) <미시시피 씨의 결혼>(1952) <천사 바빌론에 오다>(1953) <노부인의 방문>(1956) 등이 있다. 1950~60년대에 왕성한 집필활동을 펼친 뒤렌마트는 이 시기 이후에는 주목할 만한 희곡을 발표하지 못했으나 사회활동에는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1968년 소련이 체코를 침공했을 때는 막스 프리쉬, 귄터 그라스 등 동료작가들과 함께 강력한 항의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왼쪽부터 스위스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wikipedia)와 《뒤렌마트 희곡선》(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