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
물질 이상인 것이 책이다.
– 「책」, 이태준
2016년 6월, 매년 두 차례 있는 시즌 카탈로그 표지 작업 중 하나의 마지막 작업을 마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머리를 식히려고 무작정 센트럴파크를 걸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벤치에 앉아 잠시 볕을 쬐다가, 보도블록에 드리운 나뭇잎 그림자의 농도가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이내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보았지만, 내리쬐는 볕도 그대로였고 나뭇잎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흔들리는 그림자를 본 것으로 착각한 건지 의아했다. 그러다 가끔씩 다시 읽곤 하는 단편소설의 두 문장을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뱉어냈다. 문득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글을 써보겠다고 다짐했다.
그해 6월에 나는 컬럼비아대학출판부에서 북 디자이너로 일한 지 만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어림짐작으로 세어도 600여 권이 훌쩍 넘는 책과 표지를 디자인했다. 책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을 뿐더러 상상하기조차 싫다는 태도로, 책 만드는 일을 마치고 귀가해서도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책을 보았고, 주말에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꼭 헌책방에 들러 반나절씩 시간을 보냈으니, 거의 책에 묻혀 살아온 셈이었다. 그러니 글을 쓴다면 단지 읽은 책과 만든 책에 대한 내 기억을 바탕으로 쓸 수밖에 없을 터였다. 내가 굳이 기록으로 남길 책은 어떤 책이어야 할까. 글을 쓰기 시작한 지 9개월이 더 지났을 무렵에서야 책의 성격과 형태가 또렷해졌다.
하지만 책의 가치와 의미를 글만으로는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내게 더없이 소중한 책을 아예 시각적으로 재현하면 어떨까. 자신의 작업과 전시 이름을 소설 속의 명제로 명명하기까지 한 독서가로 대상의 색채와 정서를 농염하게 구현해온 안옥현 사진가와, 책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을 뿐더러 다수의 책을 펴내기까지 한 다독가이자 현장의 맥락과 서사를 능숙하게 기록해온 노순택 사진가에게, 내가 글에서 다루는 책을 사진으로 찍어달라는 좀 기이한 프로젝트를 의뢰했다. 사진을 내가 쓰고 있는 책에 도판으로 싣는 데 그치지 않고 전시도 함께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기존의 작업 방식을 견지한 채로 책이 담고 있는 정서와 서사까지 함께 조명해 달라는, 결코 쉽지 않은 요청이었다.
여기 전시한 36점의 사진은 안옥현과 노순택, 두 사진가가 9개월 이상 책이라는 대상에 독자적이고 심미적으로 개입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작품을 창작하는 행위는 쉬이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들리거나 씌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고된 작업일 것이다. 책이 우리를 지식과 인식의 세계로 안내해 결국 그 세계를 이해하도록 하는 매체이듯, 예술 역시 미의 추구나 현실 채집으로 표피 너머에 숨겨진 세계까지 시각언어로 정제하고 해석해 우리가 아직껏 감각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그 세계를 발견하게 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이들 사진이 책에 내재된 가치와 의미에 더해 아름다움까지 보다 선명하게 전달해주기를 바란다.
글. 이창재(컬럼비아대학교 출판부 수석 북 디자이너)
사진. 하경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