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둥이 집안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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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로 읽는 음악사 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편

2019년을 맞아 ‘웹진 누리’가 새로이 선보이는 또 하나의 기획 연재는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생애를 그들의 ‘가족’을 통해 들여다보는 ‘가족사로 읽는 음악사’다. 클래식에 관한 교양지식은 물론 작곡가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시선을 담아낼 이 시리즈는, ‘명작으로 읽는 세계 연극’과 번갈아 연재된다. [편집자주]

쾨텐 궁정의 음악 담당자로 일하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723년 라이프치히로 이주한다. 쾨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도시였다.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성 토마스 교회의 음악 담당으로 일했으며, 이곳이 바흐의 평생직장이 되었다.

걱정 없는 가족이라는 신화

음악가의 재능은 종종 ‘영감’이라는 단어로도 표현되지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이 말이 썩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바흐는 그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주어졌다고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신을 위해 음악을 지었다고 말하며 그렇게 해서 생긴 모든 영광을 신을 위해 돌리는 사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입버릇이라고 하면 고약한 표현이겠지만 아무튼 그런 태도가 바흐가 음악을 대하는 기본적인 방식이었다.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신이 있었다면, 그의 곁에는 가족이 있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음악사에 남을 만한 대가족을 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천재 모차르트의 일생은 재능이 수명을 갉아 먹은 것처럼 묘사되고, 루트비히 반 베토벤은 장애와 맞서 싸운 인간 정신의 승리로 비춰지는 데 비해 바흐의 삶은 비교적 온화하게 묘사된다.

음악의 영광이 언제나 샘솟고, 신의 가호와 함께 축복을 누리는 일가의 가장.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모습이 아닐까?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리고 좋은 점만을 추려 삶을 재구성한다면 바흐의 삶은 분명 우리 생각과 닮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역사가 거장의 위대한 부분만을 조명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진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가정을 이루고 얻은 평화

그가 남긴 음악에 비하면 인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 대한 기록은 형편없이 적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젊은 시절 바흐에 대한 그 몇 없는 기록에 의하면 이 사람, 꽤 혈기 넘치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의 나이 스무 살, 아른슈타트에서 일하던 시절 한 바순 주자는 바흐가 자신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결투를 신청했었다. 바흐가 자신에게 일부러 어려운 악보를 주고난 뒤 연주력을 조롱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고용주에게 휴가를 받고 예정일 1개월 뒤에나 복귀한 일도 있었다. 바흐가 그 한달 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반항심 가득한 마음을 안고 정처 없는 걸음을 하지 않았을까?

그랬던 젊은이는 가정을 이루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바흐는 1707년에 결혼했다. 바흐보다 한 살이 많았던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신 그녀의 자녀들이 어머니인 마리아 바르바라의 삶을 짐작케 하고 있다.

첫째 딸 카타리나 도로테아가 1708년에 태어났고 1710년에는 첫째 아들 빌헬름 프리데만의 출생이 있었다. 1713년에는 두 아이를 동시에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경사가 있었지만 이 탄생은 순식간에 비극이 되었다. 쌍둥이로 태어난 마리아 소피아와 요한 크리스토프는 출생 이후 바로 사망했다. 1714년에는 카를 필립 엠마누엘이, 1715년에는 요한 고트프리트 베른하르트가 태어났다. 불과 6년 만에 바흐는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바흐 내면의 불화가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바흐 가족은 171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1718년, 바흐는 쾨텐 궁정의 음악 담당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쾨텐 궁정은 소박한 크기였지만 영주였던 레오폴트 대공의 음악 사랑은 소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공은 이곳 궁정 연주자들의 수준을 최고 수준으로 유지했으며, 바흐라는 음악가가 궁정의 수준을 한층 높여줄 것이라 기대했다. 바흐는 작품으로 그 기대에 부응했다.

쾨텐 궁정에서는 종교음악을 쓸 일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바흐는 대신 여러 기악곡을 작곡하는 것으로 임무를 다했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그리고 「독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 같은 작품이 이 시기에 쓰였다. 바흐는 순수하게, 각 악기의 가능성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탐구해보겠다는 자세로 작곡에 임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이 시기의 작품은 기악 작곡가로서의 바흐가 얼마나 높은 수준인지를 증명하는 증거로 남았다.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3번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 연주)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안드라스 쉬프 연주)

바흐 독주 첼로 모음곡 1번 (미샤 마이스키 연주)

바흐가 이처럼 순수하게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의 만족스러운 봉급에 있었다. 쾨텐 궁정에서 바흐가 받은 봉급은 400탈러였다. 보통 150탈러를 받았던 다른 연주자들과 비교하면 두 배가 훨씬 넘는 돈을 받은 셈이다. 걱정할 것이 없는 삶이었다. 1720년,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함께한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한 번의 사별과 또 한 번의 결혼

마리아 바르바라가 서른여섯의 나이에 사망했을 때 바흐는 아내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사실 죽음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죽음 당시 여섯 살이었던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여정을 마친 아버지는 쾨텐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며 장례도 이미 치렀음을 알게 되셨다. 아버지가 여행을 떠나실 때 어머니는 활기 왕성하고 건강하였다. 아버지는 집안에 발을 들여 놓은 뒤에 비로소 어머니가 병고 뒤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바흐의 나이는 서른다섯이었고 그에게는 네 아이가 있었다. ‘그 이후로 바흐의 가족은 큰 슬픔에 잠겼다’라고 음악학자들은 묘사하고 있다. 큰 슬픔은 어느 정도의 슬픔이었을까? 내 생각에 바흐는 슬픔이라는 샘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안나 막달레나 빌케, 이후 안나 막달레나 바흐가 되는 이의 이름은 1721년부터 기록에 등장한다. 바흐가 어떻게 그와 만나고 결혼에 이르렀는지는 정확히 묘사되지 않으나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첫 부인에 비하면 그 자료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당시 스무 살의 젊은 성악가 안나 막달레나 빌케는 궁정 가수로 쾨텐에 들어왔다. 그러니 바흐와 안나 막달레나는 일종의 직장 선후배 관계로 만난 셈이 된다. 1721년 12월 3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안나 막달레나는 결혼했고, 이 두 번째 결혼으로 바흐는 무너져가는 자신과 가정을 가까스로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손쓸 수 없는 곳에서 발생했다. 고용주였던 레오폴트 대공이 결혼을 하면서 악단의 예산이 눈에 띄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바흐의 인생이 결혼으로 인해 변했던 것처럼 고용주의 인생도 결혼과 함께 변했다. 레오폴트 대공은 쾨텐을 떠나기로 결심한 바흐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은 추천장을 써주었다.

존경스럽고 학식이 풍부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이곳 궁정 음악감독으로 일하였으며 임무를 아주 만족스럽게 수행하였다. 우리는 관대히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며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구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추천장을 써주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가장의 무게는 언제나 비슷하다

1723년, 바흐는 쾨텐에서 라이프치히로 이주한다. 라이프치히는 쾨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도시였고, 그 규모에 걸맞은 품격이 있었다. 그곳에는 독일 최대 규모의 대학이 있었으며 교회 또한 그 위세가 대단했다. 바흐는 성 토마스 교회의 음악 담당 자리를 위해 이곳으로 넘어와 원하던 자리를 차지했다. 결국 이곳 라이프치히에서의 직장이 바흐의 평생직장이 되었다. 바흐는 이곳에서 27년간 근무했다.

누군가는 평생 고용을 달콤하다 생각하겠지만 바흐에게는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사실 라이프치히는 바흐 개인이 살기에는 썩 좋은 곳이 아니었다. 음악보다 음악 외적인 공무가 항상 기다리고 있었고, 그때마다 바흐는 고리타분한 라이프치히 시 당국과 부딪혔다. 쾨텐 시절보다 늘어난 봉급도 그리 위안이 되지 못했다. 바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제 현재 일자리는 약 700탈러 정도 수입을 가져다준답니다. 물론 평소보다 장례식이 더 많으면 그에 비례해서 보수도 오르지요. 하지만 건강한 공기에서는 반대로 보수도 떨어지는데, 지난해에는 장례식이 보통 수준에 머물러 100탈러 이상이나 감소했습니다.

바흐가 타인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울고 웃은 것은 아니지만, 장례식을 수입과 연결시키는 그의 모습이 꽤 섬뜩하다. 바흐는 부수입을 올릴 수 있는 여러 활동을 했다. 결혼식과 장례식에서의 연주 이외의 부수입으로는 오르간 감정이 있었다. 바흐는 이 일을 평생 동안 꽤 자주 했다. 봉급은 늘었지만 이곳 라이프치히의 살인적인 물가를 견뎌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들이었다. ‘쾨텐 시절에는 400탈러 정도만 되어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고 말하는 바흐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가장을 본다. 삶은 바흐에게도 쉽지 않았다.

부침 많았던 라이프치히 생활이었지만 아내 안나 막달레나와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가정을 두 사람이 이루는 하나의 공동체라 한다면, 둘은 호흡이 잘 맞는 관계였다. 결혼 이후 가수 안나 막달레나는 점점 희미해졌고 대신 육아와 가사가 그녀의 주된 일이 되었다. 언제나 일손이 부족한 남편의 작업을 돕는 일도 부지런히 했다. 안나 막달레나는 남편이 넘긴 악보를 필사하는 한편, 딸들의 음악 교육까지 담당했다.

일러스트레이션 봄례

가정 내 딸들을 책임지는 것이 어머니의 몫이라면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임무는 아들의 장래를 살피는 것이었다. 바흐는 자식들의 일자리를 두루 살피는 아버지였다. 오르가니스트로 일자리를 얻으려는 빌헬름 프리데만을 위해 직접 필요한 서류를 작성했으며, 칼 필립 엠마누엘이 음악가로 일자리를 얻으려 할 때는 자신의 인맥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바흐는 재능만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재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삶을 올바른 길로 내야 한다고 바흐는 생각했다.

라이프치히에서의 생활, 그리고 바흐의 삶이 저물어갈 때 해는 1750년이 되어 있었다. 서양 고전음악 역사에서 1750년은 분기점이 되는 해이다. 바흐는 65세라는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 거장의 죽음과 함께 바로크 음악의 시대도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인생은 역사가 아니다. 바흐의 죽음과 함께 바로크도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졌지만 바흐의 아내와 자식들이 여전히 세상에 있었다.

바흐의 자녀 중 세 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칼 필립 엠마누엘, 그리고 요한 크리스티안이 위대한 아버지의 명성을 잇는 작곡가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유명 음악가의 아내이자 그 자신이 유명 음악가의 어머니였던 안나 막달레나는 어떤 삶을 보냈을까? 기록에 따르면 한때 그녀는 라이프치히 시 당국의 도움을 받아 생계를 꾸려 나가기도 했다. 아마도 딸들과 함께 라이프치히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을 안나 막달레나는 남편의 사망 10년 뒤인 1760년 2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59세였다.

 

글. 윤무진(음악칼럼니스트)

필자 윤무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음악학을, 전문사에서 음악사를 공부했다. 유니버설, 워너, 소니뮤직 등과 함께 클래식 음악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일을 해오고 있으며, 음악을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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