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의 아버지, 그리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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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로 읽는 음악사 ②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편
모차르트와 카라얀 등 위대한 음악가를 배출한 ‘음악의 도시’ 잘츠부르크의 전경.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이기도 하다.
매년 여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열려 많은 관광객과 음악팬들이 방문하고 있다.

천재는 규칙을 부여하는 사람이라고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말했다. 그런데, 그 나름대로 엄정한 규칙을 부여하는 사람들이건만 천재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으로만 끝나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때로는 일반의 상식을 벗어나는 무분별한 행동을 일삼기도 하며, 타인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분별없음을 목도했을 때 우리가 불쾌를 느끼고 그들을 멀리 하고픈 감정을 마주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지만 함께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만은 잊지 말자. 언제나 빛나는 것은 천재가 아닌 그들이 남긴 무언가라는 것을. 천재가 상상 저 너머의 세계를 보여줄 때 우리는 그 성취 앞을 결코 떠날 수 없다.

모차르트 앞에서 그 모든 야망은 절망이 된다.
– 샤를 구노 –

‘잘츠부르크의 기적’을 낳은 아버지

1756년의 잘츠부르크, 여기 한 아이의 탄생을 앞둔 아버지가 있다. 야망은 있으나 재능이 부족한 이들은 언제나 핏줄에 기대를 걸기 마련이다.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 않는 재능의 음악가 레오폴트 모차르트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래도 이제 갓 태어난 아이는 재능보다 생명을 더욱 소중히 해야 한다. 아버지가 아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이름을 붙인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아이의 이름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되었다.

그 모든 세계보다 음악의 세계가 익숙한 아이들, 그리고 그곳에서 온전한 평화를 누리는 어린이들을 우리는 ‘음악의 신동’이라 부른다. 이 음악의 신동은 다른 신동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그들은 어린 나이부터 성인에 가까운, 종종 성인의 기술을 넘어서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미술의 신동이나 학문의 신동에게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일이 음악의 신동에게는 일상이다. 그리고 잘츠부르크에서 매일 같이 이런 기적을 경험하고 있던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어린 아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신의 은혜에 힘입어 태어난 기적!

서양 음악사, 그 중에서 작곡가를 다룬 부분을 읽다 보면 특이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가 희미하고 아버지가 선명하다는 사실이다. 아들의 자식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바로 아버지다. 그리고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버지의 일을 해낼 때,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보다 치밀한 계획을 세워 미래를 준비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초상화

볼프강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타인에게 신동으로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 어린 볼프강에게는 나름대로 힘든 일이었겠지만 모차르트가 음악사에 남긴 유산을 생각해보면 레오폴트만한 아버지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 나름대로 훌륭한 음악가였던 레오폴트에게는 재능을 볼 줄 아는 식견과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게다가 레오폴트는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문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천재라는 사실에 순수하게 경탄했고, 그 천재성이 가져다 줄 부(富)까지 치밀하게 계산했다.

그래서 머지않아, 아들 모차르트는 영문도 모른 채 하프시코드 앞에 앉아 마음 내키는 대로 연주를 하고 모르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게 된다. 3년 반 동안 이어지는 모차르트 가족의 연주 여행은 아버지 레오폴트가 기획한 모차르트 가문 부흥의 핵심 이벤트였다. 이 연주 여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그 이벤트가 성공적이었음을 아버지 레오폴트가 남긴 편지에서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황제와 황후 폐하로부터 관대하게 영접 받았다는 사실 내가 얘기한다면 사람들은 그저 꾸며낸 이야기로 생각할거야. 볼프강이 황후의 무릎에 올라 목에다 정중하게 키스를 했다고.

볼프강의 나이 일곱 살 때 시작한 가족의 연주 여행은 3년 반 동안 지속된다. 말이 3년 반이지, 어린이에게 3년 반이라는 세월은 인생의 전부와 같은 시간. 그 기간 동안 모차르트는 아이가 누릴 수 있는 관심은 모두 누리고 있었다. 천성이 쾌활해 보이는 모차르트는 누구에게나 붙임성 있게 다가갔고 사람들은 그런 모차르트를 좋아했다. 걱정도 모르고 슬픔도 모르는 열세 살 모차르트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는다.

즐거운 일들뿐이어서 기분이 정말 최고예요. 이번 여행은 엄청 재미있거든요. 마차 안도 아주 따뜻하고요. 마부 아저씨는 친근하고 아주 눈치가 빨라요. 길이 조금이라도 괜찮아지면 더 빨리 달려주거든요.

‘넘치는 재능’을 담지 못한 욕망

좋은 시절이라는 말은 그 시절의 시작과 끝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리고 신동 모차르트의 시절 또한 좋은 시절이 될 것이다. 신동이라는 호칭은 늙지 않는 어린이들에게만 허용되었고 사춘기에 접어든 모차르트는 어느새 신동이라 부를 수 없는 소년이 되어 있었다. 욕망 넘치는 부모들이 대개 그렇듯이 레오폴트 또한 결여된 점이 많았다. 레오폴트는 어딘가 많은 것을 잃어버린 아들의 마음을 챙길 줄 몰랐다. 모차르트는 학교에도 가지 않았고, 또래 아이들과의 교류가 전혀 없었다. 언제나 아들은 아버지가 바라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뿐이었고, 그래서 아버지의 눈으로 본 세상이 자신이 보는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일 시간이 전혀 없었다. 불행은 여기서 시작된다.

 

모차르트 교향곡 25번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 연주)

 

죽는 날까지 모차르트는 쾌활한 사람으로 보였고, 또 자신이 그렇게 보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쾌활함 이면에는 발작 같은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어쩌면 모차르트의 천재성과 함께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신동이었을 때는 이 사랑이 영원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과, 청년이 되었을 때는 세상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공포와 함께 살았다. 음악 이외의 세계에서 모차르트는 유난히 유치한 사람처럼 보였다. 모차르트의 가족과 친하게 지냈던 잘츠부르크 궁정의 트럼펫 연주자 요한 안드레아스 샤흐트너는 어린 모차르트를 이렇게 기억한다.

“모차르트와 많이 놀아주었기 때문인지 하루에 열 번이나 자기를 좋아하는지 물을 정도로 모차르트는 나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따금 장난으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곧 모차르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일러스트레이션 · 봄례

실제로 모차르트가 느꼈던 공포의 단편은 현실이 되었다. 어릴 적에는 마냥 자신을 환대하던 귀족들은 신동 아닌 모차르트를 외면했고, 어릴 적에는 쾌활해 보이는 성격까지 예의 없고 무례하다고 하며 공격했다. 좋은 일자리는 잡을 수 없었고 그나마 있던 변변찮은 직장은 모차르트의 욕심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여기서 모차르트의 왜곡된 천성이 다시 빛을 발한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감에도 모차르트는 좋은 아들이고 싶었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언제나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는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그런 아들이었다.

그런데, 아들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언제나 신동으로서의 역할을 다 해주기를 바랐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결혼과 직장 문제로 수면 위로 오른다. 모차르트가 아내 콘스탄체와 결혼하던 날, 모차르트의 가족은 신랑인 볼프강 아마데우스뿐이었다. 아버지가 이 결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원하던 직장에 진득하게 자리를 잡지 않고 바깥을 떠돈 것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흔들어 버렸다.

아버지는 아들이 안정적인 직장에서 명예를 추구하며 살길 바랐지만 아들은 그런 것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는 조금씩 자신의 천성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돈을 많이 받으면서 원하는 음악을 내키는 대로 쓰는 것. 이것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추구하던 삶의 방식이었다. 직장에서의 불합리한 제약이 사라지고 아버지의 은근한 압박이 희미해졌을 때 모차르트의 예술이 빛을 발했다. 예술의 도시 빈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모차르트는 ‘이것이 내가 원하던 삶이다’라고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서곡 (빈 교향악단 연주)

신동의 모습을 놓을 줄 몰랐던 천재 작곡가

그러던 어느 날,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해 듣는다.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모차르트는 잊고 싶었던 좋은 아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 꺼냈다. 한동안 아버지에게 연락하지 않던 아들이 펜을 들었다. 1787년 4월 4일, 나이 서른하나의 모차르트가 아버지 레오폴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적어 보냈다. 그 나름대로 삶과 죽음의 철학을 정리한, 평소의 모차르트답지 않은 모습이 여기 있다.

저는 매사에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생의 최종 목표인지라, 저는 요 수년 동안 인간의 이 참되고 최선의 벗과 매우 가까워져, 그 모습이 저로서도 전혀 두렵지 않은 존재가 되면서 오히려 많은 평안과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젊습니다만) 혹시라도 내일이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듭니다.

아들은 편지 끝자락에 아버지의 건강을 기원했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이후 모차르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비극과는 별개로 작품은 언제나 좋았다. 그리고 평판도 하루하루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인간 모차르트의 정신은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음악 안에서는 언제나 훌륭했지만 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차르트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 돈이 떨어지면 급하게 작곡을 하고 다시 돈을 쓰고 다시 곡을 쓰고, 모차르트는 직접 이 고통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었고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모차르트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페달을 밟는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2011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조성진 연주)

 

아버지가 원했던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니었지만 아들은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진정한 천재로 역사에 남았다. 그가 영원한 천재로 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어릴 적에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주변인들을 괴롭게 했던 지독한 민감함이 모차르트 예술의 핵심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일궈낸 예술 한편에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은 물론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인이 된 아들이 다시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는 아버지 레오폴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자신을 괴롭게 한다는 사실에는 둔감했다. 언제나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성정을 억누르기도 하고 폭발시키기도 했던 인생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서른다섯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나이가 들어서도 신동의 모습을 놓을 줄 몰랐던 작곡가의 길지 않은 생애였다.

P.S. 많은 이들이 모차르트의 죽음과 함께 그의 ‘레퀴엠’을 생각하지만 나는 좋은 다른 음악을 떠올린다. 모차르트 삶의 끝자락에 있던 ‘클라리넷 협주곡’이다. 어쩌면 모차르트가 바라던 삶의 소리가 바로 이런 음악이 아니었을까? 위대한 천재이자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안녕을 다시 한 번 바라며.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마틴 프로스트 연주)

글. 윤무진(음악칼럼니스트)

필자 윤무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음악학을, 전문사에서 음악사를 공부했다. 유니버설, 워너, 소니뮤직 등과 함께 클래식 음악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일을 해오고 있으며, 음악을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다.

‘가족사로 읽는 음악사’는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생애를 그들의 ‘가족’을 통해 들여다보며, 클래식에 관한 교양지식은 물론 작곡가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시선을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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