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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읽는 세계 연극 ③ 노르웨이
‘북쪽으로 가는 길’이라는 뜻의 노르웨이.
빙하와 백야, 오로라, 피오르드 등 신비롭고 아름다운 대자연을 자랑하는 그곳에서 
현대 연극에 한 획을 긋는 대문호, 헨릭 입센이 태어났다.

차갑고 고요한 호수와 숲,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반도 서쪽을 따라 길게 이어진 피오르드의 나라 노르웨이. 거칠게 일렁이는 북해를 정복했던 바이킹의 후손답게 강인하고 활기 넘치는 노르웨이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문화적 자부심이라 할 만한 예술가가 세 명 있다. 바로 「절규」로 유명한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와 민족주의 작곡가 에드바르트 그리그, 그리고 근대 희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극작가 헨릭 입센이다.

비단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현대 연극사에 있어 입센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근대 사실주의 희곡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입센은 연극사를 공부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며, <인형의 집> <유령> <민중의 적> <페르 귄트> 등 그의 수많은 명작들은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체홉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레퍼토리들 중 하나다.

입센의 연극은 형식과 내용, 양쪽 모두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형식적으로 사실주의 희곡의 전범을 제시했다면, 내용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근대 유럽의 변화하는 정신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입센 스스로도 창작과 저술을 통해 당대 유럽 지식인들의 정신을 일깨우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입센의 초기작들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주제들을 날카롭게 다루었기 때문에 초연될 때마다 뜨거운 논쟁과 소란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후기로 접어들면서 그는 노르웨이의 사회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시선을 보여주는데, 그렇게 개인과 사회 문제를 아울러 성숙한 시선을 보여주는 대표작 중 하나가 바로 1890년 작, <헤다 가블러>(Hedda Gabler)이다.

근대 사실주의 희곡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극작가 헨릭 입센

권태는 영혼을 잠식한다

총 4막으로 이루어진 <헤다 가블러>는 처음부터 끝까지 헤다와 그의 남편이 신혼살림을 차린 테스만 저택의 응접실을 배경으로 한다. 호화롭지만 전체적으로 어둡고, 너무 많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어 질식할 것 같은 이 응접실은 그 자체로 헤다의 삶을 짓누르는 삶의 조건을 은유하는 장치이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 헤다는 입센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들과는 달리, 또렷한 자기 정체성을 지닌 채 남자들의 소유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인생, 나아가 남의 인생마저도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여인이다. 이미 헤다가 테스만과 결혼하고 난 뒤의 시점에서 시작하면서도 이 작품의 제목이 <헤다 테스만>이 아니라 <헤다 가블러>인 것은 그녀가 결혼 후에도 한 개인으로서, 남편의 아내이기보다는 가블러 장군의 딸로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무대 한 쪽에 자리 잡고 있는 가블러 장군의 초상화는 아버지가 그녀의 운명에 여전히 보이지 않는 지배력을 갖고 있음을 암시하는 장치다.

일명 ‘고뇌하는 여성 햄릿’으로 불리며 연극사에서 가장 까다로운 여주인공으로 손꼽히는 헤다 가블러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복잡한 캐릭터다. 오만하고 질투가 많은 반면 겁도 많고, 사랑을 조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한다.

가블러 장군의 딸로 화려하고 도도한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녀는 약간은 충동적으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계산적으로 문화학자 테스만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곧 교수 임용을 앞두고 있는 테스만이 제공할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그녀는 자유로운 현실을 저당 잡힌 것이다. 연극은 그녀가 긴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즉 결혼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 순간으로부터 시작한다.

매사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며 모든 일을 고모와 상의하려 하는 남편 테스만, 틈만 나면 찾아와서 시시콜콜 간섭하는 고모님, 호시탐탐 자신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브라크 판사 등 주위 사람들의 압박이 서서히 느껴지는 가운데 헤다는 가장 무서운 병 중 하나인 ‘권태’에 사로잡힌다. 말을 타고 사냥을 하며 ‘장군의 딸’로 자유롭게 살아온 헤다에게 검소하고 고요한 결혼 생활은 여성의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숨 막힐 것 같은 굴레로 느껴졌던 것이다.

헤다 : 어느 방을 가나 라벤더와 말라빠진 장미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그래요, 시체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무도회가 끝나고 나 다음날의 꽃다발처럼.
(목 뒤에서 두 손을 깍지 끼고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그를 바라보면서)
제가 이 곳에서 얼마나 따분한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브라크 : 그럼, 당신은 왜 다른 사람들처럼 무언가 인생에 있어서 소명 같은 것을 찾으려 애쓰지 않는 겁니까?

헤다 : 소명? 그게 그렇게 매력적인 건가요?

브라크 : 물론 자진해서 한다면요.

헤다 : 매력적인 소명이란 어떤 걸까요. 때때로 생각하지만…. (말을 끊었다가)
역시 어쩔 수 없어요.

– 헨릭 입센 <페르 귄트>, 곽복록 역, 신원문화사 2006 중

지루함과 권태로 몸부림치는 그녀 앞에 옛 연인 뢰브보르크가 등장하고, 헤다는 그를 상대로 새로운 장난을 시작한다. 그러나 자신이 마음대로 운명을 조종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뢰브보르크마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맞고, 이와 관련하여 브라크 판사가 은근한 협박을 가해오면서 자신이 촘촘한 덫에 갇혔다는 사실을 직감한 헤다는 망설임 없이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인생에서 어떤 목적도 의미도 갖지 못한 채 권태에 사로잡힌 헤다를 통해 입센은 ‘이상’을 잃은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고 있다. 입센이 살던 당시 유럽은 고전시대를 꿈꾸는 이상이 무너지고 새롭게 부상하는 부르주아의 일상성이 점차 부각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여성 헤다를 통해 입센은 부르주아의 시대, 일상성에 파묻힌 삶이 지닌 위험성을 은근히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헤다 가블러>는 입센의 가장 현대적인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장군이 될 수 없는 장군의 딸

원 톱의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점에서 <헤다 가블러>는 종종 입센의 또 다른 대표작 <인형의 집>과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두 여주인공의 캐릭터는 거의 반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인형의 집>의 노라는 가부장제가 만들어놓은 사회적 구조 안에 새처럼 갇힌 채 순종적인 아내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극중 노라는 개성적인 캐릭터라기보다는 당시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달은 뒤 홀로 집을 떠나는 파격적인 선택을 보여준다.

반면 헤다는 처음부터 또렷한 자아를 지닌 채 남자들의 소유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매우 주체적이고 개성 있는 캐릭터이다. 매력적인 그녀에게는 늘 접근하는 남자들이 끊이지 않지만, 그녀는 사랑받는 것을 즐기기보다는 그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에서 쾌감을 느낀다. 또한 아버지 가블러 장군의 피를 이어받아 승마와 사냥을 즐기고, 취미로 권총을 조립하기도 한다.

스스로 온몸으로 여성성을 거부하는 인물이지만, 아무리 남성적인 욕망과 재능이 있다 해도 그녀는 이를 실행할 길을 찾지 못한다. 당대의 유럽사회에서 헤다는 ‘장군의 딸’은 될 수 있을지언정, 스스로 ‘장군’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보호자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과 야망은 무용지물이 되고, 오히려 세상과 불화가게 된 헤다는 결국 자신의 안락한 미래를 보장해주는 테스만을 선택해 스스로를 새장 속에 집어넣게 된다.

일러스트레이션·정유나

이처럼 복잡 미묘한 인물인 탓에, 헤다에 대한 해석 역시 시대에 따라, 혹은 공연에 따라 매 번 다르게 나타나곤 했다. 때로는 사회구조에 대항하는 여전사의 이미지로도 그려졌고, 때로는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또 다른 피해자로 비춰졌으며, 반대로 주위 사람을 파멸로 몰아가는 팜므 파탈로 평가받기도 했다. 이렇듯 다양한 해석의 열쇠를 쥐고 있기에 헤다를 연기하는 여배우가 이 공연의 성공을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워낙 쉽지 않은 역할이다 보니, 실제로 다른 입센의 작품들에 비해 <헤다 가블러>는 상대적으로 공연이 자주 이루어지지 않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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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배우들이 꿈꾸는 캐릭터

입센의 <헤다 가블러>는 1891년 독일 뮌헨에서 초연 되었는데, 당시 비평가들의 평가는 냉랭했고 특히 헤다에 대해서는 “여성이 아니라 괴물이다”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후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연출가와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헤다라는, 이 수수께끼 같은 캐릭터에 도전해 다양한 해석들을 만들어냈다. 어떤 작품에서는 사회와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비극적인 기질에 중점을 두었고, 어떤 무대에서는 권태와 변덕스런 헤다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 어떤 작품에서는 모든 모성성을 파괴하는 악녀의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이 속을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다층적인 성격으로 인해 헤다는 가장 현대적인 여성 캐릭터 중 하나로 인식되어왔고, 최근에 들어서는 모든 여배우들이 한 번쯤 꿈꾸며 도전해보고 싶어 하는, 한 마디로 ‘여성 햄릿’과도 같은 캐릭터가 되었다.

 

케이트 블란쳇이 출연한 연극 <헤다 가블러> (2004년 작)

 

NT 라이브를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는 영국 국립극장(National Theatre)의 <헤다 가블러> (2016년작)

 

그리드 버그만이 출연한 TV 영화 <헤다 가블러> (1963년 작)

 

독일의 연극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는 <헤다 가블러>를 동시대 독일 중산층 가정의 현대적인 비극으로 그려내기도 했다.

 

그동안 매기 스미스, 로저먼드 파이크, 케이트 블란쳇 쟁쟁한 여배우들이 자기만의 독특한 매력과 해석을 더한 헤다를 무대 위에 올렸고, 잉그리드 버그만은 TV 영화 버전 속 헤다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이보 반 호프 연출과 루스 윌슨이 호흡을 맞춘 영국 국립극장 공연은 국내에도 NT 라이브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또한 현대 유럽 연극을 대표하는 연출가 중 하나인 토마스 오스터마이어는 <헤다 가블러>를 동시대 독일 중산층 가정의 현대적인 비극으로 그려냈는데, 여기서 주역을 맡았던 카타리나 슈틀러는 차갑고 금속적인 느낌의 헤다를 완벽하게 소화해내 그해 독일 평론가들이 뽑은 베스트 배우로 선정되기도 했다.

헤다라는 역할이 주는 부담감과 연출의 까다로움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도 <민중의 적> <인형의 집> <유령> <페르 귄트> 등 입센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헤다 가블러>를 정식 공연으로 만나기는 매우 어려웠다. 우리나라에서 <헤다 가블러>는 1987년 서울앙상블에 의해 처음으로 무대화되긴 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고, 201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오른 공연을 통해 비로소 이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은 바 있다. 당시 헤다 가블러 역을 맡아 13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배우 이혜영은 헤다의 차가운 냉소와 뜨거운 열정을 오가며 도도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휘해, 또 한 번의 잊지 못할 헤다 가블러 형상을 만들어냈다.

201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헤다 가블러>에서는 배우 이혜영이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으로 무대를 압도했다. (사진제공 (재)국립극단)

글. 김주연(연극칼럼니스트)

필자 김주연은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고, 월간 <객석>에서 연극 담당 기자로 활동하면서 『우리 시대의 극작가』(공저)를 출간했다. 연극학으로 박사 학위를 마친 뒤 현재 연극 칼럼니스트와 드라마터그, 그리고 연극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명작으로 읽는 세계연극’ 시리즈는 세계 연극사에서 손꼽히는 희곡들을 국가별로 한 편씩 골라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 작가가 희곡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각해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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