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아버지를 만났지만, 좋은 아버지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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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판 베토벤 편
베토벤이 태어나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았던 도시 본은 2천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뮌스터 광장에는 1845년에 세워진 베토벤의 동상이 있으며, 베토벤 생가는 오늘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지독한 아버지를 만났다. 그것이 베토벤에게 불행이었는지 행운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 예술가에게 불행은 좋은 면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행복한 예술가의 작품 따위에는 관심 없다. 반면 예술가의 불행에서 비롯된 걸작은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 된다. 다행히(?) 베토벤은 불행의 아들이었으니 그것이 음악가 베토벤의 행운이라면 행운인 것이다.

하지만 예술가 아닌 인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그 ‘행운’에 언제나 힘겨워했다. 베토벤의 삶은 시작부터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두 번 태어났다. 말장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1769년생 루트비히는 태어난 지 1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1년 뒤인 1770년에는 또 다른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죽은 아들의 이름을 거둬 다시 붙인다. 우리가 아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이 두 번째 루트비히다.

장엄미사를 작곡 중인 베토벤의 초상화. 요제프 칼 슈타이어가 1820년에 완성했다.

술주정꾼 아버지가 붙인 희망의 이름, 루트비히

아버지 요한은 다시 태어난 아들에게 이미 세상에 없는 이의 삶을 다시 살아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여기에는 별 다른 이유가 없었다. 루트비히라는 이름은 요한의 아버지, 그러니까 루트비히 할아버지의 이름이다. 베토벤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선대 루트비히처럼 아들이 그 영광을 이어나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두 번 사는 사람의 기분은 생각지도 않고 말이다.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 판 베토벤의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테너였으며 성악과 피아노를 가르치는 사람이었다’는 기록이 사회인 요한의 거의 모든 정보다. 그리고 이런 사실보다 더 유명한 요한은 술주정꾼 요한이다. 언제나 그럴싸한 변명이 있었기에 누군가 그런 자신을 비난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본인이 알코올 중독이 된 이유는 순전히 베토벤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자신의 아버지가 양조장을 운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도주 사업은 가문에 부(富)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었지만 술이 무엇인지 또한 알려주었다. 그렇게 요한은 성대를 절일 정도로 술을 마셔댔고, 자연스럽게 목소리의 품위를 잃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그의 직업을 상기시켜 보자. 테너였던 요한은 삶을 그렇게 될 대로 흘려보냈다.

세월이 한참 흐르면 학자들은 전에 없던 객관적인 입장을 가지고 이미 사라져 버린 가정을 진단한다. 예를 들어 ‘그 당시 교육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에서 시작해 ‘엄격한 교육 방식의 일환으로 폭력이 행사되기도 했으며’를 지나, ‘그러니 베토벤의 아버지는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결론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1770년대를 살던 어린 베토벤이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할까? 어찌되었든 아버지는 술을 마셨고, 종종 아들의 뺨을 때렸다. 물론 술을 마시고 뺨을 때리기도 했을 것이다. 아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아들에게 철없는 희망을 투영한다. 이렇게 말이다.

“우리 루트비히, 장차 이 아이는 위대한 인물이 될 걸세.”

그렇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베토벤은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위대함에 이르는 길이 꼭 행복의 길과 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길은 서로 다른 방향에 나 있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고 삶에서 멀어지던 시절, 소년 베토벤은 아버지에게 돌아갈 연금 일부를 자신의 몫으로 돌려 달라는 청원을 낸다. 결정 능력을 잃어버린 아버지를 위해, 자신이 짊어질 가족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베토벤은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아직 성년도 맞이하지 못한 자신이 이 가정을 감당할 수 없으리란 것을.

 

베토벤 소나타 14번 ‘월광’ (넬리 코키노스 연주)

어렵기만 했던 사랑, 그 마지막 주인공

그래서인지 베토벤은 언제나 사람이 어려웠고 사랑이 힘들었다. 살면서 적지 않은 여성을 만났지만 언제나 마지막을 허망하게 마무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베토벤은 사랑의 대상을 ‘불멸의 여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시작부터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정해 놓은 사랑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베토벤은 사랑에 싱글벙글 해 (상대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로)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한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소녀 때문인지 이제 난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좀 더 즐겁게 지내고 있네. 그렇게 처음으로 결혼이 내게 행복을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베토벤 가곡 「Ich Liebe Dich」 (페터 슈라이어 노래)

 

그런데 정작 상대는 그리 대단치 않은 이유를 들어가며 결혼을 완곡하게 거절하곤 했다. 음악가라는 직업의 불안정함, 현격한 나이차가 주된 원인이었다. 어쩌면 잘난 것 없는 베토벤의 외모 또한 한몫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말이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으나 베토벤은 언제나 마음 한켠에 사랑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형태는 받기보다는 주는 쪽에 가까웠다. 베토벤은 음악처럼 사랑을 자신의 힘으로 얻어내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침 베토벤의 사랑을 시험할 기회가 찾아왔다. 여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을 주기에 충분한 대상이었다.

1813년의 어느 날, 베토벤의 동생 카스파르 안톤 카를은 병세가 위독해지자 형 루트비히를 불러 아들 카를의 뒤를 부탁했다. 남은 혈육이 가정을 돌보아주는 일은 흔한 경우이나 베토벤은 이를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진지함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하나의 계시처럼 떨어져 베토벤의 마음을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어느 날의 일기에서 베토벤은 마치 자신의 음악처럼 이렇게 선언한다.

“조카 카를을 너 자신의 자식으로 생각하라. 이 성스러운 목적 외에 모든 쓸데없는 소리나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마라.”

그러나 세상은 의지만으로 살아지지 않는다. 베토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본다. 아들에게 엄격한 교육자이고 싶었지만 결국 술에 인생을 담가버린 아버지를 베토벤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사랑이라고는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자신 또한 잘 알고 있다. 이상적인 부모상을 베토벤은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지만, 그것을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베토벤은 언제나처럼 의지를 믿었다.

새로운 아버지 베토벤은, 우선 조카의 어머니인 요한나를 조카와 법적으로 떼어놓는 작업에 착수한다. 실은 오래 전부터 베토벤은 동생 집안의 모든 문제가 요한나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베토벤의 이런 생각은 단순한 억측이 아니었다. 요한나는 횡령죄로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 받을 정도로 행실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머니의 권한이 있었다. 베토벤과 요한나는 수많은 법정 공방을 벌였고 조카 양육의 권한을 주고받았다. 결국 승자는 베토벤이었다.

일러스트레이션 · 봄례

음악의 성인이자 카를의 아버지, 베토벤

치열한 법정 공방을 주고받는 한편, 베토벤은 조카 카를의 인생 설계에 들어간다.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에게 그랬던 것처럼 조카에게도 엄격했다. ‘믿음, 오로지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리고 나 베토벤이 절실하게 원한다면, 그것은 이루어지리라.’ 조카의 인생 또한 베토벤이 믿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이 믿음에 따르면 카를은 장차 예술가이거나 학자가 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베토벤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미 사회적 명망이 상당했던 베토벤은 조카를 남부럽지 않은 기숙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조카의 피아노 교습은 자신의 제자였던 체르니에게 맡겼다. 조카가 교육 받는 동안 그곳 선생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상황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일은 이제 베토벤의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조카와 관련된 일로 서신을 보낼 때마다 베토벤은 ‘카를의 아버지’라고 글을 마무리했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이에 조카 카를은 실로 훌륭하게 큰아버지의 사랑에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처절했던 베토벤의 역경을 한층 위대한 반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철학을 전공하겠다고 말하던 카를은 뒤에는 군인이 되고 싶다고 말해 큰아버지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나중에는 다니던 대학을 나와 기술학교로 들어갔다. 베토벤의 의지와 엇나가는 일만 하던 카를은 어느 순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었다. 자살은 미수에 그쳤다. 간신히 몸을 가눌 정도로 회복한 조카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잘 되기를 바랐던 큰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됐다.”

이 말과 함께 아버지 베토벤의 실패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평소라면 결코 인정하지 않았을 실패 앞에서 그는 담담했다. 이 ‘자살 미수자의 아버지’는 조카가 생명을 보전했음에 감사하며 진심으로 카를의 행복을 바랐다. 일반적인 사회에는 발 디딜 곳이 없었던 카를은 결국 원하던 군으로 입대했다. 홀로 남은 큰아버지는 조카를 유일한 유산 상속인으로 지정한다. 단순한 집착이 아니었다. 무분별한 믿음의 결과 또한 아니었다. 베토벤은 진심으로 카를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언젠가 진심으로 닿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생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재산에 대한 조카의 권리를 공증한 3개월 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세상을 떠났다. 1827년 3월 26일이었다.

P.S. 그 뒤로 카를은 어떻게 지냈을까? 입대한 군에서 5년 복무한 카를은 별 탈 없이 제대했다.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자녀도 여럿 생겼다. 유일한 아들에게는 루트비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증조부의 이름이자 큰아버지의 이름이었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 베토벤 가의 역사는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2악장 (헬렌 그리모,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연주)

글. 윤무진(음악칼럼니스트)

필자 윤무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음악학을, 전문사에서 음악사를 공부했다. 유니버설, 워너, 소니뮤직 등과 함께 클래식 음악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일을 해오고 있으며, 음악을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다.
‘가족사로 읽는 음악사’는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생애를 그들의 ‘가족’을 통해 들여다보며,
클래식에 관한 교양지식은 물론 작곡가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시선을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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