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곳곳에 서린 보헤미아의 향기
드보르작 바이올린 협주곡 a단조 작품번호 53
스메타나의 후계자 중에서는 안토닌 드보르작(Antonín Dvořak, 1841~1904)이 가장 돋보이는 존재이다. 그는 스메타나가 지휘하는 관현악단의 비올라 수석으로 활동했으며, 백산전투를 소재로 한 애국적 칸타타 「백산의 후계자들」(1872)의 성공으로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스메타나의 오페라에 감명을 받은 그는 체코어 오페라 작곡을 자신의 천직으로 여겼다. 그렇다고 그가 타 문화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독일 스타일의 고전적인 작품을 작곡했고, 1875년에는 오스트리아 정부 장학금을 받고 작곡가로서의 자립을 할 수 있었다. 이후 브람스의 후원 아래 「슬라브 춤곡 1권」(1878)을 출판하여 큰 명성을 얻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고전적인 바이올린 협주곡(1879~1882)을 작곡하는 등,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했다.
드보르작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슬라브 춤곡 1권」을 출판해주었던 출판업자 프리츠 짐로크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바이올린 협주곡을 써주시겠습니까? 진정으로 독창적인 멜로디로 가득한, 좋은 바이올리니스트를 위한 작품이어야 합니다.”
ⓒ Jino Park
드보르작 바이올린 협주곡의 해석에 대해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는 찬사를 받은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
7월 6일(토)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펼쳐지는 고양시교향악단과의 협연에 더욱 기대가 모아지는 이유다.
드보르작은 1879년 늦여름에 작품을 완성하고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제프 요아힘에게 헌정했다. 하지만 줄곧 호의적이었던 요아힘은 정작 악보를 받자 상당한 분량의 수정을 요구했다. 드보르작은 이듬해 5월에 모든 요구를 수용하여 마무리했음을 짐로크에게 알렸다.
“그의 바람에 따라,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협주곡 전체를 수정했습니다.”
요아힘의 다음 전략은 침묵이었다. 무려 2년이 넘어서야 추가 수정을 요구했고, 드보르작은 또다시 모두 수용했다. 이에 요아힘은 9월에 베를린에서 드보르작을 만나 비공개 무대에서 두 번 연주하고 큰 찬사를 받았는데,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슈만, 브루흐, 브람스 등 거장으로부터 헌정 받던 그가 이제 막 알려진 신진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는 모험을 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짐로크는 1883년에 악보를 출판했고, 10월 14일 프라하에서 요아힘이 아닌 프란티셰크 온드르지체크에 의해 공개 초연되었다.
이 곡의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드보르작의 개성을 누그러뜨린 요아힘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작품 구석구석에서 피어나는 보헤미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이 곡의 독창적인 묘미를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빠른 1악장은 소나타 형식과 론도 형식이 결합되어 있다. 오케스트라가 힘차게 시작한 후, 독주 바이올린이 목관을 배경으로 차분한 제1주제를 제시한다. 이 주제는 곧 화려하게 변주되면서 음악을 이끌어간다.
제2주제는 멜랑콜릭한 분위기를 띠며, 독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대위법적으로 화려하게 전개된다. 마지막에 짧은 카덴차와 주제의 재현이 이어지고, 쉼 없이 느린 2악장으로 연결된다. 자유로운 가요 형식을 가진 이 악장은 고요하고 슬픔이 서려 있는 노래 선율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빠른 3악장은 론도 형식으로, 강렬하고 빠른 부분은 뒤쪽에 강세가 있는 체코의 민속무곡 ‘푸리안트’(furiant)를, 서정적인 부분은 슬라브 지역의 ‘둠카’(dumka)를 연상시킨다. 마지막에 이르러 독주 바이올린의 현란하고 화려한 연주로 절정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