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남편, 로베르트 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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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로 읽는 음악사 ⑤
로베르트 슈만 편
독일 뒤셀도르프 구도심의 야경. 색색의 조명이 라인 강물에 비춰져 일렁이고 있다.
1850년 9월, 슈만은 클라라와 결혼한 지 10년째 되는 해에 뒤셀도르프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초청 받아 이곳으로 이주하게 된다.
뒤셀도르프에 오자마자 슈만은 첼로 협주곡 Op.129과 ‘라인’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교향곡 제3번을 완성하는 등 열의를 나타냈지만,
건강이 악화되면서 악단과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결국 이곳에 온 지 만 4년이 되기도 전에 라인 강에 뛰어들었고, 그 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지내다 생을 마감하였다.

이상한 사람이었죠. 아버지의 말이 기억나네요. ‘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친구가 느닷없이 피아노를 치겠다고 해 제자로 받아줬다’고요. 아무튼 그 제자 이름이 슈만이었어요. 로베르트 슈만.

‘작곡가 로베르트’만큼 중요한 ‘평론가 로베르트’

네, 알아요. 로베르트가 제 아버지의 제자라는 사실이 꽤 유명하다는 걸요. 그래서 그런지 ‘로베르트 슈만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성공을 꿈꿨다’라는 말도 들리는데, 그것도 맞아요. 그때를 생각해보면 참 열심이었던 것 같아요. 로베르트요. 늦은 나이에 뭔가 제대로 해보겠다고 피아노 앞에서 절박하게 달려들었죠. 제 눈에도 그렇게 보일 정도였으니 본인은 얼마나 조급했을까요?

로베르트는 ‘남보다 늦었으니 시간과 열정으로 따라 잡아야겠다’라는 마음 같은 것이 항상 있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결국 손가락이 망가지고, 피아니스트의 길은 영영 닫히고 말았지만요. 그럼에도 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로베르트에게는 미안하지만,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은 모두에게 이로운 존재이니 다 괜찮게 된 거라고요.

앞에서도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로베르트는 정말 독특한 사람이었어요. 특히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요. 지금도 연주자들은 뭔가 우직하다고 해야 할까요? 다들 시야가 좁잖아요. 저도 나름의 원칙이 확고한 사람이고요. 그런데 로베르트는 그 시대의 이해 못할 음악들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고, 또 그걸 즐겁게 알리는 재주가 있었어요. 로베르트는 제가 알지 못했던 음악을, 알 수 없었던 음악 어딘가를 항상 꿈꾸던 사람이었어요.

아마 작곡도 그런 마음에서 시작했겠죠. 누가 전직 법대생 아니랄까봐 로베르트는 책 읽는 것도 좋아했어요. 글도 잘 썼고요. 좋아하는 작품에 좋은 말을 쓰고, 응원의 말을 건네는 게 너무 좋았는지 나중에는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ür Musik)라는 이름의 음악지도 만들었어요. 제가 봤을 때 ‘작곡가 로베르트’만큼 중요한 것이 ‘평론가로서의 로베르트’라고 생각해요. 쇼팽 씨만 해도 그래요. 지금은 그도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남편 덕을 좀 봤어요. 왜 그런 말 들어보셨죠. “여러분 모자를 벗으십시오. 천재가 나타났습니다.” 이게 쇼팽을 두고 남편이 한 이야기거든요.

슈만과 클라라.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두아르 카이저가 1847년 완성된 석판화이다.
슈만은 37세, 클라라는 28세경의 모습이다.

쇼팽 씨는 그렇다 치고. 제가 슈만이라는 사람을 높이 사는 부분이 또 있어요. 슈만은 자신과 음악 성향이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도 눈여겨 볼 줄 알았어요. 예를 들어 프란츠 리스트 선생이요. 저는 리스트 선생이 싫어요. 피아노 앞에서 젠체하는 그 모습이. 아, 정말이지 저는 그렇게 음악 하는 사람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런데 슈만은 그런 리스트를 참 좋아했어요. 아시다시피 리스트는 로베르트가 동경하던 직업인 피아니스트로 성공했죠. 누군가가 ‘그 성공이 부러워서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 아니야?’라고 묻는다면, 저는 슈만이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슈만은 작곡가로서의 리스트에 높은 점수를 줬어요. 아무런 질투 없이, 리스트의 작품 자체를 정말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자신의 ‘환상곡 Op.17’도 리스트에게 헌정했잖아요.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환상곡’ 말입니다. 대체 왜 그랬는지.

 

슈만 환상곡 1악장 (윤디 리 연주)

사랑 없이는 결코 나오지 않았을 작품들

들어보셨죠? 로베르트의 ‘환상곡’은 정말 좋은 작품입니다. 이렇듯 저는 ‘작곡가 슈만’을 높이 샀는데, 제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었나 봐요. 아버지가 보는 로베르트는 뭔가 굼떠 보이고, 재주는 없어 보이고, 뭐… 전형적인 피아노 선생의 사람 보는 눈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아무튼 좋은 것이라고는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예요. 그런데다가 딸인 저와 연애한다고, 거기에다가 결혼까지 하겠다고 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제가 아버지 성격을 닮아서 대충 짐작은 했지만, 아버지는 정말로 필사적이더군요.

저도 알아요. 아버지를 화나게 한 건, 재능 없는 제자가 자기 딸을 데려가려고 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피아니스트로 대성할 수 있는 딸을 결혼이 망칠 거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아무래도 여자가 음악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그 시절에 결혼까지 한다는 건, 그냥 음악을 포기하겠다는 소리였죠. 지금의 저는 성공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지만 그 시절에도, 지금도 그런 분위기는 여전해요.

아무튼 말이죠. 우리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어요. 기가 막힌 건, 정말로 소송을 거시더라고요? 제가 딸인데 말이죠. 나중에 우리 아이들을 봐서 아버지가 소송을 취하하시긴 했지만, 아주 잔인한 시절이었어요. 물론 그런 사건들이 로베르트와 제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어서 좋기도 했습니다.

저는 특히 결혼하기 전 해인 1839년이 즐거웠어요. 그 해는 유난히 피곤한 해이기도 했죠. 슈만은 「음악신보」의 투자자를 구한다고 여기저기를 오고 갔고, 저는 연주하느라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그때 참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어요. 생각해보면 로베르트는 사랑도 꼭 자기처럼 했던 것 같아요. 음악가 특유의 지독한 자기중심적인, 대충 아시겠죠? 편지는 쉴 새 없이 보내는데 읽어보면 지금 쓰고 있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뭐 그런 식이었죠.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은 많이 들어서 좋았네요. 그 시절 로베르트가 「아라베스크」를 작곡했던 것 같은데, 한번 들어보시죠.

 

 

슈만 「아라베스크」 (예핌 브론프만 연주)

 

그 해가 유독 힘들어서였는지, 아니면 결혼이 정말로 기쁜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결혼하고 나서는 슈만에게 가곡 선물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전에는 가곡을 잘 못 들었었는데, 팔자에도 없는 가곡 선물을 참 많이도 받았죠. 특히 1840년에는 정말 대단했어요. 『시인의 사랑』이나, 『여인의 사랑과 생애』 같은 작품들.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사랑 없이는 결코 나오지 않았을 작품들이었습니다.

 

슈만 『시인의 사랑』 중 「옛 이야기의 나라에서」 (마크 패드모어 노래)

 

결국 로베르트 슈만은 보란 듯이 작곡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 남편이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저는 남편의 작품을 정말로 좋아해요. 그리고 좋아하는 만큼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해서 연주회에 자주 올렸었죠.

 

일러스트레이션·봄례

나, 클라라 슈만에게 로베르트란…

제가 좋아하는 남편의 모습은 결혼 후에도 바뀐 것이 없었어요. 음악가로 성공했고, 명성을 얻었음에도 슈만은 20년 전 쇼팽 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재능 있는 인물에게 아낌없이 찬사를 보낼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요하네스 브람스 씨는 로베르트가 진정으로 호평했던 마지막 인물이었는데, 어디 보자. 여기 남편이 써놓은 글이 있을 겁니다. 한번 읽어볼게요.

…이 시대를 최고의 이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할 소명을 띤 사람이 불쑥 나타날 것이다. 아니,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우리에게 단계적 발전을 거쳐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미네르바처럼 제우스의 머리에서 완전 무장을 하고 튀어나올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 어렸을 적 우아의 여신과 영웅들이 요람을 지켜준 젊은이였다. 그의 이름은 요하네스 브람스이다.

남편이 이 글을 쓴 해가 1853년입니다. 그럼 이렇게 물어보시겠죠? 로베르트가 언제부터 이상해진 거냐고. 아니, 이렇게 묻기라도 하면 다행이죠. 나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슈만의 무슨 무슨 작품의 화성을 들어보면 정신질환의 전조를 느낄 수 있다’ 같은 말. 세상에 대체 그런 게 어디 있답니까? 그럴 때, 저는 남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종종 이야기해요. 「유령 변주곡」이라고 남편이 환각 증세를 겪던 시절에 쓴 작품인데, 정말이지, 이 「유령 변주곡」에서의 로베르트는 참으로 평온합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남편은 강으로 뛰어 들었죠. 믿기지 않지만, 이것이 인생입니다.

 

슈만 「유령 변주곡」 (표트르 안데르제프스키 연주)

 

그 해가 1854년이었으니, 남편은 그로부터 2년을 더 살았어요. 정신병원에서요. 애들도 많은데다가 그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으니 저는 연주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때 브람스 씨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저는 지금도 종종 그 시절에 감사했다고 브람스 씨에게 말해요. 그러나 감사함과는 별개로, 살아 있으면서도 살아 있지 못한 것과 같은 사람을 보는 것, 그것이 특히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괴로웠습니다. 그 괴로움과 함께 남편이 떠났기에 저는 여전히 그가 그립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 이름으로 사는 것이 어떻냐고요? 이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게 없는데, 한번 되짚어볼게요. 제 결혼 전 성(姓)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아요. 아버지의 성함은 프리드리히 비크였습니다. 저도 한동안은 비크로 불리다가 로베르트와 결혼하고 나서 슈만이 되었죠. 그리고 물론 지금도 슈만이지요. 클라라 슈만. 그래요, 저는 클라라 슈만이지요.

만약 로베르트랑 결혼하지 않고 다른 삶을 살았으면 어땠을 것 같냐고요? 재능이 있었고, 예술가로서의 자각도 있었으니 어떻게든 잘 살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말이죠. 로베르트 없는 저는 별로 상상하고 싶지가 않아요. 음악가로서의 삶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삶이 우선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로베르트는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 점에 감사해요. 정말로.

 

슈만 「3개의 로망스」 중 2번 (셀린 므와네 연주)

글. 윤무진(음악칼럼니스트)

필자 윤무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음악학을, 전문사에서 음악사를 공부했다. 유니버설, 워너, 소니뮤직 등과 함께 클래식 음악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일을 해오고 있으며, 음악을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다.
‘가족사로 읽는 음악사’는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생애를 그들의 ‘가족’을 통해 들여다보며,
클래식에 관한 교양지식은 물론 작곡가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시선을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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