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 거의 두 번 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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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로 읽는 음악사 ⑥
프란츠 리스트
프란츠 리스트의 고국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전경. 피아노에 재능을 보인 리스트는 10대 시절 파리로 옮겨 갔는데,
이후 연주자로 작곡가로 유럽 전역에서 너무나 많은 인기를 얻은 탓에 50대가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사진의 왼쪽에 있는 마티아스 성당에서 1867년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는데, 이를 위한 미사음악 작곡을 리스트가 맡으면서 다시 고국과 인연을 맺었다.
이를 계기로 부다페스트 음악학교(現 리스트음악원) 교장에 임명된 리스트는 죽기 전까지 고국에서 연주와 교육 활동을 왕성히 펼쳤다.

재능도, 인기도 있었다. 그리고 명까지 길었다. 프란츠 리스트는 그래서 살면서 별별 꼴을 다 겪었다. 사람들은 ‘그럴 만한 인생이 있다’고 쉽게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파티에서 난동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렇다고 해서 주최자를 원인 제공자처럼 몰고 가는 것은 부당하다. 물론 세상은 명확한 원인 결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대신 시선은 그 누구보다 화려한 파티 호스트, 프란츠 리스트에게로 쏠린다. 그것이 그의 오랜 불만이었다. 아무렇게나 말을 올려대는 사람들 틈에서 리스트는 참으로 오래도 살았다.

프란츠 리스트는 1811년에 태어났다. 낭만주의라는 알듯 모를 듯 한 조류가 형성되었을 즈음, 그러니까 세상이 리스트를 위한 환경을 갖춰 놓았을 때였다. 리스트는 유럽 변방인 헝가리 출신이었고 집안도 변변치 않았지만, 혈통보다는 재능이 중요한 시대에 살 수 있었다. 귀족은 아니었지만 귀족과 같은 품위가 있었던 어린 리스트. 그러니 교육의 도움을 조금만 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귀족 못지않은 삶을 살 수 있었다.

아버지인 아담이 위대한 신동 모차르트의 전철을 준비해 아들에게 밟게 했다. 그렇게 카를 체르니가 리스트의 피아노 스승이 되었다. 후대에는 지루한 피아노 교습본의 저자로도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 누구보다 성실한 음악가였던 체르니는 충동적이던 어린 리스트의 기질을 철저한 기본기 연마로 눌렀다. 스승의 생각이 옳았다. 리스트의 재능은 더욱 피어올랐다.

프란츠 리스트의 초상화. 헝가리 화가 미클로스 바라바스가 1847년 완성했다.
리스트는 잘 생긴 외모로 유명했는데, 훤칠한 키에 금발을 날리며 무대로 나와 악보도 보지 않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에 여러 귀부인들이 열광했다고 한다. (출처 : WIKIMEDIA COMMONS)

1부. 아이돌, 프란츠 리스트

그리하여, 장성한 리스트는 서양고전음악사가 공인하는 아이돌이 된다. 연주회라는 개념으로 종종 치환되는 ‘리사이틀’의 개념을 널리 퍼트린 인물이 바로 리스트였다.

오늘의 연주회는 찬조 출연자가 없다. 대신 유일한 주인공인 프란츠 리스트가 홀로 무대에 등장할 것이다. 이윽고 피아노 앞에 앉은 리스트가 자신이 준비한 음악을 직접 손가락으로 낭송한다. 연주회장에는 서서히 묘한 분위기가 피어오르고 마치 거짓말처럼 실신하는 여성이 생겨난다. 이제 공연이 절정에 달한다. 아우성에 가까운 환호와 함께 리스트가 퇴장하지만 공연장의 열기는 가라앉을 생각이 없다.

리스트 연주회 분위기는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

 

리스트 「라 캄파넬라」 (예프게니 키신 연주)

 

연주자 리스트에 관심 있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다 리스트를 좋아했지만 특히 열광적이었던 부류는 정략결혼으로 인해 삶의 흥미를 잃어버린 부인들이었다. 여기에 승자라는 표현을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부인들 중 한 명이었던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 리스트와 새 살림을 차리는 데 성공했다. 리스트와 다구 백작부인의 관계는 법적으로는 불륜이었지만 둘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셋이나 생겼다. 첫째 딸 블랑딘, 둘째 딸 코지마, 그리고 아들 다니엘이었다. 부부 아닌 부부는 파리와 스위스를 오가며 생활했다. 요란한 파리 생활에 정이 떨어지면 조용한 스위스로 가서 망중한을 보낸다. 그러다가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면 슬그머니 파리로 복귀해 존재감을 뽐내는 것이 이들 커플의 패턴이었다.

리스트가 그렇게 살면서도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옆에서 본 친구 쇼팽은 기분이 묘했을 것이다. 예민한 천재였던 쇼팽은 음악적으로 가진 것이 많았고 특히 작품에 있어서만큼은 쇼팽의 음악세계가 리스트의 세계보다 풍부했다. 그러니 욕심이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쇼팽은 연주자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쇼팽이 두어 번의 공연을 성공으로 끝냈을 때, 그는 그 성공이 자신의 한계임을 직감했다. 체력의 절대적 부족. 연주자 쇼팽의 한계는 명확했다. 쇼팽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무렵 자연스럽게 죽음이 그의 곁을 찾아왔다. 비록 말년에는 사이가 멀어졌었지만 리스트는 이 폴란드 친구를 위한 회고록을 쓰는 것으로 옛 친구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 리스트는 이렇게 적었다.

그는 친구들을 온화하고 다정한 천성으로만 대했다. 바쁘고 번잡한 대도시에서는 모두들 타인의 운명에 마음 쓸 여유가 없다. 모두가 외적 활동으로 판단 받을 뿐이요, 굳이 겉으로 드러난 성격의 안쪽까지 들여다보려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러나 쇼팽과 자주 만나며 가깝게 지냈던 이들은 이따금 그의 조바심을, 모두가 믿는 모습대로 살아가는 따분함을 감지했다. 그러한 인간 쇼팽의 한은 예술가 쇼팽이 풀어주지 않았을까!

프란츠 리스트, <내 친구 쇼팽>, 이세진 역, PHONO, p.24

2부. 사위가 된 친구

1849년, 쇼팽의 죽음과 함께 리스트도 음악 인생의 한 장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화려한 무대 생활에 지쳐 있었고, 정신발작처럼 자신을 쏘아붙이는 다구 백작부인과의 관계도 끝장났다. 리스트는 또 다른 삶의 동반자가 될 카롤린 비트겐슈타인 부인과 함께 도망치듯 파리를 떠나 바이마르에 정착했다. 돈도 벌 만큼 벌었으니 더는 연주로 인생을 갉아 먹고 싶지 않았다. 조용한 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던 이곳 바이마르에서 리스트는 조용히 작곡에 몰두했다. 작곡가의 유일한 피아노 소나타인 「피아노 소나타」는 바이마르 시절 대표작이다. 젊고 뛰어난 피아니스트 한스 폰 뷜로가 초연을 맡아주었다. 뷜로는 리스트의 둘째 딸인 코지마와 결혼했다.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 (조성진 연주)

 

리스트는 과거 작곡했던 너저분한 스케치들을 찬찬히 살펴 수정할 수 있을 때까지 수정하기도 했다. 일례로 1830년에 스케치를 시작해 1849년에 완성한 「토텐탄츠」는 이후에도 두 차례의 수정을 가했다. 그 시절 리스트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공을 들일수록 작품은 좋아진다. 이 당연한 사실이, 프란츠 리스트의 음악을 변하게 했다. 천재성만이 아닌 노력으로 일구어낸 예술과 함께, 불타오를 듯이 화려한 리사이틀의 밤은 머나먼 이야기처럼 흘러간다.

 

리스트 「토텐탄츠」 (프랑크푸르크 방송 교향악단, 피아노 베르트랑 샤마유)

 

그러나 바이마르에서도 리스트는 리스트였다. 그의 재능은 먼 곳에서도 자연스럽게 신호를 보낼 줄 알았고 그리하여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리스트를 만나러 왔다. 그 중에는 리하르트 바그너라는 이름도 있었다. 리하르트 바그너. 운명은 이런 사람을 리스트 인생 2막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짝지어주었다. 인간 바그너는 정말이지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1. 작곡가 마이어베어에게 도움을 요청한 바그너는 합당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여기자 사람들에게 마이어베어 욕을 하고 다녔다.

2. 부유한 상인이었던 베젠동크의 지원을 받은 바그너는 그 은혜를 베젠동크의 부인과 불륜을 저지르는 것으로 갚았다.

3. 첫 번째 부인이었던 민나의 장례식에 바그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세 가지만 골라도 이 정도였다. 이렇게 온갖 패악이란 패악은 다 저지르고 다녔지만, 리스트 이상으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던 바그너는 추종자들을 앞세우고 유유히 뒤로 빠져나가곤 했다. ‘미치광이 왕’으로 불렸던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의 열렬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이 왕은 그야말로 바그너에게 홀딱 빠져 작곡가의 막대한 빚을 모두 탕감해주었다. 루트비히 2세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다. 디즈니 성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이 화려한 성이 사실 바그너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건축되기 시작했다는 세간의 소문이 사실처럼 돌고 있었다.

바그너가 그런 사람이었으니 한스 폰 뷜로는 자신의 아내이자 리스트의 딸이었던 코지마를 스승이었던 바그너에게 소개시키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대개 내가 바라는 세상이 아니기에, 어느 날 코지마는 바그너 곁으로 가버렸다. 부부 사이에 아이도 둘이나 있었는데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뷜로는 울었다.

이 아수라장에서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친구, 스승이었던 리스트는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베토벤과는 달리, 리스트는 결코 강압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리스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친구 바그너를 만나서 조심스럽게 의중을 엿보고, 딸인 코지마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사위였던 뷜로를 위로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 이상의 무언가는 리스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그너-코지마-뷜로의 삼각관계는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일러스트레이션·봄례

이러한 가족 문제는 리스트에게도 분명한 상처로 남았다. 그때 예술가로서의 리스트가 얼굴을 들이밀어 자연스레 화해를 촉구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리스트와 바그너가 다시 만났다. 바그너가 특유의 천연덕스러움과 함께 자신의 신작을 친구이자 장인인 리스트에게 소개한다. 그럼 피아노 앞에 앉은 리스트가 초견으로 기분 좋게 사위의 신작을 연주하고 바그너는 거기에 노래를 보탠다.

 

바그너 <탄호이저> 서곡 (리스트 편곡 – 율리아자 아브제예바 연주)

 

생의 마지막까지 바그너에게 천벌 같은 것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벌을 받은 것은 바그너를 좋아했던 사람들이었다. 그토록 바그너를 좋아했던 루트비히 2세는 신하들에게 쫓겨나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처음에는 그 누구보다 열렬히 바그너를 추종했지만 후에는 그 누구보다 바그너를 증오한 프리드리히 니체는 말 그대로 미쳐버렸다. 세상의 불공평함은 그렇게 바그너를 통해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 예술가는 그것도 모자랐는지 영생을 꿈꿨다.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을 영원히 섬기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바이로이트. 지금도 독일 바이로이트에서는 매년 바그너의 작품을 올리며 바그너와 그의 작품을 기린다.

하지만 리스트는 그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리스트는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는 대신 지난 과거를 조용하고 경건하게 마무리하는 삶을 택했다. 리스트는 교회로 가 신부가 되려 했다. 그리고 반쯤은 그 소원을 이루었다. 정식으로 사제 서품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와 비슷한 지위를 얻는 것으로도 리스트는 만족할 수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젊은 시절 세상 모든 쾌락을 맛본 이가 어찌 교회에 발을 들이느냐’고.

리스트는 그런 반응도 기꺼이 이해할 수 있었다. 속세의 모든 희로애락을 겪은 이가 말년에 마주한 감정은 ‘무’에 가까웠다. 리스트는 그 ‘무’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기에 신의 세계 주변을 맴돌았다. 그 즈음 리스트만큼이나 요란스러운 인생을 보냈던 바그너가 1883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제 리스트의 차례가 멀지 않았고 인생의 숫자는 75에서 멈춘다. 1811년에 시작해 1886년까지 이어온 기나긴 삶. 그 내용으로 보자면 거의 두 번 살았다 해도 충분한 인생이었다.

글. 윤무진(음악칼럼니스트)

필자 윤무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음악학을, 전문사에서 음악사를 공부했다. 유니버설, 워너, 소니뮤직 등과 함께 클래식 음악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일을 해오고 있으며, 음악을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다.
‘가족사로 읽는 음악사’는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생애를 그들의 ‘가족’을 통해 들여다보며,
클래식에 관한 교양지식은 물론 작곡가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시선을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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