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의 잘못된 결혼

생활 속 행복 주인공을 찾아라!
2019년 7월 4일
영상미디어아트의 국제적 흐름을 파악하라
2019년 7월 4일
132019년 7월 4일
가족사로 읽는 음악사 ⑦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베드로와 바울 교회. 러시아 북서부, 핀란드 만에 접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제2의 도시로 ‘유럽으로 열린 창’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러시아가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했다.
차이콥스키는 이 도시의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률 공무원이 되었다가 역시 이 도시의 음악원에서 공부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의 길을 걷게 된다.
훗날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가 되면서 한동안 이 도시를 떠나지만, 자신의 마지막 작품(교향곡 6번)을 이 도시에서 직접 지휘하여 초연하고 며칠 뒤 이 도시에서 사망한다.

어느 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내게 낭만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었다. 선생은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 제6번 ‘비창’의 1악장으로 낭만주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비창(悲愴), 마음이 몹시 상하고 슬프다는 뜻의 이 작품과 함께 차이콥스키는 ‘슬픔의 왕’으로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었다.

극한의 아름다움, 그 정점

그런데 그날 밤의 ‘비창’은 평소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비창’이 전혀 슬픈 작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슬픔은 마주하고픈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냉담하고 무기력하며 어떨 때는 증오를 품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차이콥스키의 ‘비창’은 우리에게 익숙한 슬픔의 요소가 전혀 없었다. 불협화음이 쓰이지도 않았고, 구조적으로 기이하지도 않다. 작품은 오히려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하다.

그런데 왜 이게 슬프다고 느꼈던 걸까? 1악장이 연주되는 내내 차이콥스키는 아름다움이라는 감각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끝없이 확장되는 지점에서 음악은 슬픔 비슷한 것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움이 과해지자 감정이 환각을 일으킨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알게 되었다. 아름다움으로 모든 감정을 설명하려는 것이 낭만주의라는 것을.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려는 음악이 낭만주의 음악이라면, 그 정점에는 차이콥스키가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이 극한의 아름다움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차이콥스키라는 사람의 인생과 음악을 구분해서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아름다움은 혹시 그의 불행에서 온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인간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불행을 찾아가보기로 하였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주, 정명훈 지휘)

죽음과 바꿔야 가능한 자아

어쩌면 러시아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것부터가 차이콥스키에게는 시련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음악가 차이콥스키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좋았다고 말 할 것이다. 러시아. 땅만큼이나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전통,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문화와 함께 차이콥스키는 위대한 작곡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 차이콥스키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괴로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러시아 남자들의 성공은 두 가지 직업으로 압축되곤 했다. 군인이 되거나, 법학도가 되는 것. 그 이외의 직업으로 사는 건 어느 정도 실패를 인정하면서 남은 인생을 살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작곡가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에서 음악은 오랫동안 교양의 일부분이었다.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음악이었다. 위대한 보로딘은 화학자였고,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한때 군인이었다. 작곡가가 되는 일 말고는 위대해질 수 없었던 스트라빈스키도 법학도가 되라는 아버지에게 시달려 법학대학에 입학했었다. 차이콥스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러시아 어린이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고통은 기숙학교 입학에서 시작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법률학교에 차이콥스키는 1852년부터 1859년까지 학생으로 있었다. 생활기록부는 차이콥스키 학생을 매사 다정하고 붙임성이 좋은 학생으로 기억한다. 흡연 말고는 이렇다 할 비행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러시아라는 국가의 강압적인 분위기와 법률학교, 그리고 그곳에서의 기숙사 생활이 어린 차이콥스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있다. 차이콥스키는 이 시기에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만났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동성 친구들에게서 발견했다.

그건 러시아인 차이콥스키의 불행이었다. 차이콥스키의 시대, 그러니까 19세기 후반부터 동성애가 선택적 장애가 아닌, 선천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등장했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그 정도가 심해 동성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과 맞바꿔야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혹시 동성애자가 아닌가, 의심했던 사람들은 이내 그 마음을 지워야만 했다.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부정하거나, 아예 쳐다보지 않는 편이 죽음보다는 나으니까.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가 1893년 완성한 차이콥스키의 초상화 (출처 : WIKIMEDIA COMMONS)

뒤늦은, 그러나 압도적 재능

그러니 차이콥스키 또한 사랑의 감정을 사사로운 것으로 묻어두고 제 할 일을 했다. 그리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호기심 가는 일들을 조금씩 찾아보았다. 그 중 하나가 음악이었다. 법률학교 졸업 후 법무부에서 근무하게 된 차이콥스키는 10대 시절부터 줄곧 마음에 두고 있었던 음악에 재능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럴듯한 직장도 있었으니 무리하지 않기로 한다. 차이콥스키는 직장생활과 병행할 수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음악원 과정에 등록해 재능을 가늠해 보았다.

결과는 음악의 완벽한 승리. 오히려 음악에의 재능이 압도적이었기에 더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앞으로 잘 해나간다면 세상은 차이콥스키를 ‘성인이 되어 재능을 캐낸 보기 드문 음악가’로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젊은 차이콥스키는 전업 작곡가가 되었고, 뒤늦은 재능으로 명성을 조금씩 쌓아 나갔다. 1874년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1번은 동료 음악가였던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에게 피아노 독주 부분이 불가능하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감각만은 빛나는 작품이고,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마르타 아르헤리치 피아노, 샤를 뒤투아 지휘, 스위스로망드오케스트라 연주)

 

1875년에서 76년 사이에 작곡한 발레 모음곡 <백조의 호수>의 선율은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다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키로프발레단 <백조의 호수>
(빅토르 페도토프 지휘, 키로프극장오케스트라 연주)

성급한 결혼, 증오와 회한

비록 작곡가를 직업으로 택하게 되었지만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사는 삶은 행복했다. 차이콥스키는 여기서 욕심을 더 부려보기로 한다. 음악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번듯한 사람이고 싶었던 차이콥스키는 결혼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1877년, 서른여섯의 나이에 그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는 안토니나 이바노프나 밀류코바라는 여성과의 결혼을 지인들에게 알렸다. 동생 모데스트에게는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내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다다랐어.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 결혼하기로 했어.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야. 무조건 해야만 해. 이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이기도 해. 너는 이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잘 알겠지.”

누가 시키지도 않은 결혼을 앞두고 차이콥스키는 이렇게 썼다. 결혼을 앞둔 사람의 마음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같은 달에는 아버지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차이콥스키는 초조하다.

“아버지에게, 저 결혼합니다. 아버지의 축복 없이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 신부 될 사람은 가난하지만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아실 겁니다. 이 나이를 먹고 성급하게 결혼하려는 사람은 없다는 걸요. 그러니 아버지가 너무 걱정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차이콥스키는 애써 부인하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 성급한 것은 바로 차이콥스키라고 편지는 말하고 있다. 결국 결혼식은 감행되었고, 이후 차이콥스키는 모데스트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낸다. 동생을 안심시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문장들로 가득한 편지를 말이다.

“내 아내는 엄청난 장점 하나가 있어. 내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거지. 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만족한다고.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고는 말 못하겠어. 그런데 말이야. 이 상황에 익숙해졌을 때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오, 그러나 그런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결혼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차이콥스키는 불같은 감정에 휩쓸린다. 그 감정이 어찌나 복잡한지 차이콥스키는 감정의 실체를 한동안 알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 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 감정이 증오와 회한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차이콥스키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의 후원자였던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에게 차이콥스키는 이렇게 편지를 써 보냈다.

“처음에는 사랑한다고 생각해 결혼했지만 제가 분별이 없었던 듯합니다. 결혼식이 끝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혼자 있고 싶다고 줄곧 생각했죠. 그런데 이제 영영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그저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 음악 재능도 사라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내 차이콥스키는 도망치듯이 아내를 떠나갔고, 이후에는 이혼 소송을 제기하는 것으로 자신을 구해낼 수 있었다. 남편이 왜 그토록 자신을 증오하는지 털끝만큼도 알지 못했던 아내는 끈질기게 매달렸지만 허사였다. 차이콥스키는 3년이라는 세월을 이혼 처리에 사용해 결국 원하는 바를 성취했다. 이혼과 함께 찾아온 불운을 막을 수 없었던 전 부인 밀류코바는 이후 20년이라는 세월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된다.

일러스트레이션·봄례

이혼을 앞둔 자의 완벽한 승리

종종 결혼 제도에 대해 생각하지만 차이콥스키를 떠올릴 때면 ‘결혼’이라는 글자가 기이하게 변한다. 그것은 비정상적으로 확대되거나, 누구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아지기도 한다. 너무 커서 마주할 수밖에 없고 너무 작아서 모른 척하고 싶은 ‘결혼’이라는 개념에 당당히 뛰어든 차이콥스키는 지옥 같은 증오만을 맛보고 이렇게 현실로 돌아왔다.

차이콥스키는 결혼으로부터, 그리고 여성으로부터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어쩌면 차이콥스키의 첫 시련, 10대 중반에 있었던 어머니의 죽음에서 그가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토록 다정했던 어머니의 죽음은 차이콥스키에게 더 없는 슬픔으로 남았었다. 이후에도 만성적인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차이콥스키는 어쩌면 잘 알지도 못하는 여성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했기에 그토록 큰 증오를 품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에게 완벽한 여성이었다. 부유한 철도 재벌의 미망인이었던 폰 메크 부인은 귀찮게 하는 일 없이 차이콥스키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이 관계에서만큼은 차이콥스키가 제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차이콥스키는 언제나 음악으로 기대에 보답했다. 아내에게 결코 보일 수 없었던 다정함도 폰 메크 부인에게는 보일 수 있었다.

차이콥스키는 언제나 폰 메크 부인에게 붙임성 좋은 문장을 가득 담아 편지했었다. 그것만으로도 후원의 당위성은 이미 충족되고 남았을 것이다. 결혼의 아픔이 한창이었을 1878년, 차이콥스키는 막 완성된 교향곡 제4번을 폰 메크 부인에게 헌정하며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은 우리의 교향곡입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4번
(카를로스 미구엘 프리에토 지휘, 프랑크푸르트방송교향악단 연주)

 

차이콥스키는 애써 ‘우리’라는 말을 쓰며 과거를 잊으려 했지만 쓰디쓴 경험을 모른 체 하기에는 너무나 음악적인 사람이었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4번에는 부제가 없지만 여기서만큼은 이 작품의 부제를 ‘결혼’이라 붙여 들어보고 싶다. 운명과 같은 결혼생활을 상징하는 테마가 1악장 내내 울리고 체념한 차이콥스키가 2악장에 쓸쓸하게 서 있다. 이어지는 3악장은 현악기의 피치카토로만 연주된다. 통통거리는 현악기 소리와 함께 차이콥스키는 본래의 기분을 조금씩 찾아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4악장은 그야말로 이혼을 앞둔 자의 완벽한 승리! 이로써 차이콥스키는 짧은 결혼생활에서 해방되었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정말로 차이콥스키는 교향곡 제4번으로 표현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결혼에의 회한을.

글. 윤무진(음악칼럼니스트)

필자 윤무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음악학을, 전문사에서 음악사를 공부했다. 유니버설, 워너, 소니뮤직 등과 함께 클래식 음악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일을 해오고 있으며, 음악을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다.
‘가족사로 읽는 음악사’는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생애를 그들의 ‘가족’을 통해 들여다보며,
클래식에 관한 교양지식은 물론 작곡가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시선을 담아냅니다.

2 Comments

  1. 김미* 댓글:

    음… 결혼의 회한이라기보다는 예술가의 압박에 의한 결혼으로 한여성의 삶은 망가진 이야기인데요…결국 그가 원한건 가난하고 헌신적인 자신만 바라보는 아내가 아니라 화려하고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낼 부유한 후원자 여성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예술가에게 필요한 사랑이라는 것이 다시 한 번 슬프네요

    • admin 댓글:

      예술가에게 필요한 사랑이란 어떤 모습일까.. 의미 있는 시각에서 바라봐주셨네요. 고맙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과 상대가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 그것이 잘 맞아떨어진다면 아니, 적어도 비슷하다면 좋을 텐데요.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