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다이내믹 클래식, 다이내믹 러시아
2019년 7월 22일
예술을 사랑한 영화, 영화를 사랑한 음악
2019년 7월 22일
192019년 7월 22일
명작으로 읽는 세계 연극 ⑧ 세르비아 편
류보미르 시모비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도나우 강과 합류하는 사바 강의 모습. 사바 강은 슬로베니아 북부에서 시작해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를 거쳐 세르비아를 흐르는데, 20세기에는 사바 강을 품은 이들 나라 간에 이합집산이 반복된 바 있다. 세르비아의 역사는 5~6세기경 슬라브족이 발칸 지역으로 이주해 부족국가를 수립하면서 시작되는데, 중세 이후로는 터키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등 주변국의 끊임없는 침략으로부터 격렬히 저항한 역사였으며, 20세기부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수없이 많은 내전·탄압으로 파괴가 거듭되는 역사였다. 과연 이런 도시에서도, 이런 역사에서도 연극은 의미가 있을까.

유럽의 가장 동쪽인 동시에 아시아가 시작 되는 곳, 발칸 반도는 지리적 특성상 예로부터 유럽과 아시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다양한 민족들의 정치 및 종교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었다. 특히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당한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한 이후, 발칸은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며 수많은 분쟁과 갈등의 터전이 되어 왔다. 전 유럽을 포화 속에 몰아넣은 제1차 세계대전과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크로아티아 내전 및 보스니아 내전, 그리고 가장 최근의 코소보 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상자를 만들어낸 심각한 유혈사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세르비아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바로 이 뜨거운 발칸 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한 나라이다. 오랜 오스만투르크 지배 기간에는 저항운동의 중심에 섰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발칸 지배에 반발해 세계대전을 일으켰으며,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티토의 지휘 아래 유고 연방을 이끌었다. 이후로도 세르비아의 현대사는 쉼 없는 전쟁과 내전으로 점철되었고, 도도히 흐르는 사바 강과 도나우 강을 따라 끝없는 피와 눈물이 흘러넘쳤다.

세르비아를 대표하는 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Ljubomir Simović)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Putujuće pozorište Šopalović)은 바로 이런 격동의 세르비아 역사 속, 작은 마을 우지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우지체 출신이기도 한 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는 이 작품을 통해 “전쟁 같은 우리 인생에 연극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 위치한 유고슬라비아 연극 극장(Jugoslovensko dramsko pozorište)에서 1986년 공연된 <쇼팔로비치 유랑극단>

끝내 실패한 연극 상연

매일 같이 어디선가 총성이 울려대고 교수대의 암울한 그림자가 사라질 날이 없는 세르비아의 작은 마을 우지체. 제2차 세계대전 격전지로 독일군이 점령하고, 이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들이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이 마을에 유랑극단 하나가 찾아온다. 단장 겸 배우인 바실리예 쇼팔로비치와 원숙한 여배우 엘리자베타,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신인 여배우 소피아, 현실과 연극을 구분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필립, 총 네 명으로 구성된 단출한 극단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독일 극작가 실러의 <떼도적>을 공연하려 하지만 전쟁 중 독일군 치하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연극, 게다가 적국인 독일 작가의 작품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매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에게 극단 배우들과 연극은 귀찮고 적대적인 존재일 뿐이다. 때문에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은 공연 홍보 도중 마을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등 온갖 방해 속에서 어렵사리 공연을 준비한다.

한편, 유랑극단이 잠시 묵기로 한 집에는 술주정뱅이 남편 블라고예와 그의 아내 기나, 그리고 늘 검은 상복만 입고 다니는 과부 심카가 살고 있다. 어느 날, 집 마당에서 연극 연습을 하고 있는 배우들 앞에 채찍을 든 고문기술자 드로바쯔가 나타난다. 드로바쯔는 걸어간 자리마다 핏자국이 남을 정도로 잔인하고 냉혹하기로 소문난 고문관이다. 그는 방금 전 독일군 사령관과 그의 정부가 살해당했다면서, 블라고예와 기나의 아들 세쿨라가 용의자로 체포되었음을 알린다. 사령관 암살사건으로 모든 공연은 전면 금지된다.

한편, 강가에서 수영을 하던 소피아는 자신에게 반해 쫓아온 드로바쯔와 마주치게 된다. 간신히 연극적 기지를 발휘해 드로바쯔를 조용히 보내는 데 성공하지만, 드로바쯔의 핏자국을 따라온 마을사람들은 소피아를 창녀 취급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박박 깎는다. 그런가 하면, 언제나 연극과 현실을 구분 못하고 연극 속에서 살아가는 배우 필립은 마을 광장에 전시되어 있는 죽은 사령관의 시체를 보고, 이 상황을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스> 중 한 장면이라 착각, “내가 오른팔로 저들을 단숨에 무찔렀지!”라고 부르짖음으로써 살인자로 오인되어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다. 다음날, 남은 배우들은 짐을 꾸려 조용히 우지체 마을을 떠난다.

일러스트레이션·정유나

유랑극단이 남기고 간 변화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결국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은 우지체 마을에서 연극을 올리지 못하고 떠난다. 배우 하나는 죽고(필립), 배우 하나는 머리가 박박 깎인 채(소피아). 하지만 그들이 떠난 뒤 마을에는 자그마한 변화가 생긴다. 필립이 암살자로 오인되어 죽은 덕분(?)에 용의자였던 세쿨라가 풀려나고, 세쿨라와 은밀히 연애 중이던 과부 심카는 늘 입던 상복을 벗고 모슬린 드레스를 꺼내 입는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는 유랑극단을 배웅하면서, 고문관 드로바쯔가 수레국화 한 송이를 손에 든 채 자신의 채찍으로 목을 매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은 마지막까지 연극을 올리지 못했지만, 잠시 동안 머물면서 그들은 분명 이 마을 사람들의 삶에 보이지 않는 변화를 만들어냈다. 세쿨라가 풀려난 것은 필립이 현실을 연극으로 착각해 대신 죽었기 때문이고, 심카가 상복을 벗은 것은 배우들의 조언(아래 인용문 참조) 덕분이다. 그리고 드로바쯔는 소피아와 대화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유랑극단의 배우들은 무대 위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마을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 작품 속에서 연극은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예술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삶을 바꾸는 힘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과부 심카와 배우들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심카 : 저… 전쟁이잖아요. 근데 당신들은… 무대의상을 걸치고 화장을 하고 연기를 하고 즐기잖아요…

바실리예 :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심카 : 전 잘 모르겠어요.

바실리예 : 대답해보세요. 지금 빵 굽는 사람은 어디 있죠?

심카 : 그야 빵 가게죠.

바실리예 : 그럼 약사는요?

심카 : 약국에 있죠.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바실리예 : 그런 논리대로라면, 배우는 어디 있어야 하나요?

심카 :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알아요. 극장에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지금이 연극 공연을 할 땐가요? 배우와 빵 굽는 사람을 비교할 순 없어요. 적어도 빵은 우리가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인데… 배우는..

소피아 : 어쩌면 배우는 사람이 왜 먹고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죠!

(중간 생략)

엘리자베타 : 심카 부인, 검은 옷을 벗어버려요!

심카 : 어떻게요? 저는 상중인데…

엘리자베타 : 상중이니까 말씀 드리는 거예요! 흰 색 옷을 입어 봐요! 빨간 색으로 멋도 내고! 머리엔 하얀 카밀레 꽃도 꽂아 봐요!

심카 : 왜요?

엘리자베타 : 상중이니까요! 전쟁이 났으니까요! 사람들이 잡혀가고 살인과 방화가 빈번하니까요! 흰 모자와 흰 장갑을 껴 보세요! 흰 양산도 들고요!

류보미르 시모비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 김지향 역, 연극과인간, 2001.

사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세르비아와 2019년의 한국 사이에는 분명 큰 간격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쟁 같은 일상을 헤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도 않다. 또 많은 사람들이 오직 살아남는 것과 먹고 사는 것에만 몰두해, 뭔가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생산물을 내놓지 못하는 것들(대표적인 것으로 예술이 있다)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것 역시 비슷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술은 왜 존재하며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대를 초월해 공감을 자아내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작가 시모비치는 유랑극단 배우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전한다. 예술은 우리에게 밥을 먹여주진 않지만, 적어도 우리가 왜 밥을 먹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다고.

2010년 3월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의 장면들. 드로바쯔의 핏자국을 따라 왔다가 소피아를 창녀로 오해하고 해코지하는 마을 사람들(왼쪽 사진), 그리고 필립이 죽은 뒤 마을을 떠나가는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을 배웅하는 심카(오른쪽 사진). 늘 입고 있던 검은 상복을 벗어버린 심카다. (사진제공 국립극단)

연극과 삶의 불가분의 관계

‘연극’과 ‘삶’이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작가는 몇몇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강조한다. 먼저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에는 필립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과 역할에 너무나 심취해 연극과 현실을 잘 분간하지 못하는 배우다. 필립은 연극의 소품인 나무칼로 실제 공룡의 배를 가를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현실 속 대화와 연극 속 대사를 자주 혼돈하곤 한다. 이러한 그의 성향이 결국 그를 사령관 암살 사건 현장에서 살인자로 오인 받아 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현실을 연극의 한 장면으로 착각해서 죽다니, 어찌 보면 필립의 죽음은 그야말로 어이없고 헛된 개죽음에 가깝다. 하지만 필립이 오해받아 죽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용의선상에 있던 기나의 아들 세쿨라가 풀려나게 된다. 여기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세쿨라 대신 죽음으로써 그를 구하는 필립은 곧 인간을 구원하는 연극의 힘을 은유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강둑에서 수영을 하던 배우 소피아가 무시무시한 고문관 드로바쯔를 만났을 때도, 연극은 삶을 구원하는 한 줄기 빛이 되어준다. 처음에 소피아는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를까 했지만, 만약 그렇게 저항한다면 드로바쯔를 당해낼 수 없으리란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고 곧 연기를 펼친다. 그녀는 자신들이 공연했던 작품 중 약초꾼의 역할을 떠올리고서는 주위에 있는 풀들에 대해 떠들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로바쯔를 자신의 대화 속에 끼어들게 한다.

자신도 모르게 소피아와 이런저런 풀과 약초, 그리고 아름다운 꽃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드로바쯔는 어느덧 자신의 과거와 불행한 현재에 대해서 털어놓게 되고, 암흑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그에게 소피아는 어둠을 비춰줄 것이라며 예쁜 수레국화 한 송이를 건넨다. 드로바쯔가 죽을 때 한 손에 들고 있었다던 그 수레국화다. 소피아가 꾸민 ‘연극’에 자기도 모르게 동참했다가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드로바쯔의 죽음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연극의 힘을 보여준다.

이렇듯 현실과 연극을 구분하지 못하는 ‘필립’과 고문관 드로바쯔를 맞닥뜨렸을 때 연기로 위기를 모면하는 ‘소피아’를 통해 작가 시모비치는 연극이 실제 우리의 삶과 유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임을 말하고자 한다. 연극은 환상이지만 이 환상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있는 환상인 것이다. 그리고 그 환상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삶을 분명 변화시킨다.

필립의 죽음이 세쿨라를 살리고, 심카가 상복을 벗어던지고 하얀 드레스를 입게 되었듯, 또 드로바쯔가 손에 채찍 대신 꽃을 들게 되었듯, 연극은 삶을 변화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삶에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만들어준다. 그렇게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은 연극이 이 전쟁 같은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 가치를 이야기로써 다시 증명시켜주는 작품이며, 그런 맥락에서 극중 필립의 대사는 연극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쓰인 모든 대사들 가운데 가장 강렬하고 힘 있는 비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필립 : 양을 모피코트로, 곰을 털모자로, 돼지를 부츠로 둔갑시키는 이 세상에서, 만약에 네가 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모피코트가 양의 울음소리를 내도록, 털모자가 곰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도록, 부츠가 새끼돼지를 낳도록 할 것인가?

극단 달나라동백꽃의 연극 <로풍찬 유랑극장>(2018)은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의 시공간을 1950년대 전남 보성의 한 마을로 가져온 작품이다. 빨치산과 토벌대 사이의 피바람이 계속되고 6.25의 전운이 감도는 마을(왼쪽 사진)에 찾아온 로풍찬 유랑극장이 <노민호와 주인애>를 공연 중이다(오른쪽 사진). 학살과 복수가 반복되는 폭력과 야만의 삶 속에서 연극은 무엇으로 다가올까. (사진제공 달나라동백꽃)

글. 김주연(연극평론가)

필자 김주연은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고, 월간 <객석>에서 연극 담당 기자로 활동하면서 『우리 시대의 극작가』(공저)를 출간했다. 연극학으로 박사 학위를 마친 뒤 현재 연극평론가와 드라마터그, 그리고 연극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명작으로 읽는 세계연극’ 시리즈는 세계 연극사에서 손꼽히는 희곡들을 국가별로 한 편씩 골라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 작가가 희곡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각해보는 칼럼입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