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향해 가는 멀고도 험한 길

예술을 이해하는 가장 현명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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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즈디 무아와드 <화염>
세계에서 아름다운 고속도로 중 하나로 손꼽히는 캐나다 아이스필드 파크웨이에서는 로키산맥을 감상하며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 아름다운 대자연으로 유명한 캐나다는 비록 국가의 역사는 짧지만 다민족·다문화 특유의 역동성과 영감을 지닌 예술가들이 주목할 만한 창작 활동을 꾸준히 펼쳐오고 있다.

북아메리카 서부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로키산맥의 장엄한 설산과 거울처럼 맑게 빛나는 수 백 개의 호수, 그리고 가을이면 노랗고 빨간 빛으로 전 국토를 물들이는 단풍나무 숲. 캐나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렇듯 광활하고 때 묻지 않은 대자연의 풍경이지만, 한편으로 이 나라는 잘 구축된 사회보장제도와 쾌적한 주거환경 등으로 인해 매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1, 2위를 다투는 복지국가이기도 하다.

그 덕분인지, 예로부터 캐나다는 유럽, 아시아, 중동, 유대계 등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이민자들이 국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은 캐나다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인 동시에 자신들만의 공고한 커뮤니티를 통해 언어와 종교, 역사와 풍습 등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비슷한 이민의 역사를 지닌 미국이 ‘용광로’의 나라로 불리는 데 비해, 캐나다는 다채로운 이민자 사회가 각자의 색깔을 잃지 않은 채 공존하는 ‘모자이크’의 나라로 불리곤 한다. 이러한 다문화주의는 캐나다 문화예술의 근간을 이루는 바탕으로서 서로 다른 문화적 뿌리를 지닌 예술가들의 다채로운 창작 활동에 영감을 주어왔는데, 캐나다 속의 작은 프랑스라 불리는 퀘벡 출신으로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Robert Lepage)나 다국적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공연단체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현재 퀘백을 중심으로 활발한 연극 작업을 펼치고 있는 레바논 출신의 극작가 와즈디 무아와드(Wajdi Mouawad) 역시 이러한 계보를 잇는 예술가로서, 그의 대표작 <화염>(Incendies)은 그리스 비극인 <오이디푸스 왕>을 모티브로 모국 레바논의 아픈 현대사를 극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압도적인 비극의 와중에서도 무아와드는 극중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레바논으로 떠나는 쌍둥이 남매의 긴 여정을 통해, 중동계 캐나다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의 문제를 함께 다루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무시무시한 운명에 대한 신탁을 듣고 이를 피하기 위해 떠돌다가 테베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스핑크스를 죽이고 테베의 왕이 된다. 하지만 테베에 갑자기 역병이 불어닥치고, 오이디푸스 왕은 그 원인을 알아내던 중 자신이 그렇게 벗어나고자 했던 운명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된다. 차마 견딜 수 없던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두 눈이 멀게 하고, 딸 안티고네에 의지하여 세상을 떠돌다 콜로노스에서 죽음을 맞는다. 왼쪽은 기원전 480~470년경의 퀼릭스(kylix,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술잔의 종류)에 그려진 톤도(tondo, 원형회화 또는 원형부조)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를 표현한 것이며(바티칸박물관 소장), 오른쪽은 프랑스 화가 장-안투안-테오도르 지로스트가 1788년에 완성한 유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다(달라스미술관 소장). 출처 : WIKIMEDIA COMMONS

현대로 옮겨진 오이디푸스의 비극

서양연극사의 가장 첫 머리를 장식하는 작품,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비극은 두 가지 지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최초의 비극은 먼 옛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리라”는 저주받을 운명을 피하기 위해 먼 곳으로 보내지는 오이디푸스의 발뒤꿈치로부터 시작된다(버려진 오이디푸스를 발견했을 때 발꿈치에 상처가 있어 ‘발이 부은 아이’라는 뜻으로 오이디푸스라 부르게 된 것). 그리고 또 하나의 비극은 테베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도시에 닥친 재앙의 원인을 알아내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각기 다른 시간 속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하나로 합쳐지면서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고 파국을 이끌어낸다.

와즈디 무아와드가 쓴 <화염>(우리에게는 2011년 개봉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그을린 사랑>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역시 <오이디푸스 왕>처럼 두 가지 출발점을 갖는다. 하나는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이 어머니 나왈의 유언에 따라 잃어버린 아버지와 형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고, 또 하나는 그보다 훨씬 전에 낳자마자 멀리 떠나보낸 아들을 찾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나왈의 발걸음이다. 이 두 이야기 역시 각기 다른 시점에서 시작되지만, 결국은 하나로 만나면서 끔찍한 진실을 토해놓는다.

처녀 시절, 가문이 반대하는 난민촌 청년과 사랑에 빠진 나왈은 억지로 그와 헤어지게 되고 그 사랑으로 태어난 아들 니하드마저 빼앗긴다. 이후 나왈은 할머니 나지라로부터 “불행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읽고 쓰고 배워야 한다”는 유언을 듣고서 대학에 가서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내전의 불안이 점점 가중되자 나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들을 되찾겠다는 다짐을 하고, 아들이 보내졌던 고아원을 향해 간다.

내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고아원의 흔적 속에서 결국 아들을 찾지 못한 나왈은 길 위에서 민병대의 무자비한 난민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이에 분노해 민병대 지도자를 단독 살해한다. 그리고 악명 높은 크파 리얏 감옥에 수감되는데, 이때 고문기술자 아부 타렉으로부터 강간을 당해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을 낳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캐나다 법정에서 아부 타렉의 범죄를 고발하는 증언을 하던 나왈은 아부 타렉의 자기변호를 듣던 중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신의 아들 니하드임을 깨닫고, 이후 기나긴 침묵을 지키다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죽기 전, 쌍둥이 남매에게 각기 아버지와 형을 찾아 전해달라는 두 통의 편지를 남긴다.

 

우리나라에는 2011년에 개봉한 영화 <그을린 사랑>(Incendies, 2010) 트레일러 영상. 와즈디 무아와드의 <화염>을 영화화한 것으로, 2011 아카데미영화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희곡 못지않은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알고자 하는 욕망과 고통

“이 작품은 결국 나왈의 이야기이자, 그녀를 휩쓸고 간 것이 무엇이었는지, 읽고 쓰고 생각하고자 하는 열망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라고 와즈디 무아와드가 ‘작가의 글’에도 썼듯이, 이 이야기는 결국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과 앎의 비극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왈은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할머니 나지라의 유언에 따라 읽고 쓰고 배우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고, ‘배웠기 때문에’ 세상에 분노할 줄 알게 된다. 여기서 배움은 단순히 지식의 습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교육을 통해 배운 나왈은 자신이 배운 바에 따라 ‘옳지 않음’에 대항하기 위해 테러를 감행하고, 그로 인해 감옥에서 오랜 시간 고통 받게 된다.

한편 법정에서 증언하는 바와 같이 니하드 역시 어려서부터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 헤매었고, 자신의 뿌리를 ‘알기 위해’ 떠돌던 그 방황의 세월이 결국 그를 감옥과 법정으로 보낸 것이다. 또한 그동안 몰랐던 어머니의 과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는’ 쌍둥이 잔느와 시몽 역시 이러한 앎의 궤적을 따르고 있다. 이는 자신의 기원을 찾아가는 오이디푸스의 여정과도 겹쳐지면서 모든 ‘앎’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와즈디 무아와드의 <화염>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현대 중동 지역을 배경으로 새롭게 써낸 작품이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 그 속에서 하나씩 밝혀지는 진실, 그리고 진실을 깨닫는 순간 알게 되는 ‘앎’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화염>의 주요한 모티브들은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으로부터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나지라 : …나왈,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 말하고 싶은 것들이 있지.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이나, 우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지… 그 사람들에게 말하려는 건…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행복으로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서야! 봐라, 1년이나 됐어. 한 아이가 네 뱃속에서 나오고, 이후 네가 넋을 잃고 방황한 지 말이야. 주저앉지 마라… 받아들이지 마라, 나왈.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돼. 하지만 거절하기 위해선, 말하는 법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니 용기를 내서 열심히 해라! 죽어가는 한 노인네가 네게 하는 말을 잘 들어둬. 읽는 걸 배워라, 쓰는 걸 배워. 셈하는 걸 배우고, 말하는 걸 배워라. 그것만이 우릴 닮지 않는 유일한 기회란다. 약속해줘.

나왈 : 약속할게요.

나지라 : 이틀 뒤면, 사람들이 나를 묻겠지.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채 내 몸에 한 사람씩 물 한 양동이를 뿌려주겠지. 하지만 묘비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쓸 줄 모르기 때문이야. 넌, 나왈, 배우게 되면, 돌아와서 묘비에 내 이름을 새겨다오. ‘나지라’라고, 내 이름을 새겨줘. 왜냐하면 난 내 약속을 지켰으니까. 나는 떠난다, 나왈. 내겐, 모든 게 끝났어. 우리, 우리 가족, 우리 가족의 여인네들, 모두가 아주 오랫동안 분노에 빠져 있었어. 난 내 엄마에게 화가 났고, 네 엄마는 내게 화가 났으며, 너 또한 네 엄마에게 화가 났지. 너도 네 딸에게 분노의 유산을 물려주게 될 거야. 이 끈을 끊어야 한다. 그러니 배워라. 그리고 떠나버려. 네 젊음과 가능한 한 모든 행복을 안고 마을을 떠나…. 읽고, 쓰고, 셈하고, 말하는 걸 배워. 생각하는 걸 배워라, 나왈. 배워야 한다.

와즈디 무아와드, <화염>, 최준호/임재일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말과 침묵이라는 청각적 기호

‘눈 멈’과 ‘눈 뜸’을 통해 ‘앎과 모름’의 대비를 은유적으로 보여주었던 <오이디푸스 왕>과 달리, <화염>은 ‘말’과 ‘침묵’이라는 청각적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 ‘읽고 쓰고 말하는 법을 배우라’는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나왈은 이후 자신의 말(주장)을 갖게 되고, 친구 사우다에게 알파벳을 큰 소리로 가르친다. 나중에 감옥 안에서 끔찍한 일들을 당할 때도 나왈은 끊임없이 노래를 부른다. 자신의 이름 대신 ‘노래하는 여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법정에서는 증언이라는 강력한 말을 통해 고문기술자 아부 타렉을 고발한다.

하지만 아부 타렉이 자신이 그토록 찾아다닌 아들 니하드였다는 진실을 알게 된 직후, 그녀는 말을 잃어버린다. 긴 세월을 침묵으로 지킴으로써 바로 눈앞에 아들을 두고서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무지함을 반성하고,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생길 또 다른 상처를 스스로 끌어안은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침묵 또한 말 만큼이나 중요한 힘을 갖는다. 극중 진실을 알게 된 모든 이들은 말을 잃는다. 그리고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난 뒤 시몽과 잔느가 마지막으로 한 행동은 어머니 나왈의 침묵을 녹음한 테이프를 들으며 ‘침묵’에 귀 기울이는 것이었다. 이렇듯 <화염>은 진실을 향한, 그리고 그 앞에 선 인물의 내면을 ‘말과 침묵’이라는 청각적 기호를 통해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시각적 기호를 사용한 <오이디푸스 왕>의 또 다른 변주로 여겨진다.

일러스트레이션 · 정유나

뿌리를 찾아가는 쌍둥이의 여정

<화염>에는 몇 개의 여행 이야기가 다층적으로 엮여 있다. 잔느와 시몽이 어머니의 과거를 찾아 레바논으로 떠나는 여행과 아들을 찾기 위한 나왈의 여행, 그 와중에 사우다를 만나 새로운 길을 떠나는 나왈의 여정, 또한 어머니를 찾기 위한 니하드의 긴 여행 등 여러 개의 여행들이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되어 얽혀 들어간다. 이 모든 여행들은 각기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극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여행은 역시 쌍둥이 잔느와 시몽이 어머니의 과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죽 그곳에서 살아왔다고 믿어온 잔느와 시몽이 어머니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면서 만나게 된 진실, 즉 그들이 실은 레바논 남부의 감옥에서 태어나 남의 손에 길러지다가 나중에야 어머니 나왈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는 동시에, 중동계 캐나다인으로서 잔느와 시몽이 마주하는 문화적 정체성,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진다. 즉, 이름도 모르는 아버지와 형을 찾아 떠난 쌍둥이의 여행은 어머니의 삶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고, 이것이 마지막에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마주하는 여정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극중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잔느와 시몽이 자신들의 원래 이름인 자나안과 사르완이라는 중동식 이름으로 불릴 때, 비로소 이들은 중동의 역사와 문화에 뿌리를 둔 레바논계 캐나다인으로서 문화적 주체성을 갖게 된다. 실제로 레바논계 캐나다 이민자로서 다중 정체성을 지닌 작가 와즈디 무아와드는 이들 쌍둥이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길고 험난한 여행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마주한다는 것 역시 진실을 알게 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힘든 일임을, 그러나 그만큼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임을 분명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올림픽공원 K-아트홀에서 공연되어 호평을 받은 연극 <그을린 사랑>(연출 신유청)의 공연 장면. 왼쪽부터 대리인으로부터 어머니 나왈의 유언을 전해 듣고 있는 잔느와 시몽, 저항운동을 하던 시절의 나왈, 그리고 진실과 자신들의 정체성을 마주하게 되는 잔느와 시몽. (사진제공 마크923)

글. 김주연(연극평론가)

필자 김주연은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고, 월간 <객석>에서 연극 담당 기자로 활동하면서 『우리 시대의 극작가』(공저)를 출간했다. 연극학으로 박사 학위를 마친 뒤 현재 연극평론가와 드라마터그, 그리고 연극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명작으로 읽는 세계연극’ 시리즈는 세계 연극사에서 손꼽히는 희곡들을 국가별로 한 편씩 골라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 작가가 희곡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각해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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