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클로드 드뷔시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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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로 읽는 음악사 ⑨
클로드 드뷔시
프랑스 파리의 가을. 클로드 드뷔시는 파리 근교 생제르망앙레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이었지만 드뷔시는 피아노 배우는 것을 좋아했고, 열 살 때 재능을 인정받아 파리음악원에 입학하게 된다. 이후 피아노에서 작곡으로 관심을 옮겨 꾸준히 도전한 끝에 지금은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음악에 의한 구원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와이 슌지 감독)의 제목에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다. 클로드 드뷔시. 실제로 영화에는 드뷔시의 피아노곡이 적지 않게 흘러나온다. 알게 모르게 흐르는 「달빛」도 그렇고, 「아라베스크 1번」은 영화의 중심이라 해도 될 정도로 꾸준히 연주된다. 영화도 알고 있는 것이다. 릴리 슈슈가 누구인지를. 아, 정확히 말하면 릴리, 슈슈다. 릴리와 슈슈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클로드 드뷔시라는 사람과 너무나 강렬하게 연결되어 있다. 물론 릴리도, 슈슈도 클로드 드뷔시를 잘 안다. 한때 그들 각자에게도 클로드 드뷔시라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클로드 드뷔시 「아라베스크 1번」 (스타니슬라프 부닌 연주)

 

릴리, 그리고 슈슈를 알기 전까지 클로드 드뷔시는 그만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1862년에 태어난 드뷔시는 천재라 불릴 만한 재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음악적인 인간이었다. 열 살 나이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해서 그 유명한 로마대상(Grand Prix de Rome)도 받았다. 글재주도 없지 않아 평론 일도 적지 않게 했다. 본업인 작곡에서도 자신만의 무언가를 서서히 무르익히는 사람이었다. 이쯤 되면 누가 봐도 나쁘지 않은 삶일 것이다.

그러나 클로드 드뷔시는 그런 상황들과, 그런 자신이 그저 그렇게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진짜 자기 자신을 찾고 싶었지만 잘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으니까. 그러니 음악이라는 대상에게도 고분고분할 수가 없었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잡아먹을 듯이 건반을 두드렸고, 고리타분한 화성학에는 올바른 답을 적어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인정하기 싫은 인간을 속절없이 인정하는 현실도 괴로웠다. 수많은 프랑스 음악가들이 리하르트 바그너를 찬양할 때 드뷔시도 거기 있었다. 굴복은 아니지만 이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괴로운 시절이 길었다. 그러니 결심이 필요했다. 바그너의 꽁무니를 좇는 건 이제 그만하자. 대신 그 누구보다 부드러운 음악가가 되자. 폭력적이고 극적인 요소들과는 멀어지자. 자연을 보고 그 살랑거리는 듯한 순간을 음악으로 잡아내보자. 어느 순간 드뷔시는 파도의 넘실거림과 달의 빛깔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작곡가가 되어 있었다. 음악가 드뷔시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구원했다.

 

드뷔시 「달빛」 (조성진 연주)

드뷔시의 사랑법

그래도 구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인간 드뷔시로서의 삶이었다. 특히 여성과의 관계는 언제나 문제였다. 두 번의 결혼에 그친 것이 실로 다행이라 할 정도로 그의 삶은 제멋대로 흘러갔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한때 젊은 드뷔시는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 집안의 음악 가정교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 차이콥스키의 후원자였던 그 폰 메크 부인 말이다. 거기서 드뷔시는 자신보다 다섯 살 어린 폰 메크 부인의 딸, 소피아에게 고백했다가 관계가 서먹해진 경험이 있었다. 뭐 이정도야, 청춘의 부끄러운 순간 정도로 기억해도 되겠지.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드뷔시는 소프라노 가수와의 연애에서 시작해 유부녀를 만나고, 누군가와 동거를 하면서도 다른 여자를 만나고, 이것을 불규칙하게 반복한다. 충동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그의 사랑법은 언제나 관계를 끝으로 몰고 간 다음에야 끝이 났다. 이런 삶을 바그너 음악 같다고 할까? 아무튼 드뷔시의 음악에는 없는 폭력이 드뷔시의 삶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결혼도 늦었다. 드뷔시의 첫 번째 결혼은 1899년에 있었다. 그 해, 드뷔시는 로잘리 텍시에와 결혼했다. 로잘리 텍시에, ‘릴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이 여성은 모델이었고 드뷔시보다는 열한 살이나 어렸다. 그리고 드뷔시의 전 애인이었던 가비의 친구이기도 했다. 사실 가비는 한 가지 조언을 릴리에게 해준 적이 있다. 드뷔시라는 인간은 여자라면 정신을 못 차리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릴리에게는 통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드뷔시도 한몫 보탰다. 불안증세로 떨면서 자신과 결혼해주지 않는다면 죽어버릴 거라고 추태를 부린 것이다. 릴리는 이 불쌍한 남자를 거둬서 함께 살기로 한다.

릴리는 조금 직설적이긴 해도 기본적으로 애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특히 드뷔시의 친구들이 좋아했다. 무뚝뚝한 친구 옆에 화사하게 웃는 사람이 생겼다. 그러니 드뷔시의 친구들도 릴리를 좋아할 수밖에. 드뷔시도 그런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좋은 기분이 작품에 담겼다. 혼인 이후 드뷔시는 3악장 구성의 오케스트라 작품 「녹턴」을 완성한다. 미국의 화가 제임스 휘슬러의 그림 「녹턴」을 보고, 자신도 음악으로 그와 비슷한 풍경을 그려낸 것이 1899년의 일이었다. 드뷔시의 「녹턴」은 총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드뷔시는 그 중 마지막 악장인 ‘사이렌’을 결혼의 증표로 삼았다.

 

드뷔시 「녹턴」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연주, 미코 프랑크 지휘)

세상 유일한 딸, 슈슈

그리고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감정이 든다. 언제부턴가 드뷔시는 로잘리 텍시에가 싫다는 이유를 수도 없이 만들어낼 수 있었다. 대화도 잘 통하지 않는데다가 예술가의 아내로서는 실로 낙제점이라 할 만한 현저하게 낮은 감수성도 드뷔시로서는 불만족스러웠다. 남편은 음악의 세계에서 위대한 무언가를 건져 올리고 있건만 아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게다가 부부에게는 돈도 없었다. 드뷔시는 지인에게 자신의 아내를 ‘가난한 아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자신의 가난도, 아내의 가난도 모두 부부 공동의 가난이었을 테지만 드뷔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가난까지 아내에게 몰아주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은 이제 온 데 간 데 없었다. 드뷔시는 다시 예의 자신으로 돌아갈 터였다. 물론 그냥 끝낼 생각은 없었다. 어딘가로 옮겨가야 할 대상이 필요했으니까.

드뷔시가 엠마 바르닥을 처음 본 건 1903년 말이었다. 엠마는 드뷔시의 제자 라울 바르닥의 어머니였다. 또한 소프라노였다. 음악의 세계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가브리엘 포레 같은 사람이 그녀를 좋아한 것도 이해가 간다. 포레는 엠마를 어찌나 좋아했는지 그녀를 위해 「좋은 노래」라는 연가곡집을 써서 바치기도 했다. 심지어 엠마의 딸인 엘렌을 귀여워해 「돌리 모음곡」이라는 피아노 모음곡을 써준 적도 있을 정도이다. ‘돌리’는 엘렌의 애칭이었다.

아무튼 구제불능의 탕아가 이렇게 다시 임자를 만났다. 유부녀였던 엠마는 이혼절차를 밟았고, 드뷔시도 아내 릴리에게 일방적으로 관계가 끝났음을 편지로 알린다. 릴리는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미수에 그친다. 드뷔시의 친구였던 작곡가 폴 뒤카와 앙드레 메사제는 드뷔시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토록 다정하던 사람이 미쳐가고 있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드뷔시에게 실망한 친구들이 돈을 십시일반 모아 그녀의 불행을 달랬다.

옛 친구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드뷔시와는 이제 상관없는 일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슬프기도 했지만 어쩌면 오랜 바람이 이렇게 이루어져서 내심 기뻤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드뷔시는 작곡가 에르네스트 쇼숑에게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다.

“예술가는 항상 죽은 다음에만 그 쓸모를 인정받게 되는 존재이지요. 그러니 예술가는 생전에 동시대인들과 절대 어울리지 않는 편이 나을 겁니다.”

옛 친구들, 그러니까 드뷔시에게는 필요 없는 동시대인들은 이렇게 떨어져나갔다. 그렇게 릴리가 가고 슈슈가 왔다. 클로드 드뷔시와 엠마 바르닥 사이에서 딸 클로드 엠마 드뷔시(Claude-Emma Debussy)가 태어났다. 슈슈, 이 아이는 오랫동안 ‘슈슈’라는 애칭으로 불릴 것이다. 그 누구보다 차가운 사람도 혈육에게는 따뜻할 수 있었다. 딸을 위해 피아노곡을 썼다. 포레는 피도 안 섞인 남의 자식을 위해 곡을 써주었지만 자신은 다르다. 슈슈는 내 아이, 그것도 세상 유일한 내 딸이다.

 

드뷔시 「어린이 차지」 (알렝 플라네 연주)

슈슈를 위한 선물

드뷔시의 「어린이 차지」는 겉보기에는 어린이를 위한 작품이지만 실은 어른을 위한 동화에 가까운 작품이다. 아빠 드뷔시가 지루한 피아노 연습곡에 유머를 넣어 연주해주고, 자장가도 불러준다. 딸이 좋아하는 인형 이야기도 해줘야지. 눈으로 새하얗게 변한 풍경도 그려준다. 양치기 이야기도 있단다. 그리고 마지막은 신나는 춤곡으로 마무리! 드뷔시는 이런 짧은 동화와 같은 곡을 여섯 편 만들어 딸 슈슈에게 선물했다.

드뷔시는 행복했다. 두 번째 결혼과 함께 전에 없던 안정을 찾은 데다가 젊은 시절 자신이 바그너에 대한 존경과 질투를 품었던 것처럼, 어느새 드뷔시도 그런 추종자를 거느리는 작곡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누가 드뷔시 아니랄까봐, 이런 팬덤에 그는 냉소적으로 반응했지만 속으로는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별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의 모습도 보며 드뷔시는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일러스트레이션·봄례

1915년의 어느 날, 드뷔시는 딸 슈슈와 함께 풀밭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드뷔시가 사진을 본다. 둘은 알 듯 모를 듯한 관계다. 드뷔시는 거의 할아버지에 가까운 얼굴이고 슈슈는 그의 손녀처럼 보인다. 거리감도 있어 보인다. 햇빛이 강해서인지, 아니면 낯가림 심한 아버지와 같이 있는 것이 어색해서인지 딸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다. 그래도 마냥 싫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 옆을 드뷔시가 멋쩍은 듯 채우고 있다. 아빠의 뾰로통한 얼굴이 젊은 시절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 사진은 드뷔시가 죽기 3년 전에 찍은 사진이다. 사실 드뷔시는 이때부터 몸이 아파 제대로 작곡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여섯 곡을 완성하겠다고 호기롭게 시작한 소나타 시리즈는 세 작품을 완성하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1918년, 드뷔시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1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아직 그치지 않았을 때 맞이한 죽음은 비극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은 죽음이기도 했다. 딸 슈슈가 드뷔시가 죽은 다음 해인 1919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사인은 디프테리아. 슈슈에게는 너무나 빠른 세상과의 이별이었다. 작곡가의 아내이자 슈슈의 엄마였던 이의 기분은 어땠을까? 망자가 그토록 소망했을 삶은 어쩌면 그녀에게는 영겁과 같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엠마 바르닥은 1934년에 세상을 떠났다.

1915년 프랑스 아르카숑 근처에서 드뷔시와 그의 딸 슈슈 (출처 : www.spectator.co.uk)

글. 윤무진(음악칼럼니스트)

필자 윤무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음악학을, 전문사에서 음악사를 공부했다. 유니버설, 워너, 소니뮤직 등과 함께 클래식 음악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일을 해오고 있으며, 음악을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다.
‘가족사로 읽는 음악사’는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생애를 그들의 ‘가족’을 통해 들여다보며,
클래식에 관한 교양지식은 물론 작곡가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시선을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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