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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로 읽는 음악사 ⑩
구스타프 말러
파리 오페라극장,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과 함께 세계 3대 오페라극장 중 하나로 손꼽히는 오스트리아의 빈 국립 오페라극장.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이 이 극장 소속이며, 구스타프 말러를 비롯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로린 마젤, 클라우디오 아바도 등 거장들이 음악감독을 역임한 것으로 유명하다.

작곡 노동자,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말러의 1년은 고된 노동으로 가득하다. 어린 말러가 사회적인 성공이라는 개념을 인식했을 때부터 시작된 노동이었으니 꽤 역사가 깊다 하겠다. 물론 구스타프 말러는 불평을 모른다. 모든 행위가 본인이 원하는 바였으니까. 그리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바에야 무언가를 하는 게 편했다. 누군가 그에게 쉬라고 말한다면 말러는 쉬는 법을 몰라 괴로워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하루도 그랬다. 슈타인바흐 암 아터제의 어느 오두막, 자신이 ‘작곡가의 오두막’이라고 이름 붙인 이곳에서 말러는 여름휴가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남들처럼 그저 쉼에 열중하는 휴가는 아니다. 분명 휴가 중인 말러의 하루는 아침 6시에 시작된다. 아침 식사는 오전 7시에 배달될 것이다. 그 전까지는 잠으로 지친 뇌를 깨우며 하루를 준비하자. 아침 배를 채우고 난 뒤에는 작곡에 집중할 것이다. 점심식사가 예정되어 있는 정오까지 말러는 작곡에 뛰어든다.

그 어느 곳보다 평온하고 한적한 이곳에서, 그는 거의 우주를 설명할 기세로 작곡에 몰두한다. 점심식사를 마친 이후에도 쉬는 법이 없다. 날이 좋기라도 하면 산책을 나갈 것이다. 수영도 나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분명한 목적성을 가지고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행위를, 또 그렇게 사는 사람을 구스타프 말러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 해 여름도 다르지 않아 말러는 그 누구보다 밀도 있는 여름휴가를 보냈다. 여기 이 두툼한 교향곡을 보라. 그의 노력과 열정의 결과 교향곡 2번 ‘부활’이 여기 있다. 1888년에 시작한 이 작품을 말러는 이곳 오두막에서 1894년에 완성했다. 교향곡 작곡은 절대적인 집중과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로 한다. 어떤 교향곡은 2년 안에 끝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이 더 많았다. 극장으로 돌아가 지휘자로 일할 때는 작곡에 힘을 쏟을 여유가 없다. 말러는 다시 한 번 시간의 유한함을 생각하며 도시로 돌아간다.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지휘_마리스 얀손스)

빈이 가져다준 명성, 그리고 결혼

구스타프 말러는 1860년생이다. 성인 말러가 갓 태어난 자신을 봤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태생부터 달갑지 않은 차별을 달고 태어났다. 지금의 체코 지역이자 당시로서는 변방이었던 이글라우의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나 살았다. 변방의 보헤미안, 그리고 유대인. 물론 극복 불가능한 문제는 아니었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의 역사에서 선배들이 애써 버텨왔던 것처럼 말러 자신도 실력으로 존재를 증명하면 됐다.

말러는 빈 음악원에 진학했고 좋은 성적을 거두고 졸업했다. 정착을 위한 지독한 몸부림이 그때부터 시작된다. 말러는 지방 여기저기를 전전했다. 린츠 근교에 위치한 바트 할의 작은 극장을 시작으로, 지금의 류블랴나인 라이바흐의 주립극장에서는 여러 오페라를 지휘하며 적지 않게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올뮈츠라는 도시를 들어보셨는지? 말러는 거기서도 잠깐 머물렀다. 그리고는 카셀로 넘어갔고 이후에는 프라하, 또 라이프치히와 부다페스트. 도시의 명성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구스타프 말러는 자신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올릴 수 있는 곳으로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1891년에 자리 잡은 함부르크에서는 1897년까지 있었다. 함부르크는 지금도 큰 도시이지만 말러의 시대에도 영향력 있는 도시였다. 그곳 극장에서 몇 년을 일하고 나자 말러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지휘자가 되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휴가도 알뜰하게 보내면서 작곡가로서의 자신도 몸에 새긴 상태였다. ‘작곡가의 오두막’에서의 마지막 작품은 교향곡 3번이었다. 이 지독하게 긴 작품을 말러는 이곳의 자연을 위해 썼다.

 

말러 교향곡 3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_레너드 번스타인)

 

그렇게 세상과 싸워 정착한 도시가 바로 빈이었다. 말러는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빈이 익숙했다. 그러나 어디든 그렇듯, 그리고 경쟁이 심한 곳이면 사정은 비슷하다. 학생에게는 자애로운 도시였을 빈이지만 일자리를 찾으러 온 이에게는 상냥하고픈 생각이 없다. 일례로 빈 국립 오페라극장은 기독교도에게만 일자리를 나누어줬다. 종교로 차별 받는 것은 부당한 일인 것이 분명했으나 그렇다고 항의만 하고 세월을 보낼 수는 없었다. 개혁은 후대에 맡기고 지금을 사는 자신은 일단 그 사회에 편승하기로 한다. 말러는 마음 편히 개종했다.

빈은 인생의 목표였다. 결코 다른 도시들처럼 거쳐 가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삶을 잘 가꾸어야지. 먼저 말러는 빈 건축계의 거물인 오토 바그너가 설계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 다음에는 휴양지를 물색해 마이에르니히를 앞으로의 여름 휴가지로 결정했다. 뵈르터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말러는 집을 지었다. 물론 작곡을 위한 공간도 마련했다. 이제 말러의 삶은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말러 교향곡 5번 (평화를 위한 세계 오케스트라, 지휘_발레리 게르기예프)

 

만약 이런 삶을 계속 가꿔 나갈 수 있었더라면, 말러의 인생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말러는 자신을 완벽에 가깝게 통제하는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다는 말도 많았지만 어찌 되었든 작품의 밀도도 높았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그것도 스무 살이나 어린 알마 쉰들러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알마 쉰들러는 빈 사교계의 유명인이었는데, 이렇게만 말한다면 제대로 설명이 안 되겠지.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문제 있는 자신조차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구스타프 말러는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해보겠다고 언제나 싸우는 사람이었다. 만약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말러는 그 관계와 영원히 마주하지 않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렇게도 다른 둘이 이제 결혼을 한단다. 겉과 속이 모두 요란한 그녀가 왜 말러를 좋아했을까? 또 왜 말러는 그런 알마를 좋아했을까?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해보았으나 이해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1902년, 두 사람은 결혼한다.

돌파구를 찾아 미국으로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사람들은 구스타프 말러가 알마와 결혼해서 신세를 다소 망쳤다고 말한다. 무릇 사람의 기질이라는 것은 제도를 가볍게 초월하기 마련이고, 말러는 그런 상황에 속수무책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알마에게도 할 말은 있다. 알마 말러는 “아침마다 말러의 식사를 차려주는 것이 고역이었다”고 고백한다. 이 한 문장에는 여러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다.

말러는 알마를 사랑했지만 그 마음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분명한 사랑의 모양이 있었고, 그 범위를 넘어서는 예외는 견딜 수 없었다. 일례로 남편은 아내가 이전까지 해오던 작곡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아내의 미약한 재능까지 다독일만한 여유가 없었던 말러로서는 당연한 소리를 한 것이었다. 여름 휴가철이 되어 온 가족이 말러의 ‘작곡 휴양지’로 이동할 때 행복한 사람은 구스타프 말러밖에 없었을 것이다. 개인의 감정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고 말러는 타인을 위해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그러면서도 아내가 아내의 몫을 하기를 바랐다.

그런 부부였고 그런 가정이었기에 문제가 생기면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빈 생활 10년차에 접어든 1907년, 그러니까 결혼 6년차에 시험지가 도착했다. 말러 개인은 그 누구보다 성실했고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인간 구스타프 말러는 사람의 호의를 사는 성격이 아니었다. 말러가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를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은 취임 초기부터 언제나 있어 왔고, 1907년에는 그 세력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가 되었다. 설상가상, 문제는 직장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1902년에 태어난 첫 딸 마리아가 성홍열로 세상을 떠났다.

일러스트레이션·봄례

말러는 결정을 해야만 했다.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에게는 진심으로 변화가 필요했다. 그런 마음이 어느새 행동으로 이어졌는지 말러는 가족들과 함께 빈 기차역에 있었다. 빈을 떠나 뉴욕으로 간단다. 친하게 지냈던 미술가 집단인 빈 분리파 회원들도 나와 주었다. 배웅 나온 또 다른 구스타프, 구스타프 클림트가 찬연하게 빛나는 그의 황금빛 그림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말러의 가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말러의 불행을 묵묵하게 지켜볼 때 그의 가족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말러 교향곡 7번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지휘_클라우디오 아바도)

사랑도, 일도 그를 놓아버리다

그래도 유럽 최고의 지휘자였으니 구스타프 말러는 꽤 좋은 조건을 제안 받고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섰다. 그런데 웬걸. 이제는 보수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의 작업량은 그야말로 인간 말러를 말려 죽이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당시만 해도 지휘자라는 직업은 새롭게 생겨난 직종이었기에 그 누구도 지휘자들의 업무강도에 대해 말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말러가 그렇게 노동으로 거의 익사하고 있을 때, 젊은 시절 누렸던 자유를 언제나 그리워 하던 알마는 딸을 잃은 슬픔을 그 위에 얹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알마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누가 봐도 이상한, 사이좋은 관계가 되어 있었다. 말러를 더욱 경악케 했던 것은 이 그로피우스라는 젊은이의 의리라면 의리, 패기라면 패기였다. 그로피우스는 ‘남자 대 남자’로 직접 이야기를 나누겠다며 말러의 별장에 찾아왔다.

구스타프 말러, 발터 그로피우스, 그리고 알마 말러. 만약 잘못이라는 것을 나눠 가질 수 있다면 거기 있는 셋 모두 그걸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괴로움은 온전히 저마다의 몫으로 남는다. 젊은 건축가와 얼굴을 마주한 구스타프 말러는 괴로웠다. 그건 분명히 ‘교향곡을 완성하지 못했다’라는 자책보다도 더욱 심하게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를 만났던 1910년의 여름, 말러는 교향곡 10번을 쓰고 있었고 그 작품은 완성되지 못한 채 세상에 남았다.

 

말러 교향곡 10번 1악장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_레너드 번스타인)

 

알마 말러는 구스타프 말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차라리 매몰차게 떠나가는 것이 나았을까? 옆에 있어도 있는 것 같지 않은 사람 옆에서 말러는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고, 가정이 무너지고, 일은 그런 가장을 놓아주지 않는 현실을 말러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삶의 의지가 충분함에 그는 놀란다. 심장병이 그를 찾아 왔을 때도,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말러는 여전히 노동하고 싶었고, 또 고민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단다. 1911년 5월 18일에 말러는 노동으로부터 원치 않게 해방되었다. 그 다음날에는 하늘이 한참을 울었다고 하는데, 그건 어쩌면 예술가 말러를 애도함이 아닌 노동자 말러를 위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빈 국립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던 1907년 사진작가 모리츠 네어가 촬영한 말러의 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글. 윤무진(음악칼럼니스트)

필자 윤무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음악학을, 전문사에서 음악사를 공부했다. 유니버설, 워너, 소니뮤직 등과 함께 클래식 음악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일을 해오고 있으며, 음악을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다.
‘가족사로 읽는 음악사’는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생애를 그들의 ‘가족’을 통해 들여다보며,
클래식에 관한 교양지식은 물론 작곡가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시선을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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