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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로 읽는 음악사 ⑪
장 시벨리우스
핀란드 야르벤파(Järvenpää)에 위치한 ‘아이놀라’의 전경. 장 시벨리우스가 말년까지 살았으며, 지금은 시벨리우스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집은 시벨리우스의 아내 ‘아이노’의 이름을 따서 아이놀라(ainola)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 WIKIMEDIA COMMONS, 촬영자 : Tuomas Vitikainen)

음악이 떠나가는 공포 속에서

장 시벨리우스는 영웅이었다. ‘음악의 영웅’ 뭐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영웅. 100여 년 동안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고국 핀란드를 장 시벨리우스는 음악으로 위로하고 또 북돋았다. 무엇보다 그의 음악은 핀란드를 닮았다.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의 땅을 밟고 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작곡할 수 없는 음악. 그런 음악을 시벨리우스는 썼고, 그 소리를 세상에 뻗어 나가게 했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은 1900년, 파리 대박람회에서의 공연이었다. 그곳에서 시벨리우스는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다. 교향시 「핀란디아」는 광활한 산림이 한 목소리로 함성을 지르며 시작한다. 그것은 단순한 숲의 목소리가 아니다. 나무 하나하나가 그 뿌리부터 소리를 내질러 하나의 함성을 만든다. 그리고 함성은 이내 건강한 축제의 모습으로 변한다.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사카리 오라모 지휘)

 

시벨리우스의 명성은 핀란드를 넘어 파리를 거쳤고 서서히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1917년,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을 때 이 작곡가의 명성은 한 차례 더 올라갔다. 1920년대에는 영국과 미국에서 환대받았다. 교향곡이 독일과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들의 전유물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장 시벨리우스는 그의 교향곡과 함께 20세기의 베토벤이 되었다. 그와 함께 문화적으로도 별 볼일 없는 변방 국가였던 핀란드는 어깨를 조금이나마 펼 수 있었다.

 

시벨리우스 「투오넬라의 백조」 (핀란드 라디오 방송 교향악단, 에사 페카 살로넨 지휘)

 

그랬던 사람이 1930년대가 되자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1865년에 태어났으니 그때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그래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고도 남을 나이다. 하지만 시벨리우스는 그 누군가가 아니었다. 그는 그냥 건강했다. 그러니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많은 이들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시벨리우스는 알고 있었다. 인생의 성공과 그로 인한 즐거움은 결국 슬픔으로 수렴한다. 그렇게 생긴 슬픔은 때때로 공포를 동반한다.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공포는 좀처럼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모든 예술가가 그렇듯이 시벨리우스도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것밖에 쓸 수 없는 작곡가였다. 「핀란디아」가 세상을 향한 시벨리우스의 공공연한 외침이었다면, 1904년에 완성한 「슬픈 왈츠」는 시벨리우스의 내면 가까운 곳에 붙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 시벨리우스는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운 춤을 추다가 영원한 공포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시벨리우스 「슬픈 왈츠」 (쾰른 서독일 방송 교향악단, 유카 페카 사라스테 지휘)

음악을 위해 새로 지은 집

1903년의 가을, 30대 후반의 시벨리우스는 헬싱키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혼자서는 지독히도 우울했던 이 작곡가의 유일한 행복은 친구들과 함께 마시는 술이었다. 정말이지 시간만 나면 마시는 술이었고, 어느 순간에 이르자 더는 그렇게는 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정을 도와준 것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었다. 시벨리우스와 그의 아내 아이노는 헬싱키 인근의 도시 야르벤파로 갔다. 그리고 투술라 호수가 보이는 어느 땅을 밟아 나갔다. 시벨리우스 부부는 그곳에 집을 짓기로 한다. 설계자는 훗날 위대한 건축가가 될, 그러나 당시에는 젊었던 건축가 라르스 손크였다. 갑자기 건축주가 된 시벨리우스는 손크에게 두 가지 부탁을 한다. 하나는 작업실의 창문으로 투술라 호수가 보이게 해달라는 것, 그리고 벽난로의 색깔은 녹색으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시벨리우스 가족은 새로운 집에 들어왔다. 집에 이름도 지어주었다. 아이놀라. 시벨리우스의 아내 이름 ‘아이노’에서 가지고 왔다. ‘아이노의 집’이라는 뜻이었다. 아이놀라의 유일한 단점은 수도시설이 없었다는 점인데 그건 시벨리우스 때문이었다. 이 작곡가는 수도시설에서 나는 소음으로 고통 받기를 원치 않았다. 한 사람의 불편함을 가족 전체가 짊어진 것이다.

가족 전체가 공유해야 할 불편은 하나 또 있었다. 그건 바로 가장 시벨리우스의 우울이었다. 이 가장은 아이놀라에 들어와서도 도시생활을 생각했고, 그곳의 친구들을 그리워했다. 그런 남편을 보며 외로울 법도 했지만, 아이노 시벨리우스는 심지가 곧은 사람이었다. 장군의 딸이었던 그녀는 사사로운 감정에 젖는 법이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몸을 움직여야 한다. 어느새 아이노는 정원 가꾸기에 열중하고 있는 자신을 봤다. 그녀는 정말이지 열과 성을 다해서 정원을 가꾸었다.

아이노 시벨리우스는 자녀 교육에도 철저한 사람이었다. 이곳 아이놀라에 들어왔을 때, 시벨리우스 부부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장녀 에바와 차녀 루트,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삼녀 카타리나. 아이노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대신 집에서 가르쳤다. 보통의 의지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니, 그곳에 가정교사로 왔던 한 시인이 아이들 어머니의 엄격함에 혀를 내두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러스트레이션·봄례

음악을 집어삼킨 초록색 벽난로

가정이 행복했을 때도 있었다. 그건 온전히 시벨리우스의 병 때문이었다. 1908년, 후두암 진단을 받은 시벨리우스는 수술을 받는다. 그리고 생명을 지키기 위한 금주가 꽤 오랫동안 이어졌고, 그때가 아이노에게는 행복한 시절이었다. 1908년에는 네 번째 딸 마가레타가 태어났고, 1911년에는 다섯 번째 딸 하이디가 태어났다.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아이놀라의 증축까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15년이 되자, 즉 술을 다시 마실 수 있는 시간이 되자 시벨리우스는 예의 술꾼으로 돌아가 심심하면 자기 마음을 향해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되었다. 시벨리우스 가정에는 늘상 있는 일이었지만 교향곡 7번을 완성한 1924년 이후에는 변덕이 더욱 심해졌다. 단악장 구성의 이 짧은 교향곡에서 시벨리우스는 자신이 갈고 다듬었던 작곡가로서의 역량을 모두 쏟아 부었다.

 

시벨리우스 교향곡 7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

 

그리고는 교향곡 8번으로 넘어가야 했는데, 시벨리우스는 도저히 작품을 쓸 수가 없었다. 스케치는 지지부진했지만 작곡가는 이 작품을 완성해 보이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었고 주변은 그의 말에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에서 그의 작품을 기다리고 있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가 그랬다. 주변의 기대가 커지면 커질수록 내면의 불안 또한 증폭된다. 그리고 불안의 모습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시벨리우스를 찾아왔다. 아내 아이노는 시벨리우스의 가장 화려한 행패를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1940년의 어느 날 아이놀라에서는 굉장한 화형식이 있었다. 남편은 빨래 바구니에 악보 원고를 수없이 담아 나와 거실 벽난로에서 태웠다. 「카펠리아 모음곡」의 일부와 그밖에 많은 작품들도 없어졌다. 나중에 나는 찢어진 악보의 일부를 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을 기력이 없어서 방을 나갔다. 그래서 그가 불에다 무얼 던져 넣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리고 난 다음 남편은 침착해지고 기분이 더 밝아졌다.”

알렉스 로스 , <나머지는 소음이다>, 김병화 옮김, 21세기북스.

시벨리우스가 좋아했던 초록색 벽난로가 그의 악보를 물고 벌겋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시벨리우스 교향곡 8번은 완성되지 못했다.

명이 긴 작곡가의 넋두리

사실 시벨리우스의 불안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예민한 사람이었고 그랬기에 작품에 대한 비판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미 세계적인 작곡가로 평가 받던 시절에도 시벨리우스는 자기 자신이 견딜 수가 없었다.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자신은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쇤베르크의 제자들이 주류라고 주장하던 시대에 한물 가버린 고전 취급받는 상황에서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930년 이후 시벨리우스는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 그럼 이 작곡가는 그 뒤의 삶을 어떻게 보냈을까? 종종 시벨리우스는 ‘예술가는 일찍 죽어서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곤 했지만 이 아이놀라의 가장은 명이 길어 넋두리밖에 할 수 없었다.

시벨리우스는 애써 부인하겠지만 어쩌면 예술가로서의 시벨리우스는 1930년대 들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인간 시벨리우스는 죽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건 전적으로 아내의 헌신과 그가 꾸린 가정 덕분일 것이다. 1930년대가 되었을 때 그의 딸 다섯은 모두 독립해 새로운 가정을 꾸려 아이놀라를 떠났음에도 외롭지는 않았다. 시벨리우스는 비록 자주 우울해지는 사람이었으나 신체만큼은 건강했고, 아내는 몸과 마음 모두를 잘 챙기는 아내였다. 조금이라도 외롭다고 느낄 때는 손주들이 휴가철에 찾아와 아이놀라를 떠들썩하게 해주었다. 작곡가로서는 다소 쓸쓸한 말년일지 몰라도 가장으로서는 이보다 행복한 가정이 없었다.

시벨리우스의 아이놀라 생활은 1957년 여름에 끝났다. 아흔 살 넘도록 이어진 기나긴 생이었다. 부인과 딸들은 밖에서는 위대한 음악가였지만 집에서는 철부지였던 늙은 아버지를 아이놀라의 정원에 묻었다. 시벨리우스의 사후에도 그의 아내 아이노는 아이놀라를 떠나지 않았다. 아이노 시벨리우스는 남편의 죽음 이후 12년을 이곳에서 더 살고 세상을 떠났다. 시벨리우스의 딸들은 1972년, 아이놀라를 매각하기로 하고, 핀란드 정부가 시벨리우스 가문의 역사를 샀다. 1974년, 아이놀라는 시벨리우스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셋째 딸 카타리나가 박물관이 된 아이놀라의 안내를 담당하고 있었다.

1923년경 헨리 B. 굿윈이 촬영한 장 시벨리우스의 모습 (출처 : WIKIMEDIA COMMONS)

글. 윤무진(음악칼럼니스트)

필자 윤무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음악학을, 전문사에서 음악사를 공부했다. 유니버설, 워너, 소니뮤직 등과 함께 클래식 음악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일을 해오고 있으며, 음악을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다.
‘가족사로 읽는 음악사’는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생애를 그들의 ‘가족’을 통해 들여다보며,
클래식에 관한 교양지식은 물론 작곡가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시선을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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