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증언을 부정한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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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로 읽는 음악사 ⑫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태어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크류코프 운하를 따라 오른쪽으로 성 니콜라이 해군성당의 종탑이 보인다. 쇼스타코비치가 아직 10대이던 1924년, 레닌이 사망함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름은 레닌을 기리기 위해 ‘레닌그라드’로 바뀌었다. 쇼스타코비치가 1975년에 사망하고도 오랫동안 레닌그라드였던 이곳은 1991년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름을 되찾는다.

소련의 자랑스러운 인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예의 바른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것도 아주.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곳에 살면 다 그렇게 되는 법이다.”

사람들은 쇼스타코비치가 갖은 고초를 다 겪은 뒤에 결국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특히 소련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걸 좋아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풍기는 공통된 분위기가 있다. 그들은 소련을 말할 때 가벼운 연민 같은 걸 얹어 이야기한다. 그들은 소련 안에 있는 사람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안온함을 누린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외부인의 생각과는 달리, 소련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그들은 슬픔을 모른다. 그뿐이겠는가? 그들은 그 어떤 분노도, 절망도 드러내는 법이 없다. 물론 죽음을 앞당기고 싶은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마음껏 보여도 되겠지. 하지만 사람들은 미래가 없는 죽음보다는 궁색한 삶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자신에게 지독하게 엄격할 수 있다면 누구나 궁색하게, 또 떳떳하게 살 수 있음을 소련의 인민들은 오랫동안 증명해왔다. 쇼스타코비치 또한 그런 소련의 자랑스러운 인민이었고.

그런데 쇼스타코비치의 그 ‘예의바름’이 내부자들에게도 꽤나 예외적으로 보였나 보다. 당대의 거장이었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는 쇼스타코비치를 처음 봤을 때를 두고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차이코프스키가 우리를 방문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리히터는 자신의 스승인 피아니스트 겐리히 네이가우스와 쇼스타코비치의 일화를 언급한다.

알렉산드르 가우크가 어떤 교향곡인가를 신통치 않게 지휘하고 있던 연주회였다. 네이가우스가 몸을 기울여 쇼스타코비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내가 보기엔 이거 한심한 걸.” 그러자 쇼스타코비치는 네이가우스를 돌아보며, “맞아요, 겐리흐 구스타보비치. 멋지군요! 훌륭해요!” 네이가우스는 그가 자기 말을 잘못 알아들었음을 깨닫고 자신의 평을 다시 말했다. 그러자 쇼스타코비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 그래요, 정말이지 한심하군요, 한심해요!”

브뤼노 몽생종, 이세욱 옮김,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 정원, 2005년 중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면 슬퍼할 일도 없다. 젊은 드미트리는 자신감이 있었다. 1934년, 그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발표했었다.

 

쇼스타코비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모음곡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 카를로스 미구엘 프리에토 지휘)

 

만약 <므첸스크와 맥베스 부인>이 별 탈 없이 넘어갔더라면, 그 작품을 스탈린이 보지 않았더라면 쇼스타코비치의 시련은 조금 늦게 그를 찾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이 공연된 후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에서는 이 작품이 ‘반 소비에트적’이라고 결론지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작품이 왜 공격 받아야 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그 도저히 알 수 없음을 몸으로는 체득할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심각한 공격을 받게 되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므첸스크와 멕베스 부인> 사건에 쇼스타코비치는 절망했지만 다행히, 세상은 그를 버려두지는 않았다. 이후 운 좋게도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그 뒤에 발표하는 작품들과 함께 점차 살아날 수 있었다. 교향곡 5번은 그중에서도 꽤 좋은 평가를 받았다. 누군가는 이 작품을 듣고, 특히 이 곡의 4악장을 듣고 ‘쇼스타코비치가 소련의 인민으로 기능하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진실을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므첸스크와 맥베스 부인>이 그랬던 것처럼 교향곡 5번도 그저 음악일 뿐이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파리 오케스트라, 파보 예르비 지휘)

거의 허울뿐인 영광 속에서

자리를 얻으면서 한숨 돌릴 수 있다. 훈장을 받아도 사정이 좋아진단다. 소련에서의 훈장은 비단 명예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생명연장의 증표로 기능할 수 있다. 1946년, 쇼스타코비치는 드디어 레닌 훈장을 받는다. 그런데, 이 위대한 훈장을 받아도 공격이 끝나지 않는 것은 왜일까?

1948년이 시작하자마자 소련 작곡가 조합의 의장으로 취임한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쇼스타코비치를 걸고 넘어졌다. 즈다노프의 공격은 1948년 즈다노프의 사망으로 인해 멈췄지만, 공격을 받은 사람은 사실만으로도 고통 받아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학이 없는 성품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에게 비극이 되었다. 속으로라도 웃을 수 있었다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차갑게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상황이 조금 나았을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쇼스타코비치보다 열두 살 어린 소설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에게는 아주 지독한 유머가 있었다. 솔제니친의 소설 <수용소군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따따르인 마부 중 하나는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버텼다.

「금 같은 건 없소!」

그러나 그의 아내를 잡아들여 고문했다. 그래도 따따르인은 고집했다.

「금 같은 건 없소!」

이번엔 딸을 잡아들였다. 따따르인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0만 루블의 금화를 내놓았다. 결국 가족은 풀려나왔으나 그 자신은 형기를 받고 수용소군도로 끌려갔다.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 김학수 옮김, <수용소군도>, 열린책들, 2017년 중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점이 있다면 따따르인은 수용소에 갔고, 쇼스타코비치는 가지 않았다는 것. 대신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숱하게 봐야 했다. 그들은 죽지 않았다. 그냥 사라진 것이다. 그럼 사라지지 않고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했던 것일까? 그걸 쇼스타코비치는 알 수 없었다.

거의 허울뿐인 영광과, 거의 죽음에 가까운 굴욕이 차곡차곡 쌓였다. 많은 작곡가들이 쓸 수 없었던 교향곡 10번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쇼스타코비치는 성실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남은 교향곡 10번 이후에도 교향곡을 다섯 작품이나 더 쓸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 구스타보 두다멜 지휘)

 

1966년에는 그간의 고생을 보상 받을 수 있었다. 그해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가장 높은 등급의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을 받았다. 그도, 그의 남은 가족들도 이제 안전할 것이다. 이제 조용히, 그리고 모두가 인정하는 가운데 세상에서 사라질 일만 남았다. 1975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세상을 떠났다.

죽은 아버지의 증언

그로부터 약 4년 뒤인 1979년 9월 10일, 뉴욕타임스가 뜬금없이 죽은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을 입수했다는 기사를 낸다. 소련도 아니고 미국을 대표하는 언론의 기사였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레닌그라드 출신의 음악학자였던 솔로몬 볼코프는 생전의 쇼스타코비치를 몇 차례 만나 인터뷰를 가진 뒤 미국으로 망명했고, 쇼스타코비치와 나눈 대화를 정리해 책으로 내놓았다. 이름도 거창한 <증언>은 러시아어로 쓰였지만, 이를 처음 본 것은 미국인이었던 것이다. 그 누구보다 위대했던 소련의 영웅은 망령으로 돌아와 소련 체제를 부정하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물론 히틀러가 범죄자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지만 스탈린이라 해서 다를 것은 없다. 나는 히틀러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고통을 영원히 마음 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의 명령으로 살해된 사람들을 생각해도 그에 못지않게 고통스럽다.”

솔로몬 볼코프 엮음, 김병화 옮김, <증언>, 이론과실천, 2001년 중

쇼스타코비치의 아들 막심과 미망인이었던 이리나 또한 이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음악가로 그 누구보다 창창한 미래가 남아 있었던 아들 막심은 거의 절망했다. 아버지는 보통의 흔하디흔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소련의 ‘사회주의노력영웅’이었다.

이제, 남은 쇼스타코비치의 가족들은 ‘따따르인 마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선택과 결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소련 인민의 본능이었다. 그 본능에 따라 아들 막심은 책의 내용이 과장되었다고 ‘증언’했고, 쇼스타코비치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이리나는 증언록을 펴낸 솔로몬 볼코프를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무시했다. 이리나는 그렇게 죽은 남편의 증언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스탈린이 죽은 지 20년이 훌쩍 넘은 시점이었지만 ‘스탈린’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산 자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었다.

일러스트레이션·봄례

부정, 그리고 남겨진 고뇌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의 효험이었던 것일까? 죽은 아버지는 다행히 가족들에게 물리적인 해를 끼치지 않았다. 가족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상은 아들 막심에게 고뇌라는 숙제를 남겼다.

막심은 아버지에게 음악 선물을 받은 그 해를 선명히 기억한다. 1957년에 작곡된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아들 막심 쇼스타코비치에게 헌정된 작품. 아들은 이 작품을 자신의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연주회 때 초연했다. 모차르트 풍의 장난스러운 1악장과 3악장 사이에는 별처럼 아름다운 2악장이 숨겨져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숨겨두었다고 믿고 싶은, 그런 순간이 있다.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2번
(크리스티나 오르티스 피아노, 스위스 이탈리안 오케스트라, 루몬 감바 지휘)

 

바로잡아야 할 과거가 있다면, 만약 그런 것이 정말로 있다면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1991년이 되자 붉은 깃발이 내려왔다. 대신 얼굴이 시뻘건 보리스 옐친이 사람 좋게 웃고 있었을 때 아들은 조용히 아버지의 과거를, <증언>의 문장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기에 지금도 <증언> 속의 쇼스타코비치는 논란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은 아들 막심에게는 별 것 아닌 문제였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그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왔다. 아들은 아버지를 안다. 그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와의 그런 나날을, 그때의 자신을 부정한 후 나중에야 겨우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에게 아버지 드미트리는 어떤 존재였을까? 어쩌면 지금도 막심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에게 그렇게 묻고 있을지 모르겠다.

로저 & 레나테 뢰싱이 촬영한 1950년 7월 쇼스타코비치 (출처 : WIKIMEDIA COMMONS)

글. 윤무진(음악칼럼니스트)

필자 윤무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음악학을, 전문사에서 음악사를 공부했다. 유니버설, 워너, 소니뮤직 등과 함께 클래식 음악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일을 해오고 있으며, 음악을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다.
‘가족사로 읽는 음악사’는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생애를 그들의 ‘가족’을 통해 들여다보며,
클래식에 관한 교양지식은 물론 작곡가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시선을 담아낸 칼럼으로
이번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편이 마지막 연재입니다.
그동안 ‘가족사로 읽는 음악사’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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