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와 명작 스캔들

낭만에서 혁신까지 프렌치 모던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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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속 비밀과 클래식 음악 ①
단하우저 「피아노 앞의 리스트」

19세기 중반의 유명한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뛰어난 작곡 실력과 수려한 외모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예술가다. 오스트리아 화가 요제프 단하우저(1805~1845)가 그린 「피아노 앞의 리스트」(1840)는 그런 리스트의 삶과 함께 19세기 예술가들의 교류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누군가 클래식 대작곡가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몇 명이나 꼽을 수 있을까? 클래식 마니아가 아니라 하더라도 열 명 정도는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거명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생각해보라. 서유럽만 따져도 지난 수백 년간 수많은 음악원에서 해마다 수만 명의 작곡가 또는 작곡으로 선회할 수 있는 악기 전공자들이 배출되어 왔다. 그중 오늘날까지 위대한 작곡가로 기억되고 있는 이들은 몇 년에 한 명 정도뿐이지 않은가.

리스트 역시 많은 이들이 손꼽는 작곡가다. 「피아노 앞의 리스트」는 리스트 외에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대작곡가를 세 명이나 하나의 화폭에 담아냈다는 점이 특별하다. 그만큼 이 그림 안에는 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주인공보다 돋보이는 신 스틸러, 베토벤

그림의 주인공은 제목처럼 19세기 중반의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던 프란츠 리스트다. 하지만 작품에서 리스트 못지않게 시선을 끄는 것은 창가에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조각상이다. 리스트가 숭배하듯 바라보며 연주하고 있는 조각은 바로 베토벤의 흉상. 베토벤은 그림이 그려진 당시 세상을 떠난 후였지만 유럽 전역의 공연장에서 살아있을 때보다도 더 확고한 ‘원 톱’이 되어 있었다. 베토벤의 곡이 연주되지 않는 콘서트는 거의 없었고, 특히 청중들은 베토벤의 교향곡에 열광했다. 리스트도 베토벤에 열광했던 팬들 중 한 명이었다. 피아노 편곡자로서도 최고였던 리스트는 베토벤의 모든 교향곡을 피아노용으로 편곡했는데, 그림이 그려진 1840년까지 제5번, 제6번, 제7번의 편곡을 완료한 상태였다.

그림을 그린 화가 요제프 단하우저 역시 베토벤과 관계가 있었다. 베토벤을 존경했던 그는 1827년 3월 26일 악성의 서거 소식을 듣자마자 연락을 취해 승낙을 받고 망자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베토벤의 죽은 얼굴을 스케치로 남겼다. 그때 베토벤의 데스마스크를 뜬 사람도 단하우저다. 그림에서 리스트가 바라보는 베토벤 흉상도 단하우저의 작품일까? 그렇다는 설도 있고, 안톤 디트리히라는 다른 화가의 작품이라는 이견도 있다.

만인의 연인 리스트, 그가 사랑했던 여인

피아노 옆, 바닥에 비스듬히 앉아 리스트를 올려다보는 여인은 마리 다구 백작 부인(1805~1876)이다. 리스트를 예술가로서만 숭배한 것이 아니라 남성으로서 사랑하고 있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마리는 유부녀였고 자식도 있었다. 호칭에 붙어 있는 다구 백작이 그녀의 남편이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마리는 1833년 살롱 모임에서 6살 연하의 리스트를 만나자마자 호감을 느꼈고 1834년부터는 연인이 되어 사실상 동거에 들어간다. 리스트와 마리 모두와 친분이 있었던 프레데리크 쇼팽은 1833년 출판된 그 유명 작품 번호 10번의 연습곡 12곡을 리스트에게, 1837년 출판된 작품 번호 25번의 연습곡 12곡을 마리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뜨거웠던 둘의 사랑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리는 리스트에 대한 독점욕이 강했다. 잘생긴 연인이 연주 여행을 다니면서 여러 여자들의 접근을 허락하는 것이 싫었고 이 때문에 리스트와 갈등을 빚었다. 결혼하지 않았지만 둘 사이에 2녀 1남을 두었음에도(그중 둘째 딸이 우여곡절 끝에 바그너의 두 번째 아내가 되는 코지마다) 5년 만에 헤어진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마리는 리스트와 헤어진 다음에는 솜씨 있는 작가로 변신하여 <넬리다>라는 자전적 소설을 썼다. 리스트에 대한 묘사가 긍정적이지 않아 ‘문학적 복수’라고 회자되기도 한다.

프란츠 리스트의 초상화(1847, 미클로스 바라바스 作)와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의 초상화(1843, 앙리 레만 作)

리스트를 있게 한 특별한 인연

리스트 뒤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은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와 오페라 작곡가 조아치노 안토니오 로시니(1792~1868)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의 역사적 비르투오소(기교가 뛰어난 연주자)로 유명했는데, 1832년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탄복한 리스트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원래 독서광이고 종교적 인물이기도 했던 리스트의 성향으로 볼 때 파가니니가 없었다면 그의 음악은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파가니니는 19세기 ‘비르투오소 열풍’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파가니니는 리스트에게 아버지뻘 되는 나이였고, 두 사람 사이에 직접적인 교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로시니도 리스트와의 직접적인 교분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일찌감치 은퇴를 선언했음에도 유럽을 풍미했던 오페라 작곡가였기에 리스트는 로시니의 여러 곡을 피아노로 편곡했다. 그 중에는 유명한 오페라 <윌리엄 텔> 서곡도 있다. 로시니는 아마도 리스트보다 파가니니와 더 가까웠을 것이다. 파가니니가 로시니보다 10살 많았는데, 워낙 젊은 나이에 유명해져서 1820년대부터 프랑스 파리에 거주한 로시니를 이탈리아의 자랑스러운 후배로 생각했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뿐 아니라 기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서 로시니의 곡들을 편곡하곤 했다. 「모세 주제에 의한 변주곡」 같은 것이 좋은 예다.

 

파가니니_ 「모세 주제에 의한 변주곡」 (안탈 살라이 연주)

작곡에 영향을 준 작가들

아랫줄에서 의자에 등을 대고 편안히 앉은 사람은 남성 편력이 심하면서도 남장을 즐겼던 프랑스의 유명 여류 작가 조르주 상드(1804~1876)다. 상드는 리스트와도, 마리 다구 백작 부인과도 친분이 있었다. 두 사람을 만나러 일부러 스위스까지 간 적이 있을 정도.

상드 옆에 앉은 남자는 분명하지 않다. 상드의 오른손이 옆에 앉은 남자의 손에 닿아있는 걸 보면 연인이라 짐작되지만, 그림이 그려진 당시 상드의 연인이었던 프레데리크 쇼팽은 분명 아니다. 책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이들이 작가로 추정하는데, 쇼팽 이전 상드의 연인이었던 작가 알프레드 드 뮈세(1810~1857)와 <몽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1802~1870)로 그 의견이 엇갈린다. 하지만 워낙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뒤마를 굳이 상드의 연인으로 그렸을 것 같지는 않다.

두 사람의 의자에 팔을 대고 뒤에 서 있는 사람 또한 명확하지 않다. 작가 빅토르 위고(1802~1885)이거나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외모로 보면 젊은 시절의 위고와 닮았다. 손에 얇은 책을 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작가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리스트는 위고로부터 영감을 얻어 최소 두 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소나타 규모의 「단테를 읽고」라는 대곡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베를리오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리스트와 평생의 친구였던 베를리오즈는 리하르트 바그너로 대표되는 후기낭만주의의 선구자라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다만 베를리오즈 특유의 괴짜이고 풍운아적인 면모와 달리 너무 잘생긴 것으로 그려졌다는 점이 그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지점이다.

 

리스트_ 「단테를 읽고 : 소나타 풍의 환상곡」 (조성진 연주)

명화 속 대반전 스토리

리스트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이 예술가들이 과연 한 자리에 모여 포즈를 취하며 단하우저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허락했을까? 아니다. 이 그림은 분명한 상상화다. 이 그림이 1840년에 그려졌다는 데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의 관계는 1839년에 깨졌다. 게다가 심한 다툼 끝에 헤어졌다. 더 이상 마리가 리스트를 그윽하게 바라볼 일은 전혀 없는 것이다.

파가니니의 경우는 1840년 5월 이탈리아 제노아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1834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1838년 즈음에는 중환자 신세였다. 그림처럼 살롱 모임에 갈 형편이 아니었다.

상드를 보더라도 시기가 안 맞는다. 상드는 1836년 쇼팽을 처음 만났고 1837년부터 10년간 공개적인 연인으로 지냈다. 아무리 상드의 바람기가 심했다고 해도 1840년이면 쇼팽에게 집중했을 시기였다. 상드 옆자리에 앉은 남자로 추정되는 유력한 후보의 한 사람인 알프레드 드 뮈세와도 1833년부터 1835년까지 연인이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상상화는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단하우저에게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은 피아노 제작자인 콘라트 그라프다. 그가 등장인물들의 당시 상황이 그림의 내용과 불일치한다는 점을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라프에게 그 사실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불세출의 거장 프란츠 리스트가 콘라트 그라프 피아노를 치고 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마리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의 질투 탓에 거의 연주여행을 하지 못했던 리스트는 마리와 헤어진 이듬해인 1840년에야 다시 연주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라프 입장에서는 이런 시기에 자기 피아노를 홍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림 속의 아름다운 피아노는 콘라트 그라프의 명품이다. 현대적 피아노와 달리 철제 프레임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수명이 길어서 지금도 연주 가능한 것들이 여러 대 남아 있다고 한다. 호두나무와 마호가니의 아름다운 결을 살린 것으로도 인기가 높았는데 그림에 그런 면모가 충분히 강조되어 묘사되어 있다. 그라프 입장에서는 자기 회사 피아노를 자랑하고 싶은 뜻을 담아 그림을 주문한 것이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콘라드 그라프 피아노

글. 유형종(음악 칼럼니스트)

음악 칼럼니스트이자 공연 해설가인 필자 유형종은 음악 공동체 ‘무지크바움’과 고양아람누리 등의 문화예술기관, 그리고 대학 등에서 고전음악과 오페라, 발레를 강의하고 있다. 
‘명화 속 비밀과 클래식 음악’은 명화 속에서 짚어낸 예술가들의 비밀스럽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클래식 음악 이야기를 더해 눈과 귀를 모두 즐겁게 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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