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피아노 선율로 새해를 맞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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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아람누리 신년음악회 ‘선우예권 피아노 리사이틀ʼ 리뷰

새해 처음 만나 건네는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는 다가올 미래를 위한 주문인 동시에, 지난 한 해 별 탈 없이 잘 지낸 덕에 또 다시 서로의 복을 빌어줄 수 있는 데 대한 감사의 마음도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편안한 일상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삶을 좀 더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시간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과 칭찬을 주고받기에 1월은 참으로 적당한 시기다. 이처럼 뜻깊은 1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의 피아노 선율로 고양문화재단의 2020년 첫 공연이 펼쳐졌다. 무대를 가득 채우는 오케스트라의 흥겨운 춤곡 없이도 충분히 뜻깊고 행복한 새해맞이가 가능하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 준 무대였다.

지난 1월 11일, 고양문화재단의 2020년 첫 공연인 ‘아람누리 신년음악회’가 아람음악당에서 개최되었다.
로비를 가득 채운 관객들의 모습 뒤로 고양문화재단 프로그램의 새 브랜드 ‘아트시그널고!양’ 앰블럼이 보인다.

모범생 같던 피아니스트의 여유와 품격

지난 1월 11일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펼쳐진 ‘2020 아람누리 신년음악회’는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한국인 최초 우승자, 선우예권의 리사이틀로 꾸며졌다. 이날 공연에서 선우예권은 자신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비롯해 올해의 계획을 알리고, 자신의 길을 따라 걷는 후배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꾸민 듀오 레퍼토리를 통해 대한민국의 젊은 에너지를 청중들과 나눴다.

‘모범생’이라는 단어가 썩 잘 어울렸던 20대 선우예권의 피아니즘은, 세계 최고 권위의 콩쿠르를 정복한 이후 여유를 더한 모습이었다. 밀도 짙은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집중하는 모습과 함께, 어떤 곡에서든 유연한 음향의 흐름을 스스로 즐기며 청중과 교류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 순서로 연주한 브람스의 「6개의 피아노 소품」은 시종 유유자적한 후기 낭만의 매력을 나타냄과 동시에 호소력 짙은 프레이징, 균형 잡힌 루바토로 높은 공감대를 만들어냈다. 당당한 품격과 부드러운 서정성은 양립하기 어려우나, 선우예권은 여섯 곡으로 구성된 모음곡을 통틀어 이를 성공시켰다.

어스름한 황혼이 매력적인 2번 A장조에서는 과장 없는 아고긱이 여운을 남겼고, 이어지는 3번(발라드)에서는 타이트하게 조정된 템포와 깔끔한 페달링이 돋보였다. 마지막 6번 E♭ 단조에서는 지나친 씁쓸함보다 자연스런 선율미를 부각시켜 개운한 마무리를 들려주었다.

이어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30번 역시 낙천적인 분위기와 밝게 조절된 음색으로 연주하여, 지나친 사색으로 침잠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단순한 구성이지만 이를 더욱 간결한 내레이션으로 연출하며 통일성을 만들어낸 1악장, 비르투오시티를 적극적으로 나타낸 스케르초의 2악장을 거쳐 3악장의 변주곡에서는 젊은 대가다운 원숙미를 뽐냈다. 변주 간의 전환과 각 변주 내에서의 완급 조절이 절묘했으며 군더더기 없는 뉘앙스도 세련미를 풍겼다.

‘2020 아람누리 신년음악회’는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한국인 최초 우승자인 선우예권의 리사이틀로 꾸며졌다.
이날 선우예권은 자신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비롯해 올해의 계획을 알리고, 자신의 길을 따라 걷는 후배들과의 듀오 무대를 통해 대한민국 클래식의 젊은 에너지를 전했다.

후배들과의 환상적인 호흡, 짜릿한 연주

2부에서는 후배 피아니스트 최형록과 임주희가 선우예권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다. 먼저, 지난해 센다이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활동의 폭을 넓히고 있는 신예 최형록과 선우예권이 한 피아노에 나란히 앉아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 f단조」를 연주했다.

맑고 투명한 음색을 구사하면서도 멜로디 속에 숨은 비극성을 적극적으로 포착해낸 최형록의 정교한 손가락은 든든한 선배 선우예권의 서포트로 그 빛을 더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일치된 호흡은 작곡가에 대한 개념과 감각이 본능적으로 일치된 결과로 느껴져 더욱 편안했으며, 앙상블을 구축해가는 과정도 화기애애하게 나타난 듯했다.

이날 공연의 마지막 무대는 강한 펀치력과 거침없는 기교, 새로운 레퍼토리에 대한 도전 정신으로 주목 받고 있는 피아니스트 임주희와 선우예권의 듀오 연주, 라벨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라 발스」였다.

무르익다 못해 흐드러진 빈 왈츠의 농염한 그림자와 그로테스크한 정서의 만남이 해석의 포인트인 이 작품은, 관현악보다 두 대의 피아노로 그 짜릿함을 연출할 때 청중을 더욱 흥분시킨다. 단단한 질감과 풍성한 공명 감각을 주고받은 선우예권과 임주희의 줄다리기는 십분 여의 연주 시간 동안 한 차례도 느슨해지는 법 없이 팽팽했다. 언제 들어도 흥겨운 왈츠의 리듬과 폭포수와 같이 압도적인 사운드는 아람음악당의 신년을 넉넉하게 채워주었다.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 f단조」 연주 후 후배 최형록을 격려하는 선우예권.
지난해 명동성당과 함께 27세 이하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멘토링 프로젝트 ‘코리안 영 피아니스트 시리즈’를 시작한 선우예권은, 프로젝트의 예술감독으로서 임주희와 최형록을 포함한 7명의 아티스트를 직접 선발했다.

라벨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라 발스」를 연주 중인 임주희와 선우예권.
후배들과 함께 ‘2 Pianos 4 Hands’, ‘1 Piano 4 Hands’ 프로그램으로 호흡을 맞추며 풍성한 무대를 선사한 선우예권이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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