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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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으로 떠나는 역사 산책 ①
아서 밀러의 <시련>과 매카시즘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 연극의 기능을 이야기할 때, 아서 밀러의 <시련>(The Crucible)은 그 기능을 가장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테네시 윌리엄스, 유진 오닐, 에드워드 올비와 함께 미국 현대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 중 한 사람인 아서 밀러가 1953년에 쓴 <시련>은 17세기 미국의 한 작은 마을 세일럼에서 일어난 마녀사냥을 통해 ‘두려움’이 한 사회의 구성원들을 어떻게 지배하고 다스리는지, 그리고 여기에 사람들의 욕망과 탐욕이 더해지면 어떤 끔찍한 비극이 만들어지는지 선명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일찍이 청교도들이 정착해 개척한 매사추세츠주의 도시 중 하나인 세일럼은 엄격한 도덕성과 종교적 윤리를 강조하는 곳이었고, 도를 넘어선 종교적 광신은 결국 17세기에 악명 높은 ‘세일럼의 마녀재판’을 일으켜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이 희대의 사건은 <시련>의 모티브가 되어 지금까지 마녀사냥의 사회적 의미를 비추는 강력한 거울이 되고 있다.

사소한 공포로부터 시작된 비극 

<시련>의 어마어마한 비극은 사실 어린 소녀들의 아주 사소한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작은 마을 세일럼. 엄격한 청교도 윤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이 마을에서 어느 날 밤 소녀들이 숲 속에서 발가벗고 춤을 추며 혼령을 불러내는 금지된 놀이를 벌인다. 이것을 지나가던 목사에게 들키게 되자 소녀들은 불호령이 두려운 나머지 악마에 홀린 척 연기를 꾸며댄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된 일이었지만 어른들이 소녀들의 거짓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간다.

마을 사람들은 악마에 홀린 소녀들을 제정신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퇴마사를 부르고, 이제 자신들의 손으로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커진 상황과 마주하게 된 소녀들은 더욱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더 필사적으로 ‘악마에 씐’ 연기를 펼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결국 무고한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오게 되고, 여기서 마녀로 지목당한 사람은 지독한 고문 끝에 자신이 악마에 씌었음을 인정하며 또 다른 이름을 요구당한다. 광기 어린 피바람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잡혀갈까 두려워 줄줄이 누군가를 마녀로 몰아대고, 이 틈을 타서 그동안 개인적으로 원한을 가졌거나 이해관계가 얽힌 이웃을 고발한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거짓 증언 속에 사건은 종교적 무게를 지닌 마녀재판으로까지 확대되고, 급기야는 교수대까지 등장한다.

미국의 개척 시대, 청교도인들은 거친 환경과 투쟁하며 살아가는 동시에 엄격한 청교도적 규범을 지키느라 오랫동안 쌓인 욕구불만이 거의 폭발 직전에 다다라 있었다. 그랬던 것이 소녀들이 만들어낸 작은 거짓말을 통해 결국 터져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악마와 대항해 싸운다는 확고하고 ‘올바른’ 명분 아래, 오랫동안 억눌러온 이기심을 드러내며 잔인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복수를 시작했다. 집단적 광기라 불릴만한 이 마녀사냥으로 최소한 175명이 감옥에 갇혔고, 이 중 20명이 처형되고 5명이 옥중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오늘날 미국 동부의 작은 마을 세일럼은 마녀박물관과 기념품들이 넘쳐나는 관광 도시가 됐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희대의 마녀재판은 여전히 사람들의 호기심과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996년 제작된 영화 <크루서블>(The Crucible) 가운데 한 장면 ⓒ 20th Century Fox

 

진실 앞에 당당했던 한 인간

한편 <시련>에는 이렇듯 피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진실에 당당했던 한 인물이 등장해 또렷한 존재감을 각인시키는데, 바로 마을의 농부 존 프록터다. 애초부터 마을과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둔 채 살아가던 그는 마을을 발칵 뒤집어놓은 마녀 소동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으나, 아내가 마녀로 몰려 잡혀가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이 광기 어린 비극에 빠지게 된다. 애초부터 악마란 없고 사람들의 공포와 이기심이 만들어낸 허상이란 것을 깨달은 존 프록터는 목사와 판사를 만나 이성적으로 설득하지만, 이미 자신들이 내세운 ‘정의’에 사로잡힌 이들은 프록터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악마의 편으로 몰아세워 사형을 선고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프록터의 사람됨과 단단한 의지를 익히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그의 체포를 마땅치 않게 여긴다. 여론이 점점 자신들에게 불리해짐을 깨달은 목사와 판사는 프록터의 아내를 보내 그가 악마를 보았다고 인정만 하면 살려주겠다는 마지막 제안을 시도한다. 불굴의 투사라기보다는 그저 한 명의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던 프록터 역시 아내의 눈물과 살고 싶은 욕망에 흔들려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 거짓 진술서를 찢어버린 채 사형대에 오른다. 오직 자신의 이름 앞에 당당하고자 했던 한 남자의 피 끓는 절규는 작품 전체의 하이라이트일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연극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세기의 명대사로 남게 되었다.

진실 앞에 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진실임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과 마주하기를 두려워할 뿐이다. <시련>의 주인공 존 프록터는 일개 무지한 농부에 불과하지만, 모두가 미쳐 돌아가는 피의 광풍 속에서도 결국 자신의 신념을 잃는 것 대신 죽음을 택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고귀한 이념으로 무장한 영웅이어서도, 정의로움으로 똘똘 뭉친 투사여서도 아니다. 그는 단지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은 유일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공포와 겁에 질려 스스로 악마를 보았음을 증언하고, 닥치는 대로 남들을 마녀로 몰아세우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과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은 채 당당하게 교수대로 나아가는 존 프록터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댄포스 그렇다면 내게 설명해보시오. 프록터, 왜 당신이 거부하는지…. 

프록터 (온 영혼을 다하여 외친다) 그것이 내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내 평생 또 다른 이름은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거짓말을 했고 거짓말에 서명을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수형을 당한 이들의 발바닥 먼지만큼도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이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난 당신에게 내 영혼을 주었습니다. 내 이름만은 나에게 남겨주십시오!  

댄포스 (프록터 손에 들린 자백서를 가리키면서) 그 서류는 거짓말이오? 만약 거짓말이라면 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소! 뭐라고 말하겠소? 나는 거짓말에는 관여하지 않겠소! 프록터! 

(프록터, 꼼짝 않고 있다) 

그대의 정직한 자백서를 내 손에 넘겨주지 않으면 나는 그대가 교수형에 처해지는 걸 막을 수 없소. 

(프록터, 대답하지 않는다) 

어느 쪽을 택하겠소, 프록터? 

(씨근거리고 눈은 앞을 응시하면서 프록터, 자백서를 찢고서 구겨 뭉쳐버린다. 그러고나서 분노에 차 운다. 그러나 몸은 당당히 펴고 선 채다)   

– <시련> 중, 아서 밀러 작, 최영 역, 민음사, 2012년 

마녀사냥으로 바라본 매카시즘

<세일즈맨의 죽음> 등의 작품을 통해 동시대의 사회적 비극에 천착해오던 작가 아서 밀러가 갑자기 먼 과거인 17세기의 마녀사냥 이야기를 끄집어낸 데는 1950년대 미국 사회를 휩쓴 매카시즘(McCarthyism)이 발단이 되었다. 미국을 뒤흔든 매카시즘의 광풍은 1950년 2월, 공화당 상원 의원인 조지프 레이몬드 매카시의 “미국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선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냉전의 긴장이 첨예하던 시절, 당시 부상하던 공산권 국가들의 강한 영향력에 예민해져 있던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과 경각심이 극에 달했고, 여기에 매카시의 선언은 화약에 불을 붙인 것과도 같았다. 매카시는 비미(非美)활동조사위원회를 이끌며 공산주의자 색출이라는 명분하에 무자비한 청문회를 펼쳐나갔고, 많은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 예술인들이 이에 반론하려 했지만 공산주의자로 취급 받을 것이 두려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아서 밀러는 1953년 작 <시련>을 발표함으로써 17세기 세일럼의 마녀재판이란 연극적 프리즘을 통해 당대의 비극적 상황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는 이 작품 안에서 사소한 거짓말과 두려움이 사람들의 이익과 사회 구조와 얽히면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비극의 과정을 통째로 보여주었고, 당대 미국에 몰아친 매카시즘의 집단적 광기와 비겁한 소시민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시련>의 작가노트에서도 노골적으로 자신의 뜻을 밝히고 있다.

“나는 독자들이 여기서 인류 역사상 가장 괴이하고 또 가장 무서운 사건들 중 하나가 갖는 본질적 특성을 찾아내리라고 믿는다. 각각의 등장인물에게 부여된 운명은 그 역사적 모델의 운명과 일치한다. 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역사적인 역할과 유사한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똑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 인물은 없다.”

– <시련>의 ‘작가의 글’ 중, 아서 밀러 작, 최영 역, 민음사, 2012년 

실제로 아서 밀러 역시 <시련>의 주인공 존 프록터와 마찬가지로 매카시즘 광풍의 희생자 중 한 사람이었다. 매카시의 주도로 수많은 문화계, 예술계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고 간 비미활동조사위원회의 청문회에 소환된 그는 다른 혐의자의 이름을 댈 것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 결과 1차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것이다. 아서 밀러의 경우는 다행히 무죄를 인정받고 계속 집필을 이어나갈 수 있었지만, 실제로 당시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비공식적인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자리를 잃거나 작업 기회를 박탈당한 바 있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련>이 우리에게 남기는 파장은 크고 깊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정의의 이름으로, 혹은 스스로 만들어낸 명분에 따라 의도적으로 남을 단죄하고 몰아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익명성을 특징으로 한 인터넷 문화가 뿌리를 내린 요즈음에는 악성 댓글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의 공격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한편, 여론을 이용해 특정 대상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일도 빈번하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고, 또 무엇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가. 그런 점에서 <시련>의 마녀사냥은 17세기 세일럼과 1950년대 미국을 넘어 여전히 진행 중인 현재형의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 김주연(연극 칼럼니스트)

일러스트레이션. 정유나
필자 김주연은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연극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평론가와 드라마투르그, 연극 연구자로 활동하며 강단에 서고 있다.
‘연극으로 떠나는 역사 산책’은 세계 연극사에서 손꼽히는 희곡들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그 사실을 바라고는 작가의 시선 즉,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해석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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