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는 덕의 종이고, 덕은 재주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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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 보유자
명창 신영희 인터뷰

참, 당당하다. 카리스마가 넘친다. 작달막한 체수지만 눈빛은 호안(虎眼)처럼 형형하고, 목청은 폭포성(瀑布聲)으로 지축을 흔든다. 청중을 휘어잡기는 공명(孔明)의 백우선(白羽扇)이요, 눈물샘을 찌르기는 조자룡(趙子龍)의 장창(長槍)이다. 가희 치마저고리를 무색케 하는 여장부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 보유자 신영희(申英姬·78) 명창 얘기다. 그는 2005년 화관문화훈장, 2007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 2015년 제25회 동리대상, 2019년 제26회 방일영국악상 등 수많은 상을 받은 판소리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오는 5월 9일에는 고양아람누리를 찾아 만정제 <춘향가>를 선보인다.

전라남도 진도에서 태어난 신 명창은 열한 살 때 소리꾼이었던 부친 신치선(申致先·1899~1959)으로부터 판소리를 익혔다. 이후 안기선 명창에게 <적벽가> <춘향가>를, 장월중선 명창에게 <춘향가> <유관순전>을, 강도근에게 <적벽가> <흥보가> <춘향가>를, 김성곤에게 <춘향가>를, 김상용에게 <수궁가> <심청가>를 20대 중반까지 배운 뒤 1975년 서울에 올라와 만정(晩汀) 김소희(金素姬·1917∼95) 명창 문하에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전 바탕을 배웠다. 1976년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했으며, 1977년 남원 춘향제 명창부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 뒤 1992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 전수교육조교에 이어, 2013년 스승 만정의 뒤를 이어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만정제’ <춘향가>의 특징은 무엇인가?

만정께서 사사하신 송만갑, 박동실, 정정렬 선생의 좋은 목을 모두 따 오셨다. 그래서 학계에서 우리 선생님의 만정제를 판소리 역사에서 의미 있는 비중을 차지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스승께선 자태도 고우셨지만 성색이 청미(淸美)해서 다른 유파의 <춘향가>보다 깔끔하고 선이 아름답다. 제일 어려우면서도 듣기에 최고로 좋다. 힘도 있고 남다른 기교가 있다.

<춘향가>의 매력은?

가장 길고 어렵지만, 단조롭지 않고 갖가지 감동과 흥미를 주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내용도 다양하다. <심청가>는 효, <흥보가>는 권선징악, <적벽가>는 남자들의 우정, 그리고 <수궁가>는 토끼가 자라를 골려먹는 내용이 거의 다인데 <춘향가>는 그렇지 않다. 당시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이도령과 춘향이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춘향이의 절개, 탐관오리인 변학도를 벌하는 권선징악 등 재미있는 대목이 고루고루 들어 있다. 문화·예술적 완성도가 높다.

<춘향가> 완창은 언제 했나?

1973년에 처음 했다. 꼬박 5시간 40분 걸리는데 당시에는 에어컨도 없어 커다란 얼음덩이를 옆에 쌓아 놓고 했다. 나중에 서울에 올라와 다른 분들이 하는 걸 보니 중간에 쉬기도 하더만 당시에 나는 조금도 쉬지 않고 끝까지 했다. ‘만정제’로는 2004년에 완창을 했다. 서울에 올라와 만정 선생께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는 전 바탕을 새로 배우느라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고향에서 20년 공부한 내공이 있어 따라잡을 수 있었다.

신영희 명창은 자택에 스승 만정 선생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다. 늘 스승을 그리워하는 신 명창이 직접 제작한 것이다. 예쁜 꽃, 좋은 술 등 귀한 것이 생기면 스승과 나누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엿보인다.

신 명창의 성색은 흔히 남자소리라고 하는 통성과 수리성이다. 특히 수리성은 쉰 목소리와 같이 걸걸한 느낌을 주는데 웅장하고 쾌활한 성량, 웅숭깊고 은은하면서도 치열한 발성에서 오는 소슬한 미감 등을 잘 나타낼 수 있어 혼자 여러 명의 성격, 감정, 행동 등을 표현해야 하는 판소리의 본질적 특징에 가장 적합하다. 이 때문에 ‘판소리는 수리성의 미학’이라고도 한다.

누군가 신 명창의 목소리를 흑인 목소리 같다고 했다는데?

클래식을 하는 분이 내 소리를 듣고는 마치 아프리카 흑인들에게서 느껴지는 것 같은 소울이 있다고 하더라. 힘찬 기운이 있으면서도 깊은 한이 서려 있는 듯하다나 뭐라나. 나는 항상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소리를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통성으로 한다고 한이 없는 게 아니다. 강약으로 당겼다 늦췄다 해야 맛도 나고 판소리 특유의 깊은 분위기를 낼 수가 있는 거다. 일반 가요도 마찬가지다.

신 명창은 즉흥적으로 판을 장악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 소리판에 들어서면서 즉시 청중을 파악하고 그 수준에 맞춰 분위기를 휘어잡아 쥐락펴락한다. 소리 못지않게 발림 즉, 너름새가 시원시원한 덕분이다.

아버지가 첫 스승이다.

선친께서는 동편제 송만갑(宋萬甲·1865~1939) 명창의 맥을 이은 분이다. 김정문(金正文·1887~1935) 선생의 제자로 스승과 함께 6.25 전까지 관립극장인 협률사(協律社)에서 활동하시다 마흔에 낙향해 후학들을 지도하셨다. 생전에 임방울 명창에 앞서니 뒤서니 평을 들으셨는데 꼿꼿이 서서 소리를 하는 임방울 선생과는 대조적으로 선친께서는 발림을 잘 하셨다. 관객들을 울리다 웃기고, 웃기다 울리는 등 자유자재로 들었다 놨다 하셔서 인기가 많았다. 내가 나름대로 소리꾼으로서 평가를 받는 것은 모습도 그렇지만 아버지께 발림을 내력으로 물려받은 덕분이라 생각한다. 아버지께서는 애당초 내가 소리를 하는 것을 싫어하셨지만, 막상 소리를 가르치고부터는 나를 엄청 귀여워 하셔서 큰아들도 제쳐 놓고 나하고만 겸상을 하시곤 했다.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셨다.

내가 열여섯에 돌아가셨다. 한창 소리에 재미가 붙은 때라 크게 낙담을 했지만, 선생님들을 더욱 열심히 찾아다니며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스무 살 무렵에는 가사 내용이 절절하게 들어왔고, 스무 일고여덟에는 오묘하고 변화무쌍한 장단과 기교에 빠져들었다. 소리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다.

지난해 아람문예아카데미 예술인문학페스티벌의 ‘오픈클래스’를 통해 자신의 삶과 예술세계를 들려주었던 신영희 명창

신 명창은 1979년부터 연극도 했다. 침체된 국악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 싶어서였다. 故 허규 연출의 <다시라기>를 시작으로 <태> <불의 나라> <춘풍의 처> <무녀도> <쥬라기의 사람들> <국밥> <달아 달아 밝은 달> <해곡> <사랑보쌈> 등에 출연했다. <사랑보쌈>으로는 백상예술대상 특별연기상도 받았다. 이미 열대여섯 살 때 장월중선 선생으로부터 창극과 무용을 배웠기 때문에 연기를 하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연극 출연이 결국 그 유명한 ‘쓰리랑 부부’로 이어졌다.

창극 <가루지기>를 하면서 거지왕초 역을 맡았는데 그게 바로 ‘품바’의 원조인 셈이다. 하도 신명나게 해서인지 그 대목을 보려고 관객들이 넘쳐날 정도였다. 소문을 들은 방송국 PD가 구경을 하고서는 연락을 해왔다. 모두들 TV에 출연하라고 권했는데, 만정 선생께서 안 된다고 말리셨다. 그래서 “일단 해보고 거시기 하면 그만 두겠습니다” 하고 시작을 했는데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하지만, 인기가 올라가면서 역설적으로 내가 전통음악을 망치고 있다는 비난이 쇄도했다. 더구나 문화재 후계자가 그런다고 동료들은 물론 문화 관련 공무원들까지 선생님을 통해 그만두라고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우리끼리만 모여 ‘좋은 것이여’ 하면 뭐 합니까? 많은 사람이 좋은 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씀드렸고, 결국 스승께서도 허락하셨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4년 동안 인기가 참 대단했다.

전통음악의 저변 확대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사람들한테 ‘쓰리랑 부부’에 대한 재미가 남아 있을 때 영화 <서편제>(1993년)가 나와 한몫 해줬다. 비슷한 시기에 박동진 선생의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CF도 유행하면서 저변 확대가 굉장히 많이 이뤄졌지. 국악을 대중화시키는 일에 보탬이 되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신 명창은 연극에 이어 방송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전통음악에 대한 저변이 확대되기를 바랐다. TV 코미디 ‘쓰리랑 부부’의 도창(導唱)을 맡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내후년이면 소리 인생 70년이다. 그러면 득음을 했을 법한데?

에이, 턱도 없는 소리다. 득음은 계속 추구해야 하는 목표인 것이고, 결국 가다가 숨이 끊어지면 득음을 할까, 원. 득음은 감히 말을 할 수가 없다. 스님들이 득도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경지다. 옛날 떠르르르 했던 명창들 가운데도 단 세 분만 득음을 했다고 할 정도다. 다만, 나는 여자로서 남자 소리를 하는 게 특이하기는 할 거다.

소리 인생을 지탱해주는 힘은 무엇인가?

판소리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다. 슬플 때 하면 즐거워지고, 즐거울 때 하면 더 즐거워진다. 그리고 무대에 올라가 관객으로부터 받는 뜨거운 박수가 힘이다. 매번 다음엔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대에서 내려오곤 한다. 20대 때는 혈기가 방장해서 겁나는 게 없었다. 앞에서 대선배 명창이 소리를 하더라도 ‘내가 목으로라도 눌러버리겠다’는 배짱으로 했지. 30대에는 ‘잘 할까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다소 겸손해지고, 40대가 되니까 분장실에서부터 긴장이 되더라. 50대에는 집에서부터, 그리고 60대에는 며칠 전부터 걱정을 했는데, 70대가 되고 부터는 아예 몇 달 전부터 발 동동 안달이 난다. 고양아람누리 공연이 5월 9일인데 어떡하면 잘 할까, 벌써부터 죽겠다. (웃음)

후학들에게 하고픈 당부는?

뭐니 뭐니 해도 예의가 바르고, 인사성 밝고, 심성이 고와야 하며, 인품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좌우명이 ‘재주는 덕의 종이고, 덕은 재주의 주인’이다. 그리고 게으르거나 꾀를 부리면 안 된다. 옛날엔 죽기 살기로 소리 공부를 했는데, 요즘 친구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할 것 다하고 일주일에 한 두 번 연습해서는 절대로 제 소리를 가질 수 없다.

왼쪽 사진) 지난해에 수상한 방일영국악상의 상패. 제1회 수상자인 만정 선생의 뒤를 이어, 신영희 명창이 제26회 수상자가 되었다.
오른쪽 사진) 신 명창은 사용했던 부채의 그림을 일일이 떼어내 병풍을 만들기도 했다. “가장 보물”로 여긴다는 말 속에서 소리에 대한, 그리고 무대에 대한 신 명창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글. 이만훈(前 중앙일보 문화재 전문 기자)
사진. 하경준(캐치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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