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을 보면 페미니즘이 보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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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예술가 열전 ②
루트비히 판 베토벤 : <카핑 베토벤>(2006)

2006년 제작된 영화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이 마지막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작곡하고 공연하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보다 주된 내용은 한 여성과의 소통과 우정이다. 비록 허구의 캐릭터이지만 당시엔 상상도 못할 여성 음악가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영화는 신선한 포인트를 제공한다.

거의 모든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준 위대한 작곡가

미미미도~ 레레레시~

누군가 필자에게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멜로디를 한번 꼽아보라고 한다면, 필자는 서슴지 않고 이 여덟 개의 노트를 흥얼거릴 것이다. 바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1악장 첫 소절이다. 사람들은 이 교향곡에 ‘운명’이라는 심각한 표제를 붙였고 1808년 비엔나에서 초연한 이래 지금까지도 이 곡조는 휴대폰 벨소리로, 초인종 소리로, 방송 효과음악으로 여전히 쓰이고 있다. 심지어 야구 경기에서 투수가 삼진을 잡아냈을 때 배경음악으로 나와 타자를 머쓱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쯤 되면 비틀즈의 「예스터데이」(Yesterday, 1965), 영화 <오즈의 마법사> 주제가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 1939), 그리고 오늘도 전 세계에서 수백만 번 불릴 「생일 축하합니다」(Happy Birthday to You, 1893) 마저도 ‘애송이’로 만드는 최장기 롱런 히트곡인 셈.

베토벤은 ‘운명’ 외에도 수많은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오페라와 소품들을 작곡해 클래식 음악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고, 이후 거의 모든 뮤지션들에게 영감과 영향을 준 위대한 작곡가라는 데 이견이 별로 없다.

부스스한 머리, 강렬한 표정, 무엇보다 알코올 중독과 청각을 잃어간 비극적인 개인사 때문인지 1927년 오스트리아 영화 <베토벤의 일생>(The Life of Beethoven)을 필두로 베토벤의 인생과 음악을 다룬 영화와 드라마 역시 많이 나왔다. <에로이카>(Eroica, 1949) <위층에 베토벤이 산다>(Beethoven Lives Upstairs, 1992)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 1994) 등이 주요하게 알려진 영화지만, 정작 가장 큰 흥행을 기록한 영화는 커다란 세인트 버나드 강아지가 주인공인 할리우드 영화 <베토벤>(Beethoven, 1992)이었으니 베토벤 팬들에겐 살짝 실망스러운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한편 국내에선 괴팍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TV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2008)가 큰 인기를 끌어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기도 했다.

조셉 칼 슈틸러가 1820년에 완성한 베토벤의 초상화. 「장엄미사」를 작곡하는 베토벤을 그린 것이다.

베토벤의 이름으로 음악계를 비판하다

폴란드의 여성 감독 아그니에슈카 홀란트가 연출한 2006년 영화 <카핑 베토벤>(Copying Beethoven)은 베토벤이 죽기 3년 전, 그가 마지막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작곡하고 공연하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작 주된 내용은 한 여성과의 소통과 우정이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해 8개 부문을 휩쓴 1984년 명작 <아마데우스>의 진정한 주인공이 모차르트가 아니라 살리에리였듯이 <카핑 베토벤>의 ‘프로타고니스트’는 베토벤의 음악을 필사(copy)하는 안나 홀츠라는 젊은 여성이다.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배우 다이앤 크루거가 연기한 여주인공 안나 홀츠는, 평소 음악적으로 흠모하는 마에스트로 베토벤의 작곡과 지휘를 도우며 음악과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가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불행하게도 <카핑 베토벤>은 개봉 당시 흥행과 평단 양쪽에게서 썩 신통치 못한 성적표를 받았는데, 가장 굴욕적인 평가는 ‘<아마데우스>의 철 지난 아류’라는 비난이었다. 실제로 당대에도 ‘제2의 모차르트’라는 타이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베토벤이이 야유를 들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었다. (베토벤의 첫 음악 스승이기도 했던 아버지 요한 판 베토벤은 6살 베토벤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 레슨을 밤낮없이 시켰다고 한다. 신동 모차르트를 유럽 전역에 데리고 다니며 큰 성공을 거둔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벤치마킹하려던 것이다)

그러나 <불멸의 연인>에서 게리 올드만이 연기한 다소 어둡고 심각했던 베토벤에 비해 에드 해리스의 베토벤은 비록 괴짜라도 정열적이고도 인간적이어서 훨씬 정감이 가는 캐릭터이다. 여성인 안나를 무시하고 홀대하지만 결국 제자로, 친구로, 그리고 진정한 음악 동료로 그녀를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관객들은 소통과 우정의 진면목을 맛보게 된다. 비록 작품성에 대한 엇갈린 평가도 있었지만 중반부 베토벤과 홀츠가 함께 지휘하는 ‘합창’ 교향곡의 초연 장면은 심포니와 합창의 감동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잘 담아내는 데 성공해 영화의 단연 하이라이트이다.

특히, 비록 허구의 캐릭터이지만 당시엔 상상도 못할 여성 음악가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영화는 신선한 포인트를 제공한다. 여성 감독이어서 가능한 섬세한 연출도 돋보인다. 실제로 21세기인 지금도 클래식 음악계에서 여전히 여성 작곡가나 여성 지휘자는 찾아보기 힘든 게 현실인 점을 감안하면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이라는 거대한 아이콘의 힘을 빌려 수백 년간 공고하게 지속된 보수적이고도 가부장적인 음악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카핑 베토벤> 가운데 한 장면. 베토벤을 연기한 에드 해리스(오른쪽)와 그의 음악을 필사하는 안나 홀츠를 연기한 다이앤 크루거(왼쪽)다. 영화 속 안나는 베토벤의 작곡과 지휘를 돕는 과정에서 음악과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가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모든 여성은 슈퍼히어로입니다”

대한민국의 영화 <기생충>이 네 번이나 호명된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 비영어권 영화가 주요 부문을 휩쓸며 영화의 새 역사를 연 시상식이었지만,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있었으니 바로 음악 부문이었다.

영화 <조커>의 음악을 작곡한 아이슬란드의 작곡가 겸 첼리스트 힐더 구드나도티르(Hildur Guðnadóttir)가 여성으로는 최초로 오스카 음악상을 거머쥔 것이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아카데미이지만 단 한 번도 여성 작곡가가 단독으로 음악상을 받은 적이 없는 보수적인 시상식인지라 이번 수상은 지구의 절반인데도 늘 소수자 취급을 받아온 여성들, 여성 뮤지션들에게 무겁고 단단했던 빗장이 열리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이채롭게도 음악상의 봉투를 뜯고 발표한 시상자들이 시고니 위버(에일리언), 갤 가돗(원더우먼), 브리 라슨(캡틴 마블) 등 슈퍼히어로를 연기한 여배우들이었으니 마치 모든 것이 예견된 듯한 장면이었다. 게다가 시상식에서 오케스트라와 밴드를 지휘한 마에스트로 이미어 눈(Eimear Noone) 역시 1929년 첫 오스카 시상식이 열린 이래 최초의 여성 지휘자였다. 그녀는 황금색 드레스를 입고 여전사들의 소개를 받아 음악상 후보곡들을 멋지게 지휘해냈다.

200년 전 유럽에 살았던 베토벤에게 페미니즘이나 젠더 감수성 같은 덕목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운명’ 교향곡을 연주한 후 관객의 커다란 박수 소리조차 못 듣고 있는 베토벤을 돌려 세운 사람이 바로 무대에 있던 콘트라 알토 캐롤라인 웅거(Karolin Unger)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아마도 <카핑 베토벤>의 첫 영감이었을지 모른다.

시고니 위버의 “모든 여성은 슈퍼히어로입니다”(All women are superheroes)라는 발언이 여러모로 의미심장해지는 이번 오스카 시상식을 보며 신과 예술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해지길 바랐던 베토벤의 열정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힐더 구드나도티르의 수상 소감과 봉준호 감독의 베토벤 헤어스타일과 함께.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음악상을 수상한 힐더 구드나도티르(Hildur Guðnadóttir). 오스카 역사상 감독상 후보에 오른 여성은 5명뿐이며, 수상자는 단 1명뿐이다. 2010년 캐서린 비글로으가 <허트로커>(The Hurt Locker, 2008)로 감독상을 받아 유리천장을 깨뜨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오스카상을 받은 흑인 감독은 여성은 물론 남성도 없다.
일러스트레이션 · 권오섭

글. 권오섭(영화 칼럼니스트)

필자 권오섭은 그룹 ‘웬즈데이’로 데뷔하였으며, 다수의 뮤지컬과 TV 드라마 음악의 작사·작곡을 맡았다. 현재 영화를 주제로 한 팟캐스트 방송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를 7년째 진행하며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영화 속 예술가 열전’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예술가들의 삶을 권오섭 작가의 독특한 시선으로 풀어내,
그가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보여주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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