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의 소멸과 예술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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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의 본질 위협하는 코로나19 ―
‘콘택트’ 옹호론자의 ‘언택트’ 바라보기

코로나19 이후 새로운 시대의 화두 가운데 하나로 ‘비대면’을 뜻하는 ‘언택트’(untact)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현장대면’으로 생산되는 아우라의 교감을 생명줄로 삼았던 공연예술의 태생적인 본질과 배치되는 말입니다.

그동안 공연 참 많이 봤습니다. 한 30년 됩니다. 목적을 가지고 공연(예술)과 공연계를 보기 시작한 게 벌써 그렇게 되었네요. 그 사이 꽤 많은 일을 보았고 겪었습니다. 공연예술 내·외적인 요인으로 요동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공연예술의 근간이 흔들린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은 다르네요. 말 그대로 미증유(未曾有)의 사태가 터진 겁니다. 이 고얀 코로나19의 기습은 공연예술을 뿌리째 흔들면서, 저 같은 오랜 관찰자의 분별력까지 망가뜨렸습니다. 이 장구한 거대 장르의 존망이 마치 경각에 달린 것 같습니다. 망상인가요? 망상으로 그쳐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면 정말 좋겠습니다.

 

지난 5월 9일 새라새극장에서 ‘객석 거리 두기’ 형태로 공연된 명창 신영희의 <춘향가> 만정제.
현장의 공감대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의 영기야말로 공연예술의 근간이요, 본질입니다.

현장에서 터져 나오는 ‘아우라’가 공연예술의 근간이다

저는 뭇 예술 장르 중에서 공연예술에 특별한 애정을 가져왔는데, 그 이유는 매우 단순했습니다. 여기서 불가피하게 발터 벤야민의 견해를 빌리겠습니다. 유일무이한 현존성, 쉽게 말해 모든 게 ‘지금 여기’의 현장에서 타오르다 소멸하는 그 무상함이 좋았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듯, 오늘의 공연이 죽으면 내일의 공연이 다시 떠오릅니다. 슬프면서도 경이로운 이 아름다운 순환이 제겐 공연예술의 마력(魔力)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라는 이 못된 것은 제 안목의 근간도 흔들고 있네요. 기막힌 일입니다.

좀 더 이야기를 진행할까요. 현존성은 그 작품의 고유성과 일맥상통합니다. 그 고유성이 발산하는 영기(靈氣)나 신기(神氣) 같은 것을 다 아시다시피 벤야민은 ‘아우라’(Aura)라고 했습니다. 현장의 공감대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의 영기야말로 공연예술의 근간이요, 본질입니다. 그 본질의 주체는 당연히 같은 공간에서 순간을 함께 하는 관객들입니다.

그런데 이 근간과 본질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콘택트(con tact)에서 언택트(untact)로…. 딱 한 끗 차이인 이 말이 마치 코로나19 이후, 소위 포스트 코로나(Post COVID-19) 시대에 펼쳐질 신세계의 화두로 떠돌고 있습니다. 비대면(언택트)이라! 이는 ‘현장대면’으로 생산되는 아우라의 교감을 생명줄로 삼았던 공연예술의 태생적인 본질과 배치되는 말입니다. 코로나19는 바로 이 급소를 파고들었습니다. 미증유의 영리한 일격에 나이브한 공연예술(계)은 손쓸 겨를도 없이 우왕좌왕, 좌충우돌 딜레마에 빠져버렸습니다. 부랴부랴 랜선 공연, 무관객 공연으로 대응하지만 아직은 대증요법(對症療法)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렇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고양문화재단은 고양아람누리와 고양어울림누리,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근사한 아트센터를 보유한 공연예술의 유력한 소비처입니다. 이른바 프리젠터(Presenter), 즉 유통 중심 극장의 선장인 저에게도 ‘콘택트’과 ‘언택트’는 중요한 선택의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언택트’라는 시류를 따르랴,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콘택트’를 밀고 나가느냐. 고민을 거듭한 끝에 확고한 본질(콘택트)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4월 25~26일 새라새극장에서 공연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연극열전)은 그렇게 공연장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소강상태였지만, 완전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도된 ‘객석 거리 두기’ 공연은 어쩌면 운 좋게 안착했고, 그 바탕에서 두 번째 ‘명창 신영희의 <춘향가> 만정제’(5월 9일 새라새극장)는 훨씬 애틋한 분위기에서 마쳤습니다. 어렵게 마련한 자리여서인지 관객들 사이 아우라의 교감은 그 어느 만석 공연보다도 열렬했습니다.

 

지난 4월 25~26일 ‘객석 거리 두기’ 형태로 공연된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객석 모습.
공공 문화예술기관 최초로 시도한 ‘객석 거리 두기’ 공연은 운 좋게 안착했습니다.

‘아우라’의 희생이 공연예술의 새로운 차원을 열게 될까

코로나19로 급 폭발했지만, 작금 공연예술(시각예술도 포함하여)은 예견되는 미래의 위험요인 때문에 사실 호사가들의 논쟁 한복판에 있습니다. 코로나19가 ‘미생물 바이러스’라면 이것은 일종의 ‘기술 바이러스’라고 할까요. 다가올 인공지능(AI) 시대 생존에 대한 고민. 그 논쟁의 핵심도 결국은 ‘현장 아우라’의 재현과 재생, 지속 여부에 관한 일입니다. 전시장에서의 미술 관람도 공연예술의 그것과 결코 다를 수 없습니다.

역사가 증명하듯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지요. 코로나19의 창궐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기 흑사병(Plague)의 습격을 연상시킵니다. 공교롭게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불멸의 걸작들은 눈 뜨기 무섭게 켜켜이 시체가 쌓이던 그 처참한 비극의 시대와 맞닿아 탄생했습니다. 기막힌 아이러니입니다. 지금과 같은 ‘개인의 발견’이 이를 추동하는 힘이었다고 역사가들은 풀이합니다.

보셨듯이 저는 강력한 콘택트 옹호론자입니다만, 공연예술의 새로운 유통·소비의 도구와 수단으로서 언택트의 발견은 예술 영역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아우라의 희생 위에 공연예술의 새로운 차원이 언택트 기술의 진보에 의해 열릴지 독자 여러분과 함께 저도 유심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간 <누리> 2020년 여름 號가 진행한 코로나19 특별 좌담은 여러 가지 시사점이 큽니다. 전문가들이 내놓은 고견을 경청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정재왈(고양문화재단 대표이사·연극평론가)
사진. 노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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