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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예술가 열전 ③
윌리엄 셰익스피어 :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극작가로 손꼽히는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 무려 500편에 가까운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작품을 넘어 작가 셰익스피어를 조망한 영화들도 주목 받은 바 있다. 그 중에서도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팩트(사실)와 픽션(허구)을 그럴듯한 로맨스로 빚어내 오스카 트로피를 7개나 수상한 명작이다. 문학계는 물론, 영화계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셰익스피어. 뿐만 아니라 그는 영어사(英語史)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절대적 인물이다. 

영국인의 자부심이자 오만함의 상징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

나는 예전부터 이 말이 좀 못마땅했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가라지만 그 가치를 인구 10억 명이 넘는 한 나라와 견주다니. 게다가 인도라면, 그 안에 마하트마 간디와 타지마할 그리고 발리우드까지 몽땅 다 포함이란 말인가? 알고 보니 이 말은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평론가였던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이 그의 강의 집 <영웅숭배론>에서 한 말이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80년 전인 1840년에 나왔으며, 본래의 맥락은 ‘식 민지 인도는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만일 우리 영국인에게 식민지 인도와
셰익스피어 중 어느 것을 포기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여지없이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포기할 수 없다.
인도는 언젠가 잃게 되지만,
셰익스피어는 사라지지 않는다.”

셰익스피어가 아무리 위대해도 그렇지, 권위 있는 역사가가 왜 이런 비교를 했을까? 500년 전, 그것도 당시 유럽의 대세 르네상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조그만 섬나라 의 일개 시인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어쩌면 이 말은, 역설 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위대함보다 당시 전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인들과 제국주의의 오만함을 나타내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영어의 위상을 드높인 뛰어난 문학성

셰익스피어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그가 무엇보다 현대 영어의 위상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였다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영어 단어와 표현을 만들고, 영문법의 발전에도 상당히 기여하는 등 국제 공용어로서 영어의 학문적, 문화적 근간과 명분을 마련했음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를 근간으로 산업화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영국과 미국이 잇따라 ‘지구반 반장’ 노릇을 하면서 막강한 경제력, 군사력과 함께 영어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지 않았는가.

아무튼, 불타는 예술혼과 재능으로 52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셰익스피어는 총 39편의 희곡, 154편의 소네트, 2편의 장편 서사시를 남겼는데, 모차르트나 다빈치의 작품처럼 한 편, 한 편이 마스터피스로 칭송 받는다. 그의 작품들은 저마다 그야말로 사골국물처럼 우리고 또 우려먹어서 이제는 표절과 샘플링, 패러디와 오마주가 500년 장기흥행을 방증하고 있다.

2014년에 나온 한 통계에 의하면 셰익스피어 작품의 영화화는 <햄릿>이 79회로 가장 많았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52회로 2위, <멕배스>와 <오셀로>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 공식 트레일러

독보적인 작가에서 영화 속 주인공으로

영화 역사에서도 셰익스피어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영화라는 것이 발명되자마자 극영화로 셰익스피어의 <존 왕>이 영화화 된 것이 1899년이었다. 이후로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리어 왕> <맥베스> <베니스의 상인> <십이야> <한여름 밤의 꿈> 등 그의 희곡과 소네트는 무려 500편에 가까운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셰익스피어를 독보적인 1위의 영화 작가로도 만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작품보다 오히려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조망한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단연 <셰익스피어 인 러브> (Shakespeare in Love). 오스카 트로피를 7개나 거머쥔 존 매든 감독의 1998년 영화다.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아 같은 해에 나온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제치고 오스카 작품상을 받았는데, 여간해서는 코미디 장르에 작품상을 주지 않는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성향에 비추어 매우 이례적인 성과였다.

1593년 런던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초연되었다는 사실 하나에서 출발해 작가 톰 스토파드의 상상력이 빚어낸 그럴듯한 로맨스가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주인공 셰익스피어(조셉 파인즈 粉)가 이루지 못할 사랑 비올라(귀네스 팰트로 粉)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한바탕 소동 끝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무대에 올린다는 내용인데, 카리스마 넘치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연기한 주디 덴치를 비롯해 콜린 퍼스, 제프리 러시, 벤 애플렉, 톰 윌킨슨 등 무수히 많은 명배우들의 감초 같은 연기도 작품의 인기에 한 몫 했다.

여담으로,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1977년 <애니홀> 이후 처음으로 코미디 드라마가 오스카 작품상을 받는 쾌거를 이뤄냈지만, 2015년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다시 제7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열린다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작품상을 주겠다”는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왼쪽)와 <위대한 비밀>(오른쪽). 셰익스피어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다룬 것이 공통점이다.

‘셰익스피어 대필설’을 다룬 당돌한 영화

좀 더 흥미롭고도 당돌한 영화도 있다. 2011년 영국과 독일에서 제작한 영화 <위대한 비밀>이 그것이다. 원제는 <Anonymous> 즉, ‘무명’ 또는 ‘작자미상’이란 뜻의 영화인데 20세기 초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이른바 ‘셰익스피어 대필설’을 영화화 한 것이다.

영화 <노팅 힐>에서 휴 그랜트의 괴짜 룸메이트로 나왔던 웨일즈의 배우 리스 이반스가 ‘진짜 셰익스피어’ 에드워드 드 비어 백작 역을 멋지게 해냈다. 엘리자베스 1세 역으로 영국의 원로 배우 버네사 레드레이브가, 권모술수의 정치가 윌리엄 세실 역으로 데이비드 슐리스가 출연했다. 이 영화는 실제인물이었던 드 비어 백작의 삶에 드라마를 가미, 죽기 직전까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걸작을 창작한 기구한 천재로 그를 조망하는데,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동정과 연민을 자아냈다.

<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 <2012> 등 블록버스터 액션영화로 유명한 감독 로랜드 에머리히가 사극에 도전해 많은 영화 마니아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위대한 비밀>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와는 달리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평단에서도 별로 칭찬받지 못 하고 지나갔는데 음모론에 근거한 다소 어두운 극의 분위기와 튜더 왕조의 해괴한 출생의 비밀들, 무엇보다 셰익스피어를 모독(?)한 발칙함 때문에 영미권 관객들의 공감을 받기 어려웠다는 분석이 있다.

‘박경리 소설 읽기 클럽’에 관한 상상

이처럼, 사후 수백 년간 문학계는 물론 영화계에서도 셰익스피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또한 “셰익스피어가 ‘영어사’ 그 자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어사에서도 절대적 인물이다. 그 덕에 우리는 그 영어를 공부하느라 인생의 상당 부분을 투자했고, 우리 아이들까지 그러고 있으니 셰익스피어를 보면 뭔가 억울함이 치민다는 사람도 있다.

도대체 영어가 무엇이기에, 영어 단어를 외우고 문법을 공부하느라 그 젊고 아름다운 시절을 보냈을까? 도대체 영어가 무엇이기에, 사는 동안 수많은 울렁증과 박탈감, 자괴감과 부러움을 견뎌야 했을까?

안타깝지만 아직도 영어가 엄연히 제1외국어이고 지구촌의 세계화가 점점 가속화하는 현실을 볼 때, 우리는 앞으로도 당분간 셰익스피어를 읽고 공부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22세기쯤 되면 대한민국 문화가 세계를 눈부시게 선도해서 미국에선 <한용운 시 연구회>, 유럽에선 <백석 문학회>, 인도에선 <박경리 소설 읽기 클럽> 등이 생겨날 수도 있지 않을까?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그 어느 나라보다 선진국답게 잘 대처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공연히 흐뭇한 상상을 해본다. ‘한여름 밤의 꿈’일까?

일러스트레이션 · 권오섭

글. 권오섭(영화 칼럼니스트)

필자 권오섭은 그룹 ‘웬즈데이’로 데뷔하였으며, 다수의 뮤지컬과 TV 드라마 음악의 작사·작곡을 맡았다. 현재 영화를 주제로 한 팟캐스트 방송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를 7년째 진행하며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영화 속 예술가 열전’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예술가들의 삶을 권오섭 작가의 독특한 시선으로 풀어내, 그가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보여주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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