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놓인 지식인의 선택과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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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생애>와 갈릴레오 갈릴레이

지동설이 옳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냄으로써 천문학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갈릴레오 갈릴레이. 하지만 이 위대한 과학자는 권력 앞에서 자신의 학설을 스스로 부인하는 수치스러운 선택을 한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는 천동설과 지동설로 대표되는, 기존의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이 날카롭게 충돌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경계에 놓인 지식인의 선택과 책임에 대한 브레히트의 자전적 성찰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나치의 정치 탄압을 피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망명 중이던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는 1939년, 히틀러의 유럽 지배가 본격적으로 가속화되던 시기에 이탈리아의 저명한 과학자 갈릴레이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를 주인공으로 하는 희곡을 쓰기 시작한다.

비록 권력 앞에 자신의 학설을 철회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은 채 죽을 때까지 연구 의지를 불태웠던 한 위대한 과학자를 통해 나치 권력에 대항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천명하려 한 것이다.

유스투스 수스테르만스가 1636년경 그린 갈릴레이의 초상화

관측 천문학의 장을 연 장본인, 갈릴레이

갈릴레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종교 재판소를 나서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리는 늙은 천문학자의 모습이지만, 사실 갈릴레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는 아마도 자신의 학설을 스스로 부인하고 죽을 때까지 침묵을 지켜야 했던 위대한 과학자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만들어 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이런 말을 했든 안 했든 간에 지구는 여전히 돌고 있듯, 갈릴레이가 자신의 학설을 부정했다 할지라도 그가 천문학과 물리학의 지형을 바꾼 위대한 과학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밤하늘의 별처럼 수없이 빛나는 갈릴레이의 업적 중에 서도 특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망원경을 사용해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 기록함으로써 ‘관측 천문학’의 장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코페르니쿠스 등과 같은 선배 천문학자들이 직관과 추론에 의해 천체를 이해하고자 한 것과 달리, 갈릴레이는 자신이 개량한 망원경으로 매일 밤 꾸준히 별들을 관측했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결과를 토대로 수많은 가설들을 증명해냈다.

브레히트 역시 극 중 갈릴레이가 “눈으로 보는 것이 진실이다. 보이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계속 주장하게 만듦으로써, 오로지 실재하는 증거를 통해 과학을 탐구하고자 했던 갈릴레이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이탈리아로 처음 망원경이 전파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으로 남의 집 안뜰을 들여다보거나 멀리 적의 동태를 살피는 데 열중했다. 하지만 갈릴레이의 눈이 향한 곳은 달랐다. 그는 손수 렌즈를 개량해 수십 배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뒤, 곧바로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고 이로써 수천 년간 정체되어 있던 천문학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은하수가 수많은 별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비롯해 달 표면의 수많은 분화구, 목성을 회전하는 4개의 위성, 금성의 공전 궤도와 태양의 흑점 등 그가 자신의 망원경을 이용해 밝혀낸 것들은 그 자체로 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뛰어넘는 발견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통적인 천문학과 세계관을 완전히 뒤엎을 만한 획기적인 자료들이었다. 그는 직접 보고 관찰한 자료와 계산을 토대로,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옳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냈다.

즉, 이전까지 가설과 추측만 난무하던 천문학의 논제들을 구체적인 데이터로 논증함으로써, 갈릴레이는 천동설과 지동설을 둘러싼 논란을 종식시킴과 동시에 천문학을 과학의 영역으로 확고히 옮겨 놓은 것이다.

갈릴레이 달이 빛을 내는 것과 같은 이치야. 두 별은 태양의 빛을 받기 때문에 반사광선을 내는 거라네. 달과 우리는 같은 관계에 있어. 그래서 달은 우리에게 때로는 초승달로, 때로는 반달로, 때로는 보름달로 보이고, 때로는 안 보이는 걸세.

사그레도 그렇다면 달과 지구 사이엔 차이가 없겠군? 

갈릴레이 명백히 그래.

사그레도 10년도 채 되기 전에 로마에서 한 사람이 화형 당했지. 조르다노 브루노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도 바로 그렇게 주장했었지.

갈릴레이 암. 그리고 우린 그 사실을 눈으로 보고 있네.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말게, 사그레도. 자네가 보고 있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일세. 오늘은 1610년 1월 10일. 인류는 역사책에 기록해 넣겠지. ‘하늘이 폐지되다’라고.

– <갈릴레이의 생애> 중, 베르톨트 브레히트 작, 차경아 역, 두레, 2001년

진실을 탐닉한 혹독한 대가

코페르니쿠스가 가설을 세우고, 갈릴레이가 증명해 낸 지동설은 과학적으로는 2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오류를 바로잡는 위대한 발견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종교 세력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자 위험천만한 도전이었다.

갈릴레이의 주장은 일찍이 조물주가 모든 별과 우주를 자신의 계획대로 창조하고, 그중 가장 사랑하는 피조물인 인간과 그들이 사는 지구를 그 중심에 두었다는 성경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구는 무한한 우주의 한 부분일 뿐이며 모든 별들은 각각 자신의 궤도와 속도에 따라 움직이면서 각자의 운행을 이어가고 있다는 주장은 그때까지 교회가 정해놓은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절대 순종하던 민중들의 의식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어쩌면 신과 교회가 아닌 스스로가 자기 인생의 중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민중들에게 빠르게 퍼져 나갔고, 실제로 1632년 사육제 기간 북부 이탈리아 지방에서는 천문학과 갈릴레이의 지동설이 카니발과 가장행렬의 주제로 채택되기도 했다.

더 이상 이 사태를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로마 교황청과 종교재판소는 결국 이듬해인 1633년, 갈릴레이를 악명 높은 종교재판에 회부하기에 이른다. 갈릴레이의 오랜 친구였던 교황 우르바노 8세의 배려로 끔찍한 고문이나 사형 판결을 받지는 않았지만, 갈릴레이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이 지금까지 주장한 학설을 모두 부인해야 했다. 또한 이와 관련한 모든 연구를 중단한다고 맹세해야 했으며, 오랜 기간 교황청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저 옛날 진실을 마주하고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 진실을 알고자 하는 인간은 언제나 그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어려서부터 호기심 많고 알고자 하는 갈망이 남달랐던 갈릴레이는 평생 우주의 진리를 알고자 했고, 결국 그 진실을 아는 대가로 종교재판이란 혹독한 시험을 치러야 했다.

또, 낮이나 밤이나 망원경을 끼고 산 탓에 완전히 시력을 잃은 갈릴레이의 말년 모습은 두 눈을 잃고 먼 길을 떠나는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모습과도 겹쳐진다. 진실을 아는 대가로 고통을 짊어진 인간이라는 점에서, 갈릴레이는 오이디푸스의 또 다른 후예일지도 모르겠다.

1638년 출판된 <새로운 두 과학 : 고체의 강도와 낙하 법칙에 관하여>

직선이 아닌 곡선을 택한 과학자

종교재판 이후의 갈릴레이의 삶에 대해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의 인생의 클라이맥스는 언제나 종교재판, 그리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에 멈춰져 있다. 하지만 재판에서 가택연금을 선고받고 피렌체의 옛집에 돌아온 뒤에도 갈릴레이는 죽을 때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또 다른 과학의 영역에서 눈부신 성과들을 이루어 냈다.

시력을 완전히 잃은 데다 교회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더 이상 천문학 연구를 계속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딸과 몇몇 제자들의 도움으로 진자와 물체의 운동에 대한 실험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연구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두 과학 : 고체의 강도와 낙하 법칙에 관하여>를 완성했고, 신교국인 네덜란드에서 출판된 이 책은 이후 근대 물리학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만약 갈릴레이가 선배 과학자 조르다노 브루노(Gior dano Bruno, 1548~1600)처럼 화형대에서조차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면, 그는 더욱 드라마틱하고 비극적인 위인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그러한 영웅적 죽음 대신 비굴하더라도 끈질긴 삶을 택했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런 말년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과학자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물론 아무리 그의 학문적 성과가 뛰어나다 한들, 그가 자기 입으로 자신의 주장을 부인하고 권력 앞에 비겁하게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과학의 순교자로 남지 않은 것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생전에 갈릴레이 스스로도 말했던 것처럼 장애물이 있을 때,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가 직선이 아닌 곡선을 택한 덕분에, 천문학과 물리학을 비롯해 근대 과학의 많은 부분이 그로부터 크나큰 은혜를 입고 발전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 정유나

시대의 고민이 담긴 세 개의 판본

<갈릴레이의 생애>는 총 3개의 판본이 전해진다. 덴마크 망명 중에 썼던 초판본에서 브레히트는, 나치의 유럽 정복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갈릴레이의 형상을 통해 압제에 반대하는 지식인의 의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에 비해 1945년 히로시마 원폭 이후 쓴 두 번째 미국 판본, 그리고 마지막으로 쓴 세 번째 베를린 판본에서는 진리의 탐구에 국한하지 않고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어, 작가가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소 달라진 듯한 인상을 준다.

현대 물리학 연구와 발전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원자탄의 가공할 만한 위력을 목도한 브레히트는 과학자의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은 그가 베를린 판본에 추가한 ‘갈릴레이의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초판본과 달리 두 번째, 세 번째 판본에서는 갈릴레이의 부정적인 측면이 조금 더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브레히트는 작품 속 갈릴레이를 단순히 위대한 과학자로만 그리지 않고 미식가이자 야심가, 때로는 매우 계산적인 속물이자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과 끈기를 가진 학자 등 다채로운 면모로 그려 내고 있다. 이는 갈릴레이의 인간적인 약점과 위대한 면모를 함께 보여줌으로써 이 역사적인 과학자의 삶을 보다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한 작가적 선택인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브레히트 또한 갈릴레이 못지않게 번뜩이는 재능과 비범한 안목을 지닌 천재였지만, 평생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경계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브레히트는 자신의 선택과 책임에 대한 비판적 시선 또한 <갈릴레이의 생애>에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글. 김주연

필자 김주연은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연극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평론가와 드라마투르그, 연극 연구자로 활동하며 강단에 서고 있다.
‘연극으로 떠나는 역사 산책’은 세계 연극사에서 손꼽히는 희곡들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그 사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즉,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해석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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