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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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예술가 열전 ➃
윤동주 : <동주>(2015)

시대극이나 사극은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소재다. 고대 시대 판타지부터 고작 10년 전이나 20년 전 향수 자극 레트로물까지, 사람들은 늘 과거를 돌아보고 싶어 한다.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일단 ‘옛날 옛적에’로 시작해야 제격인 것이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그중에서도 비교적 가까운 근현대사 속 인물들을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두 동강난 역사 속에 가려진 문학가들

흥미로운 건 역사가 고작 200여 년밖에 안 되는 나라 미국도 그 얼마 안 되는 역사를 쪼개고 또 쪼개서 수많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창조하고 윤색해 전 세계에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무려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그 유구한 시간에 비해 시대극의 다양함이 썩 넓지 못하다.

방대한 실록과 사초가 전해지는 조선 시대 왕실의 이야기는 그나마 TV 드라마나 영화로 다수 제작되어 친숙한 편이지만 상대적으로 고려 시대, 통일 신라 시대, 삼국 시대와 그 이전 고대 한반도의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비교적 기록과 자료가 많은 근현대사는 어떨까?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기막힌 비극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외세의 개입과 일제 강점기를 거쳐 내전과 분단이라는 격동의 100년을 보내는 바람에 그마저도 두 동강이 나 버린 것이다.

전쟁과 냉전 시대를 거치며 우리에겐 휴전선 저편의 예술가와 문학가들을 배우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체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증오심이 커질수록 역사는 왜곡되고 중요한 인물들은 잊혀 갔다. 나는 아직도 대학 신입생 시절 우연히 도서관에서 백석의 시를 읽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아니, 이런 엄청난 시들이 왜 교과서에는 없었지?’

아마도 해방 후 그가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돌아갔기 때문이리라. 백석의 시는 2009년에서야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중·고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영화 <동주>(2015)의 윤동주(왼쪽, 배우 강하늘)와 송몽규(오른쪽, 배우 박정민)

빛바랜 흑백사진이 활동사진으로

다행히 우리는 윤동주의 시들은 일찍부터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윤동주가 만일 6개월을 더 살고 해방을 맞아 고향 간도로 돌아갔다면, 우리는 「서시」나 「별 헤는 밤」을 모른 채로 지금껏 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배경에서 2016년 개봉한 흑백영화 <동주>는 아주 각별하게 다가온다. 주인공 윤동주(강하늘 粉)와 송몽규(박정민 粉)가 그들의 짧은 생을 어떻게 보냈는지, 어떻게 문학으로 세상과 소통했는지, 100여 년 전 이 땅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위해 고민하고 싸우다 스러져 갔는지 먹먹하게 보여준다. 영화 <황산벌> <왕의 남자> <사도> 등으로 ‘사극 스페셜리스트’ 경지에 오른 이준익 감독은 영화 <동주>를 흑백으로 구성해 우리가 늘 보던 빛바랜 윤동주의 흑백사진을 ‘활동사진’으로 바꾸어내는 데 성공했다.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일본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죽었다. 영화는 그가 감옥에서 생체실험 주사를 맞고 죽었다는 설을 기반으로 후쿠오카 감옥과 북간도, 경성, 교토를 오가며 진행된다. 동주와 몽규의 절친 강처중(민진웅 粉)과 동주를 흠모하는 일본인 여성 쿠미(최희서 粉)가 조연으로 나온다. 영화에서는 윤동주가 체포되기 직전 쿠미가 그의 시집을 몰래 받아 출판한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해방 후 1948년 윤동주의 친구 정병욱과 강처중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했다.

윤동주는 정지용과 백석, 두 시인을 늘 존경했다고 전해지는데 영화에는 정지용도 등장한다. 배우 문성근이 정지용을 연기했는데, 문성근은 윤동주의 숭실학교 시절 친구인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기도 하다. 문익환 역시 영화에 잠깐 등장한다.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아는 만큼 달리 느껴지니…

영화의 주인공은 윤동주지만 의외로 그는 미숙하고 내성적인 캐릭터로 나온다. 오히려 주도적이고 역동적인 인물은 동주의 고종사촌 송몽규다. 역시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독립운동가다. 영화 속에서 송몽규는 단순히 윤동주의 동갑내기 사촌이 아니라 친구이자 멘토이며, 동지이자 라이벌이다. 마지막에 윤동주가 각성하고 자신의 신념을 오롯이 지켜내는 것도 몽규의 영향이 크다.

아니, 천재적인 시인 윤동주가 콤플렉스를 느끼는 친척이자 친구가 늘 함께 있었다고? 하긴, 우리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그가 젊은 나이에 옥사했다는 것 정도만 알았지 윤동주의 길지도 않은 삶에 대해 관심이나 있었던가.

누구는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의 캐릭터가 너무 심약하고 어눌해 보여 불만이었다고도 한다. 명색이 ‘저항시인’이라고도 불리는데 말이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이 영화를 보고 윤동주의 「서시」를 읽어보면 늘 무심하게 보고 듣던 그 유명한 시구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에 가슴 한 쪽이 새삼 찌르르 저며 온다. 이것이 영화 <동주>가 주는 깨달음이고 즐거움이다.

이제 조선 시대 궁궐에 집중된 관심을 여러 시간과 여러 공간으로 돌려 보면 좋겠다. 50년 전 이야기부터 5000년 전 이야기까지 좀 더 다양하게 발굴해 소설로, 드라마로, 영화로 만들고 보았으면 좋겠다.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한동안 가려져 있었던 이태준과 박태원의 소설도 읽어 보고, 백석과 임화의 시도 읊어 보고…. 물론, <동주>를 보지 않았다면 이 영화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일러스트레이션 · 권오섭

글. 권오섭

필자 권오섭은 그룹 ‘웬즈데이’로 데뷔하였으며, 다수의 뮤지컬과 TV 드라마 음악의 작사·작곡을 맡았다. 현재 영화를 주제로 한 팟캐스트 방송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를 7년째 진행하며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영화 속 예술가 열전’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예술가들의 삶을 권오섭 작가의 독특한 시선으로 풀어내, 그가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보여주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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