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에 가려진 흥미진진한 그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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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으로 떠나는 역사산책 ⑤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와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프랑스의 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쓴 희곡 <시라노>의 인기에 힘입어 ‘시라노’라는 이름은 오랜 세월동안 낭만적인 사랑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왔다. 못생긴 외모 때문에 오랫동안 사랑해온 여인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한 한 남자의 이야기. 애틋한 사랑의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는 그 남자에게 더욱 안타까운 사연이 있으니, 사상가로서 작가로서의 비범하고 흥미진진한 삶이 로맨티스트라는 그림자에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희곡 <시라노>(원제는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에드몽 로스탕(Edmond Rostand, 1868~1918)이 17세기 프랑스의 실존인물이었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1619~1655)의 삶에 깊이 매료되어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쓴 작품으로, 1897년 초연 이후 무려 500회 연속공연을 기록하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커다랗고 못생긴 코 때문에 오랫동안 사랑해온 여인 록산느에게 차마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그녀가 사랑하는 젊고 잘생긴(그러나 지성과 말재주는 빵점인) 청년에게 자신의 시와 편지를 대신 읽게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애틋한 사랑의 전설처럼 회자되며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로스탕의 원작 희곡은 연극으로 또 영화로 여러 차례 제작되었으며 특히 1990년 제라르 드파르디유가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가 널리 알려지면서 시라노의 낭만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청소년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와 영화 <시라노 연애 조작단>, 뮤지컬 <시라노> 등 원작을 바탕으로 각색한 작품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시라노는 말 그대로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실존인물인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가 단순한 로맨티스트가 아니라, 17세기 프랑스의 자유사상을 대표하는 진보주의자이자, 사이언스 픽션(SF)의 효시로 여겨지는 과학소설과 희곡을 쓴 선구적인 작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시라노>의 로맨틱한 주인공으로만 바라보기엔 너무나 아까운, 비범하고 흥미진진한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초상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다 간 풍운아

1619년 파리의 한 법관 가문에서 태어난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군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왕실 근위대에 근무하며 여러 차례 전쟁에도 참여한 시라노는 용감한 성품과 뛰어난 검술로 명성을 쌓았으나, 1640년 아라스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제대한 뒤 본격적으로 자유분방한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부르주아 출신으로 아버지의 사망 이후 많은 유산을 물려받기도 했지만, 그는 술과 도박, 그리고 크고 작은 결투에 휘말리면서 이를 모두 탕진했고, 나중에는 귀족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철학자, 극작가, 배우 등 예술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며 문인 검객이자 자유사상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시라노는 1655년 머리에 대들보가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로 겨우 3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수많은 결투와 날카로운 풍자시로 워낙 적이 많았던 터라 당시나 지금이나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생전에 시라노는 자유주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진보주의자로 이름을 날렸고, 희극과 비극, 소설과 서간집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 후세의 관심을 집중시킨 작품 중 하나가 작가의 사후 출간된 소설 ≪다른 세상≫이다.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이라는 서로 다른 두 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다른 세상≫은 시라노의 해박한 과학지식과 기발한 상상력, 그리고 날카로운 현실 비판의 시선이 돋보이는 소설로, 사이언스 픽션(SF)의 효시라고도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이후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00년 전, 우주를 향해 뻗은 상상력

≪다른 세상≫은 주인공 ‘나’가 우연한 기회에 달나라와 해나라로 여행을 가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가장 먼저 시라노의 해박한 과학지식과 시대를 앞서는 상상력에 감탄하게 되는데, 일단 그는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 케플러와 브라헤 등 앞 세대 혹은 동시대 천문학자들이 내세운 획기적인 주장들, 즉 지동설이나 자전 운동, 달이 지구와 같다는 등의 가설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이야기의 바탕에 깔고 있다.

갈릴레이의 종교재판과 지동설 부인이 불과 15년 전에 일어났던 일임을 생각한다면, 시라노가 당대의 지식인 중에서도 상당히 깨어있고 과학에 대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세상»의 첫 번째 이야기인 <달나라 여행>에서 주인공은 ‘달이 지구와 똑같다’는 자신을 비웃는 친구들을 설득하기 위해 달나라로 가는 기계를 만들던 중, 우연히 화약이 폭발하면서 생긴 불꽃의 추진력 덕분에 구름을 뚫고 달에 착륙하게 된다. 여기서 달은 아담과 이브가 쫓겨난 에덴동산 같은 곳으로 그려지는데, 그는 이곳에서 선지자 엘리야와 소크라테스의 영혼, 여왕과 악마 등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 토론을 벌인다.

지적이고 철학적인 토론 곳곳에서 작가 시라노의 재치와 위트가 빛을 발하는데, 특히 달나라에서는 코가 클수록 존경을 받고 코가 납작한 사람은 벌을 받으며, 돈 대신 시(詩)가 화폐로 쓰인다는 설정은 작가 특유의 아이러니한 상상력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지나치게 큰 코 때문에 평생 고통받고, 재산을 탕진한 뒤 가진 거라곤 시를 쓰는 재능밖에 없었던 시라노가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불행한 현실을 유쾌하게 뒤집은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정유나

‘다른 세상’을 통해 바라본 현실 풍자

두 번째 이야기 <해나라 여행>은 달나라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공이 마귀로 몰려 종교재판을 받는 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이 각 행성의 움직임을 구분하기 위해 책에다 그려놓은 동심원을 보고는 악마를 불러내는 마법의 서클이라며 소리를 지르는 데, 시라노는 이런 장면을 통해 당대 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종교재판의 맹목성을 노골 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재판에서 간신히 풀려난 뒤 주인공은 다시 비행 기계를 만들어 이번에는 해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해나라는 새들이 지배하는 공화국이었고, 여기서 그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새들 앞에 소환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온갖 변론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죽음의 계곡으로 끌려가지만, 예전에 그가 새장 문을 열어 자유롭게 해주었던 앵무새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죽음을 면하게 된다. 이후 주인공은 데카르트를 비롯한 철학자들과 긴 토론을 벌이지만, 아쉽게도 시라노의 <해나라 여행>은 토론 도중 미완으로 끝나고 만다.

시라노의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은 얼핏 보면 허풍스런 상상력으로 쓰여진 공상소설 같지만, 찬찬히 읽어보면 허황된 꿈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매우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풍자소설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이 달나라와 해나라에서 만나는 다양한 등장인물들과 벌이는 논쟁과 토론은 사실 모두 인간 세상의 부조리와 해악에 대한 고발이자 비판을 담고 있다. 현실 세계와 상반되는 가치를 신봉하는 그곳 사람들을 통해 현실이 중시하는 가치가 과연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지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작가 시라노는 달나라와 해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실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17세기 프랑스의 모습을 비추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이야기를 묶으며 ‘다른 세상’이란 제목을 지은 것 또한 매우 아이러니한데, 결국 작가는 달나라든 해나라든 근본적으로는 이곳과 다르지 않은 ‘같은 세상’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 속 시라노의 비판이 워낙 노골적이고 신랄했던 터라 두 작품 모두 작가 생전에는 출간되지 못하고, 그가 죽은 후에야 세상에 소개될 수 있었다.

깃털처럼 가볍고 우아한 죽음

평생 돈 한 푼, 방 한 칸도 없이 떠돌아다니고,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마음조차 못 전했으며, 작품 또한 발표하지 못한 채 불의의 사고로 죽었으니 현실적으로 볼 때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삶은 참으로 파란만장하고 불우한 사건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타협하지 않고 자유를 외쳐댄 사상가로서나, 한 여인을 위해 평생 지순한 사랑을 간직한 남자로서나, 우주여행이란 기발한 상상력을 고안해낸 작가로서나 그의 비범한 삶과 정신은 여전히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실제로 연극 <시라노>의 작가 로스탕도 작품 속에서 자유주의자로서 시라노의 면모를 여러 장면에서 부각시키고 있는데, 록산느와의 로맨스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런 대사들이 다소 주목을 받지 못한 지점이 없지 않다.

연극 <시라노>의 마지막 장면.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시라노는 칼을 들고 꼿꼿하게 서서 당당하게 임종의 순간을 기다린다. 죽음을 앞둔 그가 환각 속에서 칼을 휘둘러 싸우는 상대는 그가 평생의 적으로 삼았던 ‘타협, 편견, 비열함, 그리고 어리석음’이다.

결국 이러한 적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자신이 죽게 된 것을 알면서도 시라노는 “상관없어, 난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울 테니까!”라고 외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적들이 자신에게서 모든 걸 앗아간다 하더라도 결코 가져갈 수 없는 단 하나가 있다면서 미소를 지은 채 숨을 거두는데, 그가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그것은 바로 ‘장식 깃털’이었다.

이는 죽을 때까지 기사다운 우아한 기품을 잃지 않고자 했던 시라노의 자존심인 동시에, 평생 어디에도 속박당하지 않은 채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그의 삶의 태도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시라노 아니, 난 싫네! 난 그 대신… 노래하고, 꿈꾸고, 웃고, 지나가고, 혼자 있고, 자유를 즐기고, 똑바로 보는 눈과 떨리는 목소리를 가지고, 마음이 내킬 때 펠트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찬성 혹은 반대를 위해 싸우거나, 시를 쓸 걸세! 영광 혹은 부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일하고, 몽상에 젖어 달나라 여행을 꿈꿀 걸세!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은 결코 쓰지 않고, 겸허하게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걸세, 어이, 친구, 자네 정원에서 자네 손으로 딸 수 있다면, 꽃, 과일, 심지어 그 잎들로 만족하게!

그러다 우연히 약간의 영광을 누릴 기회가 온다면, 공물로 바쳐야 할 것이 없도록 떳떳하게 행동하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 없도록 할 걸세.

간단히 말해, 참나무나 떡갈나무는 못 되더라도 빌붙어 사는 덩굴이 되진 않을 걸세. 아주 높이 오르진 못해도, 혼자 힘으로 올라갈 걸세!

– <시라노> 중, 에드몽 로스탕 작, 이상해 역, 열린책들, 2008년

글. 김주연(연극평론가)

필자 김주연은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연극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평론가와 드라마투르그, 연극 연구자로 활동하며 강단에 서고 있다.
‘연극으로 떠나는 역사 산책’은 세계 연극사에서 손꼽히는 희곡들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그 사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즉,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해석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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