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기의 러시아를 겪은 두 작곡가 Ⅰ

우리와 똑같이 젊었고, 뜨거운 가슴을 지녔던⋅⋅⋅
2016년 6월 20일
혁명기의 러시아를 겪은 두 작곡가 Ⅱ
2016년 6월 21일
02016년 6월 21일

XBH366684 The composers Sergei Prokofiev, Dmitri Shostakovich and Aram Khachaturian, 1945 (b/w photo) by Russian Photographer (20th century); Private Collection; (add.info.: Prokofiev (1891-1953) was a Russian composer, pianist and conductor; Shostakovich (1906-75) was a Russian composer; Khachaturian (1903-78) was a Soviet-Armenian composer;); Russian, it is possible that some works by this artist may be protected by third party rights in some territories

[기획연재]

2016 아람누리 심포닉시리즈
‘쇼스타코비치 vs. 프로코피에프’

혁명기의 러시아를 겪은

두 작곡가 

 

식민지 그리고 전쟁과 분단. 참혹한 세월이었고, 이후 우리는 분단의 짙은 그림자 밑에서 오랫동안 억압의 탁한 공기를 마시며 살았다. 그 시절에 러시아 음악은 한국의 음악계에, 그리고 음악 애호가들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밀도 높은 세계였다. 차디찬 겨울 나라의 우울하고 창백한 선율은 20세기 내내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들에게 미묘한 감정 이입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기 러시아의 두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에프를 만나는 2016 아람누리 심포닉시리즈는 뜻 깊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글. 정윤수(한신대 교수, <클래식 시대를 듣다> 저자)

 

 

지금 왜, 혁명기 러시아 음악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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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아 이제 교과서의 공식용어가 된 ‘강점기’라는 표현은 어떤 점에서 너무 밋밋하다. 식민지! 그렇다. 우리의 20세기 전반기는 식민지였다. 그 시절, 러시아는, 그리고 러시아 음악은 식민지 음악가들에게 강렬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리고 전쟁과 분단. 참혹한 세월이었고, 그 이후 우리는 분단의 짙은 그림자 밑에서 오랫동안 억압의 탁한 공기를 마시며 살았다.

그런 시절에 러시아 음악은 한국의 음악계에, 그리고 음악 애호가들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밀도 높은 세계였다. 예컨대 영국의 근엄한 국가주의적 행진곡과 이탈리아의 화려한 오페라에 비하여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이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떠올려보라.

2.이오시프_스탈린[출처_위키피디아]

스탈린(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특히 스탈린 시대! 본명이 ‘이오시프 주가시빌리’인 이 독재자는, 혁명운동 시절 스스로 지은 이름 ‘스탈린’에 걸맞게 러시아를 ‘강철’처럼 통치하였다. 그들 나름대로는 러시아 혁명의 획기적이면서도 지속적인 순항을 위하여 ‘강철’처럼 통치한 세월이었는데, 그 장막 아래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유형을 떠났으며 고려인들처럼 강제로 낯설고 황폐한 땅에 이주하였다. 또한 예술가들은 앵무새처럼 확성기 노릇을 해야 했다.

그러나 시인 김명수의 표현대로, 앵무새에게도 혀가 있지 않은가. 앵무새의 혀! 시키는 대로 똑같은 말을 확성해야 하는 운명이지만 그래도 다른 말, 다른 표현, 다른 메시지를 말해보려고 쉼 없이 움직이는 앵무새의 혀말이다. 음악으로 보면,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에프를 우리는 즉각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의 목소리, 그들의 선율, 그들의 메시지는 엇비슷하게 어둡고 습기 찬 세월을 살아내야 했던 한국의 음악가와 음악 애호가들에게 각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2011년 ‘하이든 vs. 모차르트’를 시작으로 2012년 ‘베토벤 vs. 브람스’, 2013년 ‘슈베르트 vs. 멘델스존’, 2014년 ‘차이콥스키 vs. 라흐마니노프’, 2015년 ‘드보르자크 vs. 시벨리우스’를 거쳐 온 ‘아람누리 심포닉시리즈’가 올해 혁명기 러시아의 두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에프를 선명하게 대비하여 공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 즉, 어쩌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20세기의 파란 속에서 러시아 음악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까지 두루 성찰한다는 의미에서 뜻 깊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7월 9일 심포닉시리즈에 출연하여 쇼스타코비치를 연주하는 지휘자 박영민, 부천필하모닉과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

우선 7월에는 박영민이 지휘하는 부천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노부스 콰르텟의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과 더불어 파격과 유머와 냉소와 분노가 뒤섞인 쇼스타코비치를 들려준다(축전서곡, 바이올린협주곡 1번, 교향곡 6번). 그리고 11월에는 성시연이 지휘하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피아니스트 박종화와 함께 격렬한 타건 위의 자유를 추구하는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협주곡 및 교향곡 1번과 7번을 격동시킨다.

그렇다면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에프, 이 두 사람을 잘 알고 있는 증언자의 목소리부터 들어보자. 20세기 중엽 러시아 피아노계를 주도했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는 <리히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에서 두 음악가에 대한 개인적 인상을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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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실험, 파격의 혁명, 극단의 모색을 감행한

혁명기 젊은 예술가

그에 따르면, 리히테르는 어느 날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오페라극장 앞을 걷다가 ‘거리의 가로등이 아직 켜지지 않은 해거름’에 갑자기 어느 남자와 마주쳤다. 낯선 자가 리히테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남자의 눈동자는 하얗게만 보였다. 리히테르는 그가 쇼스타코비치임을 금세 알아보았다. 그때, 리히테르는 ‘마음이 거북했다’고 썼다. 스탈린 시대의 쇼스타코비치는 복잡한 행로를 걷고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1906년생이다. 이 연대기를 단순하게 읽어서는 안 된다. 제정 러시아 시기에 태어난 음악가들, 예컨대 1873년에 태어난 라흐마니노프 같은 음악가는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켰을 때, 이미 4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혁명은 그에게 불편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망명을 했다. 나중에 당국의 배려와 회유가 뒤섞인 협박을 받아 미국에서 귀국하려다가 사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19세기 러시아에 대한 향수가 짙게 배어 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1906년생이다. 그의 나이 11살 때 레닌의 10월 혁명이 일어났고, 따라서 그는 성장기와 청년기를 혁명 초기의 열병 속에서 살았다. 러시아의 젊은 예술가들이 지구상 그 어느 지역보다 뜨거운 실험정신으로 혁명 초기의 격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던 그 시절에, 쇼스타코비치 또한 그런 열정의 실험, 파격의 혁명, 극단의 모색을 감행했다.

그런 그가 30대에 접어들면서 스탈린 시대가 되었고, 스탈린은 1934년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천명하면서, 지나친 양식 파괴 및 인간의 인간성에 대한 파괴적인 표현을 차단했다. 오페라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으로 가부장적 억압, 즉 지극히 전근대적인 러시아적 억압에 신음하는 여인을 냉소와 자학의 방식으로 표현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후 <교향곡 5번> 같은 작품으로 자신의 신원 증명을 해내야 했다.

물론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당보다 더 인민을 사랑하고, 당보다 더 러시아를 사랑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했다. 그 무렵에도 그러했고 2차 대전 중에도 그러했으며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듯이, 쇼스타코비치에게는 망명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어느 시기에 망명을 했다면, 그는 당과 스탈린이 흡족해 할 만한 작품들을 쓰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부리나케 서방으로 망명을 떠난 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 경우 그는 망명 이후의 신체적 자유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많은 작품들이 기회를 얻기 위해 쓴 작품이 되고, 그 자신은 기회주의자로 전락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를 쇼스타코비치는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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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시대를 신경쇠약으로 견뎌내며

망명을 거부한 쇼스타코비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그래서, 우크라이나의 음습한 거리에서, 쇼스타코비치를 갑자기 마주쳤던 리히테르는 “마음이 거북했다”고 썼다. 그리고 이런 기억! 어느 날, 리히테르가 쇼스타코비치의 곡을 초견 연주(공개 연주에 앞서 연주가가 작곡가의 악보를 처음 보고 연습 없이 연주하는 것)하고 나서, 그의 집에서 코냑으로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기분이 좋아진 쇼스타코비치가 연거푸 리히테르의 잔에 술을 부었고 그렇게 밤이 깊어갈 무렵 쇼스타코비치의 부인이 귀가하였는데, 갑자기 쇼스타코비치는 사색이 되어 “어서들 가게, 어서들 가!” 하였다는 것이다. 리히테르는 그에 대하여 ‘신경과민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지극히 예의바른’ 천재였다고 썼는데, 그 한 단면이다.

스탈린 시대를 신경쇠약으로 견뎌내야 했던 쇼스타코비치는 때로 더욱더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신 사회주의적 이상과 그 영원성을 드높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아니 진정으로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사회주의를 드높이기 위해 온갖 방법과 실험을 동원하였다.

그는 평생 15개의 교향곡을 썼는데, 러시아 혁명 이후의 러시아 상황이 다양하게 반영되어 있다. 각 교향곡의 제목만 봐도 사회주의 소비에트를 소재로 한 그의 다양한 변주를 잘 알 수 있다. 2번 교향곡의 제목은 ‘10월 혁명’이고 3번 교향곡은 ‘메이데이’, 5번 교향곡은 ‘혁명’, 7번 교향곡은 ‘레닌그라드’이다. 쇼스타코비치는 흡사 평균대 위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아보려는 선수처럼 혼란한 시기를 견뎌냈다.

2차 대전 와중에 작곡한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도 그런 맥락의 작품이다. 1941년 여름 히틀러의 군대가 레닌그라드를 포위하였고, 그로부터 872일 동안, 그러니까 2년이 넘는 기나긴 시간 동안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10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면서도 항복하지 않았다. 쥐를 잡아먹으면서 버틴 것이다. 러시아는 종전 이후 레닌그라드를 ‘영웅도시’라고 불렀다. 쇼스타코비치는 그 대열에 속해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라디오를 통해 나치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고, 이 유서 깊은 도시의 이름을 딴 7번 교향곡을 작곡했다.

1953년 3월에 스탈린이 죽은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맹렬하게 작품을 발표했다. 8년 가까이 멈추었던 교향곡 작곡의 행진도 9번 이후, 15번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5개의 현악4중주곡이 있다. 베토벤이 그렇듯이, 쇼스타코비치에게도 바깥을 향한 강렬한 외침으로 15개의 교향곡이 존재한다면 그 자신의 내면을 침통하게 담아낸 곡으로 15개의 현악4중주곡이 존재한다.

스탈린이 죽은 후에는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잡았다. 이 관료적 사회주의는 직전의 철혈 통치자를 냉정하게 깎아내리고 비판함으로써 새 권력의 위상을 드높이는 방식을 취했다. 1956년부터 시작된 ‘스탈린 격하 운동’이 그것이다. 그런 정치적 격동 속에서 발표된 작품이 13번 교향곡 ‘바비 야르’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 외곽에 있는 협곡에서 벌어진 1941년 9월의 끔찍한 대학살. 이틀 동안 유대인 3만3천여 명이 독일군에 의해 처형된 이 비극을 소재로 하여 시인 예프게니 예프투센코가 작품을 발표하였고, 이를 토대로 쇼스타코비치가 13번 교향곡을 썼다. ‘체인 스모커’에 독한 술을 많이 마신 쇼스타코비치는 이렇게 15개의 교향곡을 중심으로 모두 147개의 작품을 통해 고난의 시대를 증언했다. (계속)

** 혁명기의 러시아를 겪은 두 작곡가 Ⅱ 읽기


2016 아람누리 심포닉시리즈
‘쇼스타코비치 vs. 프로코피에프’
CONCERT 1

20160524_11

일시 : 2016.7.9(토) 7:00pm

장소 :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하이든 홀)

연주 : 박영민 &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협연 : 김영욱 바이올리니스트)

대상 : 만7세 이상

입장료 : R 5만원, S 4만원, A 3만원, B 2만원

문의·예매 : 1577-7766 / 예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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