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케’의 얼굴과 새로운 천사의 얼굴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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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신작 뮤지컬 <티케> 리뷰

뮤지컬 <티케>는 극적으로, 별안간 시작된다. 등장인물 두 명-주인공 수헌의 아버지와 형 이헌-의 드라마틱한 노래로 시작하더니 사다리로 표현된 절벽에 매달린 수헌이 간신히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후배를 살리기 위해 둘을 이어주는 밧줄을 끊는다. 그는 이제 무대의 구석에 주저앉아 죽음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죽음은 녹록히 않다. 웅장한 노래를 선보이며 극의 시작을 알린 그의 아버지와 형이 쉴 새 없이 나타나 그의 정신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수헌의 마음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원망과 반성, 후회가 최고조에 달한 감정적 격랑을 겪는다. 그렇게, 극은 한 번도 쉬어가지 않고 내내 위기와 절정을 반복해서 치닫는다. 격렬한 피아노 삼중주의 반주와 수려한 노래선율이 이를 돕는다. 위기에서 시작되어 절정의 순간 극이 끝날 때까지 그 어떤 갈등도, 어떤 인물도 뒤로 물러나 쉬지 않는다. 이 극이 보여주는 이런 태도는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어울린다. 젊고, 도전적이며 예상보다 항상 한 발 더 나아간다. 가끔은 한 호흡 덜어내는 것이 쉽고 편하게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걸 알면서도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번 작품 역시, 그렇다.

고양아람누리의 상주단체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신작 공연인 <티케>는 산악인 아버지와 쌍둥이 두 아들 이헌, 수헌의 이야기다. 크레바스에 빠진 삼십 대의 수헌 앞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형이 나타나 그에게 삶을 포기하지 말 것을 종용한다. 환상과 회고를 통해 왜 아버지와 형이 수헌에 앞서 일찌감치 세상을 등져야 했는지에 대한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의 위기와 함께 진행된다. 등장인물 모두 각자의 이유로 서로에게 인정받기 위한 나름의 심각한 갈등을 겪는다. 가족 내에서의 인정투쟁과 가족 일원이 죽은 후에 이루어지는 화해는 전통적이고 익숙한 이야기의 소재다. 그 익숙함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산악인이라는, 뮤지컬 무대로 만나기 쉽지 않은 배경의 신선함이며, ‘시간’이라는 테마가 결말에 이르러 진중한 주제의식을 부여한다.

<티케>에는 두 개의 시간이 함께 흐르며 각각의 갈등이 동시에 펼쳐진다. 과거의 가족간의 갈등, 그리고 현재 죽음 앞에 선 주인공 내면의 갈등. 가족간의 갈등은 이른바 운명처럼 타고난 재능이라는 소재에 집중되는데, 쌍둥이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재능을 독식한 동생은 역설적으로 항상 형의 눈치를 보고, 형은 가족애로 컴플렉스를 극복하려고 안쓰러울 정도로 애를 쓴다. 이 둘을 점점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산사나이인 아버지의 존재다. 아무리 산을 사랑한다 한들, 그리고 아들이 자신의 재능을 물려받은 것이 확실하다 한들 의대 가겠다는 고3에게 자신과 산이나 타자고 하는 모습은 친아버지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아버지의 이런 태도는 나름 자신의 위치에서 고군분투 하는 두 형제에 대한 안타까움을 증폭시키는데, 이는 결국 두 아들 모두를 잃게 된 아버지 자신의 슬픈 죽음으로 이어진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둘째 아들이 실제로 서른넷의 나이에 산에 가서 죽을 위기에 처한 현재의 사건 때문이다. 아들은 결국 아버지의 예언처럼 산을 등질 수 없었고, 산에서 죽게 될 위험에 처했다. 하지만 이것은 저주나 운명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재능은 상당 부분 유전적인 영향을 받고, 그 영향력은 나이 들수록 강해진다는 것이 통계가 말해주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그렇게 다그치지 않았어도 결국은 자신의 재능이나 관심사를 따라 산에 올랐을 것이다. 이는 양육에 있어 기다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그러니 이것도 저것도 모두 할 수 없어 아버지를 대상으로 인정투쟁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첫째의 희생은 더욱 애잔한 것이 된다. 때로는 포기가 가장 좋은 돌파구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어렸을 때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주인공 내면의 갈등은 이른바 시간에 관련된 것이다. 과거에 발목 잡혀있는 주인공이 현재에 온전히 몰두하기 힘들다는 점을 토로한다. 그리고 마침내 과거와도 같은 크레바스를 벗어나 현실의 삶에 이르렀을 때, 감각적인 현재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을 보면서 생각난 이미지가 하나 있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평론가의 테제에 소개되어 유명해진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라는 회화 작품이다. 벤야민은 이 천사를 ‘미래를 등지고 있지만 미래로 떠밀려 가는’ 모습이라고 설명해놓았는데, 과거에서 시선을 뗄 수 없으면서도 거대한 힘에 밀려 미래로 전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이라는 이미지를 후세에 각인시켰다. 주인공의 후회는 그 자신을 과거의 시간에 갖다 놓지만 그는 거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시간은 흐르고 과거는 멀어지기 마련이며 (물리학적으로는 모두 공존한다고 하지만 인간의 감각적인 시간에 있어 오직 한 방향으로 흐를 뿐이다) 내가 서있는 현재는 과거를 바라보며 미래로 향하는 매우 모순적인 지점이다.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제대로 인지할 수가 없다. 주인공이 현재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죽음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발밑에 과거라는 폐허가 놓여있고, 그는 이제 막 그곳을 벗어났다.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제목인 ‘티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사에도 뜬금없이 등장하지만 일언반구 설명이 없는 ‘티케’는 서양 신화에 등장하는 행운의 여신이다. 서양에는 ‘티케는 뒷머리가 없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행운은 지금 현재 잡아야지 ‘나중에’ 잡으려고 하면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주인공이 잡은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바로 티케의 얼굴이다. 티케의 얼굴과 새로운 천사의 얼굴, 그 마주본 얼굴 사이 어딘가에 주인공 그리고 그걸 보고 있는 우리의 현존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글. 남궁경(자유기고가)

뮤지컬 <티케>는 2년 연속 고양문화재단 상주단체로 선정된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와 함께 한 2017 콘텐츠 파트너십 프로그램 중 하나로, 2017년 12월 21일(목)~23일(토)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 공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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