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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문예아카데미 여름특강
<나폴레옹 시대의 회화와 영화> 미리보기

영화는 대중적이다. 많은 사람과 쉽게 소통할 수 있고, 운이 따른다면 그들의 지지까지 끌어낸다. 이런 특성엔 영화가 문자 바탕의 예술이기보다는 시각적 자료에 호소한다는 점도 한 몫 한다. 물론 이제는 추상적이고, 난해한 실험영화들도 적지 않지만, 대개의 경우, 특히 초창기의 경우, 영화는 문자예술에 비해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무성영화 시절에는 문맹자들을 배려해서 가능한 중간 자막도 적게 만들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부분도 내레이터가 대신 읽어주기도 했다. 학교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들도 영화는 즐길 수 있었다. 영화는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셈이다.

레닌, 영화의 대중성을 간파하다

영화의 이런 특성을 십분 이해하여, 이를 정치적으로 적극 이용한 대표적인 정치가가 레닌이다. 레닌은 1922년 영화산업에 관한 지침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예술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이다.” 그가 주목한 것도 당시 러시아에는 문맹자가 많았다는 점, 영화는 대중을 선전, 선동, 교육시키기에 가장 가능성이 큰 매체라는 점이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1925)

영화 미학의 발달에 한 획을 그은 러시아의 ‘몽타주 이론’(편집 기술의 세련된 형태)이 전개되고, 동시에 영화사의 거장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걸작 ‘전함 포템킨’(1925)을 발표했을 때가 레닌시대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레닌은 영화를 통해 볼셰비키의 혁명론을 펼치려고 했고, 이를 적극 수행한 영화인이 바로 에이젠슈테인이다. 물론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들이 영화사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데는 그의 작품들이 선전물에 머물지 않고, ‘몽타주’라는 미학적 발전을 이룬 지점까지 나아간 덕분일 테다. 이런 점에서 레닌 시대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들은 나치시대 혹은 파시즘시대 선전영화들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영화 이전의 대표적인 시각예술은 미술이다. 미술도 문맹의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는 미덕을 갖고 있다. 그래서 유럽의 교회에는 그렇게도 많은 종교화가 걸려 있을 테다.

신도들에게 예수의 수난을 설명하는 방법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힌 책형을 그린 그림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있을까? 교회는 종교의 가치를 전파하는데, 그림을 적극 이용했다. 한 편의 그림을 보며, 신도들은 성인을 둘러싼 숭고한 이야기를 상상했다. 언어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어쩌면 그림은 더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그림은 평신도의 문학’이었다(움베르토 에코 지음, 『중세의 미학』). 그림의 대중성을 이해한 점을 놓고 보면, 성직자들은 대단한 정치가들이었다.

회화를 정치에 끌어들인 대표적인 근대의 정치가는 나폴레옹(1769-1821)이다. 나폴레옹은 훗날 스스로를 황제에 올림으로써, ‘공화국의 배신자’라는 지탄을 받기도 했지만, 젊은 시절 그는 계몽주의 지지자였다. 그가 꿈꿨던 세상도 공화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권 신분제 국가를 넘어선 공화국 건설은 청년 나폴레옹의 지향점이었다.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대상으로 정복전쟁을 펼칠 때, 전쟁의 명분으로 제시하는 문장이 주로 ‘왕권의 압제에 신음하는 민중을 해방시키려 왔다’는 것이었다(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로꼬꼬, 고전주의, 낭만주의』).

신고전주의 거장 다비드, 나폴레옹을 찬양하다

나폴레옹에게도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필요했다. 그가 주목한 것도 회화다. 18세기 계몽주의 시절, 프랑스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넘쳤다. 결국 1789년 혁명이 일어나 왕권 신분사회는 무너지고, 계몽주의의 이념을 실현한 새로운 공화국이 건설된다. 당시 나폴레옹은 20살의 초급 포병장교였다. 잘 알다시피 혁명 이후에 탄생한 공화국 프랑스의 운명은 늘 탄탄한 게 아니었다. 주변국의 위협에 시달렸고, 국가 내부의 반동세력의 도전을 받았다. 이때 등장한 영웅이 나폴레옹이다. 그에겐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자신뿐 아니라, 공화국 프랑스의 가치를 선전하는 게 필요했다. 이때 나폴레옹의 곁에서 나폴레옹을 ‘우상화’ 시키고 혁명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화가가 바로 신고전주의의 거장 자크-루이 다비드(1748-1825)이다. 레닌에게 에이젠슈테인이 있었다면, 나폴레옹에겐 다비드가 있었다.

자크-루이 다비드의 작품. 좌측 「마라의 죽음」(1793), 우측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

자크-루이 다비드도 계몽주의자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로베스피에르를 지지하는 급진파 자코뱅 단원이었다. 혁명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인민의 벗’ 장 폴 마라의 죽음을 그린 ‘마라의 죽음’(1793)에는 혁명에 대한 화가의 염원이 간절하게 드러나 있다. 다비드는 마라를 수난을 당하는 예수처럼 그렸다. 마라는 칼에 찔려 흉부에 상처를 남긴 채, 마치 예수처럼 피를 흘리며 욕조에서 머리를 떨구고 있다. 게다가 마라는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인민’을 위해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말하자면 한 명의 정치가가 성인의 수준에서 묘사돼 있는 것이다. 한 마디의 언어도 빌리지 않은 채, 공화주의자들의 고통, 염원, 꿈을 이 그림처럼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도 드물다. 죽음의 수난을 무릅쓰고도 혁명은 이어질 것이며, 그만큼 공화주의의 가치는 소중하다는 것이리다.

나폴레옹은 다비드의 그런 능력을 잊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의 와중에 ‘공포정치’의 독재자로 지목돼 단두대로 끌려갈 때, 그의 친구 다비드도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그를 감옥에서 나오게 한 뒤, 자신의 전속화가로 일하게 했다. 다비드는 수많은 그림들로 나폴레옹을 찬양한다. 특히 그 유명한 그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1)을 통해 나폴레옹을 고대의 영웅 한니발과 견주었다. 백마를 타고 설산을 넘는 나폴레옹의 힘찬 모습에서,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의 기적’을 떠오르게 했다. 곧 나폴레옹은 한니발 이후 2천년 만에 다시 나타난 역사적 영웅이란 것이다.

나폴레옹 시대의 예술을 떠올리는 이유

나폴레옹 시대의 회화를 본다는 것은 정치적 급변기의 시각예술의 전개를 확인하는 것이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미술사조를 보통 ‘신고전주의’라고 부른다. 다비드의 그림에서 잘 드러나듯 고대의 로마를 기억하는 그림들이 지배적인 흐름을 이루고 있어서다. 분명한 윤곽선과 견고한 구성, 그리고 정치적 주제를 표현한 그림들이 사랑받았다. 그런데 하나 기억해야할 사실은 신고전주의 바로 직전의 양식이 로코코라는 점이다. ‘혁명전야’의 18세기를 지배한 양식이다. 프라고나르, 부셰의 그림에서 보듯 화려하고 우아한 멋이 강조됐다. 로코코의 그림들은 풍성하고 화려했지만 이미 부패와 타락의 냄새도 풍기고 있었다. 이와 비교하면 신고전주의 그림들은 단순하고 간결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꿈과 그 꿈을 실현하고픈 힘이 보였다. 로코코가 현실의 행복을 노래했다면, 신고전주의는 미래의 목표를 바라봤다.

신고전주의는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을 만나 도덕적 우위도 점한다. 로코코는 ‘귀족’들의 취향에 봉사하는 과거의 ‘악’이라면, 신고전주의는 ‘시민’들의 태도까지 고양시키는 미래의 ‘선’이라는 것이다. 그런 신고전주의도 나폴레옹의 퇴장과 맞물려 시대의 뒤로 물러난다. 계몽의 차가운 ‘이성’, 이것에 의문을 품은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시대의 회화, 곧 신고전주의는 혁명과 함께 들불처럼 퍼져나갔고, 나폴레옹의 퇴장과 더불어 힘을 잃고 사라져버렸다.

아람문화아카데미 여름특강에 개설된 ‘나폴레옹 시대의 회화와 영화’는 ‘혁명의 시기’를 맞은 예술사조의 운명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혁명 시기의 사조인 신고전주의를 중심에 놓고, 그와 관련된 로코코와 낭만주의를 비교한다. 그런 미술형식을 십분 이용한 영화들을 보며, 혁명 시기의 세상, 그리고 그 시대의 예술의 운명을 생각해볼 것이다. 왜냐하면 어쩌면 우리는 지금 혁명에 버금가는 사회적 급변의 시기에 살고 있는 것 같아서다. 흔히 말하는 4차 산업혁명, SNS(사회 관계망 서비스)를 통한 양방향 소통시대, 문자보다는 영상물과 이모티콘 같은 이미지로 소통하는 시대, 이와 함께 전개되는 ‘대중의 약진과 의미 변화’는 감히 혁명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 폭이 크다. 이번 강의에서 현재의 변화와 비교되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이유이다.

 

글. 한창호(영화평론가)

<나폴레옹 시대의 회화와 영화>

6.21~7.26│15:30~17:30│매주 목요일

‘나폴레옹 시대’는 프랑스 혁명 이전의 계몽주의, 혁명과 공화국 건설, 이후 왕정복고까지를 총칭한다. 격동의 그 시대는 현대를 비추는 거울이며, 우리가 여전히 나폴레옹 시대를 되돌아보는 이유다. 당대의 미술사조인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의 특성을 차례로 비교해보며 한 시대의 변화를 읽어 봄과 동시에 이 특성들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발휘되는지 확인해본다.

▪ 강사 한창호
– 영화평론가
–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 영화학 전공
– <씨네21>에 ‘영화와 미술’연재를 비롯해 여러 매체에 글 발표
– 저서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 <영화, 미술의 언어를 꿈꾸다>, <영화와 오페라> 등

2018 아람문예아카데미 여름특강

기 간  6.18(월) ~ 7.31(화)

장 소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감상실

문 의  1577-7766 / www.artg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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