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짓는 방, 책 읽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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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책장’ 展 특별전 ‘책 짓는 방, 책 읽는 방’

지난해 12월 19일부터 아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예술가의 책장’ 展은 본 전시 외에도 세 가지 테마의 특별전이 함께하여 더욱 눈길을 끈다. 그 중 한 가지는 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출판의 역할과 가치를 만날 수 있는 공간, 바로 ‘책 짓는 방, 책 읽는 방’이다. 이곳에서는 상업적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우리가 지키고 조명해야 할 전통문화와 예술에 대한 출판을 이어온 열화당의 편집실과 책박물관을 엿볼 수 있다. 열화당 이수정 기획실장의 글을 통해 아람미술관에 마련된 ‘책 짓는 방, 책 읽는 방’을 만나보자. [편집자주]

‘예술가의 책장’ 展 입구

오랫동안 글과 그림을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는 일을 해 온 출판사 열화당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전인적 인간상에 주목하며 인문주의적 예술출판을 해 왔습니다. 책박물관을 함께 운영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책의 역사를 배우고 탐구하는 가운데, 지금 우리가 만드는 책이 세상의 도서관 어디쯤 꽂히는지 큰 지도가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이미 꽉 찬 서가보다는 빈 서가를 채우는 일,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아무나 선뜻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을 좀 더 촘촘하게 이해하기 위한 출판의 역할이 아닐까 합니다. 그동안 걸어온 길과 지금 하는 일을 ‘출판사’와 ‘책박물관’ 두 공간으로 나눠 소개해 보았습니다. 성찰과 소통의 매체로서의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세상에 언어가 필요할 때까지

“인간은 두 가지의, 말하자면 상보적인 언어를 보유하고 있는 셈인데, 그 하나는 인간이 체험한 것을 관념들과 그 연계의 도움으로 설명하면서 표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다소간 흐릿하게 느낀 것을 이미지들의 도움으로 구상화하는 것이다.”

– 르네 위그, 『보이는 것과의 대화』 중에서 –

인간이 표현하고 감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언어’라고 할 때, 그 중 글과 그림은 큰 영역을 차지해 왔습니다. 이 둘은 서로 보완하면서 경쟁했고, 동경하면서 때론 대립했습니다. 저는 예술가도 아니고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도 아니지만, 예술과 연관된 책을 오랫동안 만들어 온 편집자로서 예술가들이 글과 책을 대하는 태도, 문인이나 학자들이 예술을 보는 시각을 가까이서 지켜봐 왔습니다. 살아 있는 작가와 직접 만나기도 했고, 이미 세상을 뜬 이들은 그가 남긴 원고를 통해서였습니다.

“화가에게 문장은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화가 장욱진(1917-1990)은 이런 말을 하곤 했다지만 그 역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썼고, 이를 모아 낸 책 《강가의 아틀리에》는 지금도 화가의 귀중한 기록으로 읽히고 있습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통찰력을 지녔던 조각가 우성 김종영(1915-1982)은 예술가는 기술만이 아니라 확고한 이론과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다른 예술가들의 사상과 이념을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예술을 창출해야 함을 가르치고 실천했습니다. 《근원수필(近園隨筆)》(1948)로 널리 알려진 월북 화가 근원 김용준(1904-1967)은 문사철(文史哲)을 겸비한 전인적 예술가로서 그림보다 오히려 글을 더 많이 남겼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추사 김정희(1786-1856)와 같은 조선의 문인화가들은 시서화일체(詩書畵一體)를 추구했으니 글과 그림을 따로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시절이었습니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인 장 콕토는 데생과 무대미술, 영화 등 다방면의 재능을 발휘했으며,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엄청난 양의 그림과 조각 작업뿐만 아니라 자신의 건축을 지속적으로 기록하고 분석하기 위해 서른 권이 넘는 책을 직접 편집, 디자인까지 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김중업도 당대 예술가, 문인들과 교유하며 ‘예술의 종합’을 꿈꾼 건축가이자 시인이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소설가 친구의 책 표지화를 그려주고 시를 썼으며, 문학가들은 예술론을 썼습니다. 보들레르와 들라크루아, 발레리와 드가, 장 주네와 자코메티, 이태준과 김용준, 김광섭과 김환기 등 수없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책’은 글과 그림이 자연스레 뒤섞이는 매력적인 매체였고, 경계 없이 넘나들고 실험하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이었습니다.

이런 풍경은 20세기 중반으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본래 가진 총체성을 버리고 전문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술도 회화, 조각, 공예, 디자인, 건축 등으로 분과가 되고 글과 그림도 갈라졌습니다. 화가는 글을 쓰지 않고 작가는 그림을 그릴 여유가 없습니다. 예술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도 비슷합니다. 21세기 들어 통섭(統攝, consilience)이라는 개념 아래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들이 있지만, 이미 제도 교육에서 조각나 버린 사고를 다시 이어붙이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긴 역사 속에서 이미지와 문자의 대립은 존재했고, 이는 인간 문명이 어떤 경로로 진행되어 왔는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주로 입으로 전해지던 지식이 15세기 인쇄술의 발명 이후엔 문자로 대체되었고, 19세기에 사진이 발명되자 책, 신문, 잡지들의 지면에서 이미지가 글을 압도하며 대중에게 보급됩니다. 급기야 20세기 초 이미지는 지면에서 벗어나 거리의 광고판, 텔레비전을 거쳐 이젠 컴퓨터와 스마트폰에서 우리의 시선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책과 문자는 그 가치와는 별개로 수적으로 이미지에게 주도권을 빼앗겼습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생전 “우리는 너무 많이 말한다. 덜 말하고 더 그려야 할 것이다. 나로서는 말을 포기하고, 아름다운 자연처럼 이미지들로써만 말하고 싶다”며 이미지와 미술의 역할을 앞세우기도 했는데,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지금의 전도된 상황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열화당의 책들

먼 미래에 모든 정보가 뇌 속으로 바로 입력되는 때가 도래하기 전까지, 우리는 어떤 매체를 거쳐 언어로 소통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누락되고 오해되는 메시지는 불가피합니다. 글이든 그림이든 작가라면 작품 그 자체로 충분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보는 이에게 남겨 놓는 여백은 필요하지만, 이 주장의 이면에는 자신의 작품이 신비롭게 보이고 순수한 영역에 머무르기 원하는 심리도 존재하는 듯합니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오래가는 것으로 만들고, 모호한 생각을 좀 더 또렷하게 바꾸려는 노력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인간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독자나 관람자와의 소통의 경험은 오로지 하나의 길만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복수의 언어가 필요합니다. 제가 책을 만들며 만난 예술가들은 대체로 자신의 제1의 언어 외에 제2, 제3의 언어를 겸비했고, 처음엔 인식하지 못해도 점차 발견해가길 기꺼워했습니다. 시각예술이든 문학이든 우리의 내면이 어떤 언어로 온전하게 전달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표현 불가한 영역이 표현 가능한 부분보다 훨씬 넓기 때문입니다. 끝내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도달하려 하는 것이 예술이라면, 책은 그 고독한 여정에 동행하는 또 다른 언어입니다.

글. 이수정(열화당 기획실장)

2018 책의 해 특별전 예술가의 책장

기 간  ~2019.3.24.(일), 월요일 휴관

장    소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

시 간  10:00am~6:00pm

관람료   일반 5천원, 24세 이하 청소년 및 어린이 3천원

문 의  1577-7766, (031)960-0180 / www.artgy.or.kr

참여작가   노순택, 박지나, 서용선, 원성원, 유창창, 이혜승, 정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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