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입구에는 화사한 색채를 가득 담고 있는 김덕기 작가의 작업이 즐거운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초대장처럼 따스하게 관객을 맞이한다. 이어지는 한석경 작가의 영상 작업과 30여 개의 나무 조각으로 만든 설치 작업은 발리의 신비롭고 이국적인 분위기로 금세 공간을 압도한다. 작가는 발리의 해변가에 버려진 나무 조각에 여러 가지 신의 형상을 새겼다. 축축하고 거친 나무를 다듬어 신성한 존재를 부여하기까지 작가는 셀 수 없이 많은 날을 인내해야 했을 것이다. 힐링과 치유를 염원하는 여행자의 바람을 담아.
이규태 작가는 색연필과 잉크펜으로 뉴욕의 소소한 일상과 풍경을 맑은 수채화의 감성으로 담아낸다. 손바닥 크기만큼 작게 그려진 탓에 몸을 그림 가까이 붙인 채 구석구석을 천천히 살피게 된다. 한눈에 들어오는 그림이 아니라 천천히 스며드는 그림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한 이미주 작가는 특유의 밝고 경쾌한 분위기로 바르셀로나의 에너제틱한 분위기를 전시장에 고스란히 전달한다. ‘환영합니다’라는 뜻의 카탈루냐어 ‘benvingut’를 비롯하여 바르셀로나의 상징적 건물을 그린 드로잉과 카탈루냐어 텍스트로 벽면을 가득 채운 작업은 낯선 여행지에서 느끼는 가벼운 흥분과 즐거운 상상력을 자극한다.
경일메이커스와 최보희 작가는 도시의 인상을 색으로 대신한다. 경일메이커스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이브 클랭(Yves Klein, 1928~1962)의 파란색(International Klein Blue)을 배경으로 파리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에펠탑을 단순한 형태와 색으로 재구성한다. 최보희 작가는 런던의 빨간색 2층 버스와 그 앞에 나란히 줄지어 서있는 여행자의 알록달록한 캐리어로 도시의 기억과 여행의 설렘을 재현한다.
박준 작가와 이승연 작가는 여행자의 피상적인 시선을 넘어 여행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을 통해 여행의 의미를 다른 차원의 단계로 끌어올린다. 이승연 작가는 모로코, 포르투갈, 사하라 등 아프리카 여행의 경험을 판화와 태피스트리로 기록한다. 여러 가닥의 실이 섞여 하나의 직물이 되는 태피스트리는 다양한 문화와 경험을 체득한 작가가 선택한 필연적인 방식으로 보인다. 여행가 박준은 방콕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와 책을 집필한 경험을 바탕으로 방콕 여행과 관련된 사적인 수집품을 전시장에 펼쳐 보인다. 여행을 위한 노트, 지도, 티켓, 마그네틱, 텀블러 등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그 의미와 기능을 상실한 물건들이 박물관의 유물처럼 놓여 있다. 사진 작업 <트래블 바니타스>는 인생의 덧없음을 의미하는 바니타스의 도상학적 해석을 차용해 잠시 머무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여행의 유한한 속성을 비유한 것이다.
팬데믹의 장기화로 여행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물리적 고립뿐만 아니라 심리적 고립에 따른 권태와 우울을 가져오기도 한다. 국경을 넘나드는 여행은 아닐지라도 몸과 마음을 일상의 루틴에서 잠시 동안 벗어나도록 하는 것 역시 여행하지 않고 여행하는 방법이다. ‘팔팔한 도시 여행’의 짧은 여정은 곧 다가올 진짜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잊고 있던 여행 감각을 일깨우는 예행연습이 되어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