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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llo Hullo, Following on: 로즈 와일리展

영국 『가디언』(The Guardian)지의 2010년 7월 9일자 예술 섹션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지금 영국에서 가장 뜨고 있는 신예 예술가는 누구일까?”(Who is Britain’s hottest new artist?)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놀랍게도 당시 76세의 화가, 로즈 와일리였다. 일반적으로 신예 예술가라면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의 인물을 생각하기 쉬운데, 76세라니! 

올해로 87세가 된 화가 로즈 와일리

80대 작가의 여전히 젊은 감수성

로즈 와일리(Rose Wylie)는 1934년 영국의 켄트 지방에서 출생했다. 1952년 도버 스쿨 오브 아트(Dover School of Art)에 입학해 예술가로서 꿈을 키워갈 무렵, 일상이 작업을 가로막았다. 21세에 결혼해 집안일에 집중하면서 화가로서의 길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꿈은 여전히 내면에서 꿈틀거렸고, 이는 갈수록 더 커졌다.

결국 작가는 45세가 되던 1979년 영국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에 입학했다. 새파랗게 어린 학생들과 다시 동급생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작가의 작업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예술계에서 인정받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꾸준히 작업하는 예술가에게는 보답이 따르는 법. 30여 년 뒤인 2009년 뜨레드니들 프라이즈(Threadneedle Prize)의 파이널리스트 7명에 포함되었고, 2010년에는 미국 워싱턴D.C.의 국립여성미술관에서 열린 ‘주목할 여성들’ 전시에 참여하면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디언』을 통해 영국의 가장 뜨는 신예 작가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이후 로즈 와일리는 2013년 영국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과 서퍼타인 갤러리(Ser pentine Gallery)에서 전시회를 열고, 2014년에는 존 무어 페인팅 상 등을 수상하는 등 순풍에 돛을 단 배를 탄 듯 승승장구하고 있다. 세계의 유력 화랑인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 갤러리의 전속 작가가 되어 미술시장에도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2021년, 이제 87세가 된 ‘노작가’는 여전히 자신의 ‘젊은’ 감수성을 작업에 쏟아 붓고 있다.

Rose Wylie, 「NK(Syracuse Line-Up)」, Oil on Canvas, 185×333cm, 2014, Photo by Soon-Hak Kwon

자유분방하면서도 세련된 감각

이 작품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에서 6월 23일(수)부터 9월 26일(일)까지 로즈 와일리의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하는 것이다. 특히 아람미술관 리뉴얼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6m가 넘는 초대형 작품을 포함해 회화, 드로잉, 설치미술 등 100여 점을 선보인다. 이 중 10점은 신작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Hullo Hullo, Following on: 로즈 와일리展’. 여기서 ‘Hullo’는 인사인 ‘헬로(Hello)’를 영국식으로 쓴 단어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안녕 안녕, 나를 따라와’ 정도가 될 듯하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다양한 작업 세계를 ‘영감의 아카이브’, ‘테이트 모던의 VIP룸’, ‘축구를 사랑한 그녀, 그리고 손흥민’, ‘보통의 시간들’ 등 4개의 소주제로 나누어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로즈 와일리가 보여주는 넓은 스펙트럼의 작업 세계를 총망라했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토트넘 홋스퍼 FC(Tottenham Hotspur Football Club) 팬인 작가가 축구를 소재로 여러 작품을 그린 점이 재미있다. 2006년에 그린 「Yellow Strip」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한데, 7m가 훌쩍 넘는 큰 캔버스에는 노란 유니폼을 입은 축구 선수들의 모습을 유머러스에게 표현했다. 토트넘 홋스퍼 소속의 손흥민 선수를 그린 작품도 선보여 관심을 끈다. 그 외에도 「Six Hullo Girls」 「Scissor Girl」 「Red Painting Bird, Lemur and Elephant」 「NK(Syracuse Line Up)」 등 로즈 와일리의 작업 세계를 잘 드러내는 큰 작품들이 전시장을 채운다.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원색의 형상들은 동심(童心)을 보여주는 듯하고, 즉흥적이며 자유분방한 느낌의 유쾌한 작품들이 많다. 특히 작가가 그린 화면에는 그림뿐만 아니라 글을 캔버스에 함께 쓰는 경우가 많은데, 그림과 글씨가 모여 작가의 그림일기 같은 느낌도 준다. 대중문화 속 만화나 아이들의 그림 같은 느낌의 작품들은 유치하지 않고 오히려 세련된 색감과 선이 돋보인다.

Rose Wylie, 「Yellow Strip」, Oil and Chalk on Canvas, 183×777cm, 2006, Photo by Soon-Hak Kwon

차근차근 쌓아올려 만든 인간 승리

나이가 어릴 때부터 일찍 인기를 얻고 성공하는 미술작가들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대다수 작가들은 젊었을 때부터 꾸준히 작업을 지속해 말년에 자신의 예술적 성과를 평가받는다. 로즈 와일리가 76세에 신예 작가로 떴다고 언론이나 세상은 호들갑스럽게 떠들지만, 사실 작가는 젊은 시절인 1950년대에 미술학교에 다녔고, 1979년 영국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에 다시 다니면서 이미 형태와 색, 소재, 내용 등에서 자신의 예술적 방향을 고민해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상의 무게가 그의 작업을 잠시 멈추도록 했지만, 결국 40대 중반부터 다시 작업을 시작하면서 담아낸 자신의 예술적 고민과 아이디어, 영감이 76세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게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종종 이야기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꿈, 재능을 일상 속에 묻어버린다. 작가가 비교적 늦은 시기인 45세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작업 생활을 시작했다는 점, 30여 년 뒤에 그 작업 세계를 인정을 받은 예는 그래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예술적인 성취 외에도 또 다른 의미에서 ‘인간 승리’라고 하겠다.

조선 후기에 강세황이라는 사대부 화가가 있었다.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그 또한 세상의 눈을 피해 자신만의 학업과 예술을 갈고닦으며 세상으로부터 은거해 있었다. 결국 왕의 부름에 세상의 한복판으로 나왔을 때가 61세. 이후 시(詩), 서(書), 화(畵) 삼절로 일컬어지면서 79세에 타계할 때까지 남겨놓은 다양한 예술적 업적은 조선 후기 예술계의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아마 로즈 와일리도 마찬가지이리라.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찬사를 보낸다. 코로나19가 만연한 시대, 코로나 블루의 영향으로 하루하루가 우울한 요즘, 허투루 낭비할 인생이란 없다고 외치는 로즈 와일리의 전시를 통해 인생의 또 다른 의지를 불태워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작가가 보여주는 소중한 일상과 유쾌한 상상력의 세계를 즐기는 것은 기본이고 말이다.

Rose Wylie, 「Julieta(Film Notes)」, Oil on Canvas, 206×500cm, 2016, Photo by Soon-Hak Kwon

글. 류동현 미술 저널리스트
사진 제공. UNC, Choi & Lager, David Zwi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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