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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어 읽는 미술책 ①
화이트 & 네이페의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는 그간 사람들이 ‘빈센트 반 고흐’라는 한 천재의 삶에 덧붙인 환상들을 다 떼어내고, 살이 있고 피가 도는 한 명의 사람으로 오롯이 호출해낸 전기다. 그런데 책 제목에 박힌 생경한 명칭 ‘판 호흐’는 과연 무엇일까.

허술한, 인간적이었던 판 호흐

만약 길 가는 아무나 붙잡고 “가장 유명하고 위대한 서양 화가는?”이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가장 많이 호명될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도 그의 이름은 피카소와 더불어 쌍벽을 이룰 것이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그는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드문 화가다. ‘자화상’과 ‘해바라기’ 시리즈 등 개성 있는 작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열정과 광기의 화신’으로 살았던 그의 인생 자체가 유명세를 더한 것도 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한 불운한 화가. 정신질환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받다가 자기 귀까지 자른 남자. 거듭되는 좌절에 못 이겨 권총 자살로 세상을 떠난 가엾은 사람. 얄궂게도 죽은 후에야 최고의 천재로 칭송받는 화가. 이보다 극적으로 산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반 고흐는 신화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반 고흐의 진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신화가 그의 진정한 모습을 가리고 있다면?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는 그간 사람들이 ‘빈센트 반 고흐’라는 한 천재의 삶에 덧붙여진 환상들을 다 떼어내고, 살이 있고 피가 도는 한 명의 사람으로 오롯이 호출해낸 전기다. 그런데 책 제목에 박힌 생경한 명칭 ‘판 호흐’는 과연 무엇일까.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인이었다. 국립국어원 외국어 표기법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핀센트 판 호흐’로 불리는 것이 맞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이름을 네덜란드식으로도, 생전 주 활동 나라였던 프랑스식도 아닌 영어식으로 부르고 있다. 아마 이미 너무도 익숙해 원칙대로 바꾸기엔 소모적이어서 그럴 것이다. 원래는 <반 고흐: 더 라이프(Van Gogh: The Life)>였던 책 제목을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로 완전히 바꿔 출간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신화가 되기 전의 핀센트 판 호흐는 빈센트 반 고흐보다 훨씬 허술해 보이고 보다 인간적이다. 그는 “부랑자 같은 외모, 텁수룩한 수염, 직접 다듬은 머리, 가늠하기 힘든 억양을 가진, 허수아비 같은 사람”이었고 “성적인 사진과 책으로 가득한 주머니를 들고 다니던” 남자였다. 책 속에 나오는 일화만 보아도 그는 사람들에게 쉽게 호감을 주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마주 보고서 이야기하는데 누군가가 한쪽에 나타나면, 그는 눈만 돌려 그를 보는 게 아니라, 머리를 통째로 돌리곤 했다… 그와 잡담을 나누는데 새가 지나가면 그냥 흘끗 보는 대신 머리를 통째로 들어 무슨 새인지 확인하곤 했다. 그런 태도는 그의 시선에 고정된 기계 같은 표정을 부여했다. 헤드라이트처럼.” (908쪽)

핀센트 판 호흐, 「회색 펠트모자를 쓴 자화상」(Self-Portrait with Grey Felt Hat), 44.5×37.2cm, 1887, 판호흐미술관 소장

책이 밝힌 판 호흐에 대한 타살 주장

하지만 무엇보다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가 ‘반 고흐 신화’를 제일 배신하는 지점은 이것이다. 바로 ‘판 호흐 타살설’. 미술학계의 ‘자살설’과 완전히 상치되는 설명이다. 이 책이 해외 언론에 유독 주목받고 회자됐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와 스티븐 네이페는 왜 ‘판 호흐는 자살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일까. 일단 저자들은 판 호흐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총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판 호흐는 총에 관해서 는 아무것도 몰랐고 사고가 난 현장이나 주변 어디에도 총이 발견되지 않았다.

둘째, 자살을 시도했다면 총상이 직선으로 나타나야 하는 반면 그의 몸에 남은 총알 각도는 비스듬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가까이에 대고 쏘았다면 총알은 몸을 관통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총알은 판 호흐의 척추에서 멈췄다. 그가 즉사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후 행동은 더 이상하다. 판 호흐는 총상을 입은 채로 평소 머물던 하숙집까지 몇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이것이 과연 자살을 시도한 사람의 행동이냐고 반문한다. 이 모든 정황은 판 호흐가 타살됐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판 호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일까? 놀랍게도 책은 용의자의 이름까지 밝혔다. 바로 당시 판 호흐와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십 대 소년 르네 세크레탕(Rene Secretan, 1874~1957)이 그 주인공. 판 호흐가 사망하던 해에 16세였던 세크레탕은 약사의 아들로 파리의 유명한 콩도르세 국립 고등학교를 다니던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매해 여름 아버지의 별장이 있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와서 낚시와 사냥을 하며 방학을 보내던 그는, 1890년 여름 판 호흐와 만난다. 문제는 세크레탕이 판 호흐를 ‘놀리고 괴롭히기 좋은 만만한 상대’로 여겼다는 데 있다. 세크레탕은 훗날 82세가 된 1956년에 프랑스 작가 빅토르 두이토와 함께한 인터뷰에서 이미 자신의 ‘악행’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 적도 있었다.

“판 호흐의 커피에 소금을 넣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가 커피를 뱉어내며 화가 나서 욕하는 광경을 지켜보기도 했고 그의 물감상자에 풀뱀을 넣기도 했어요. 그것을 발견했을 때 판 호흐는 까무러칠 뻔했지요. 또 판 호흐가 생각 중일 때 가끔 마른 붓을 빤다는 것을 알아챈 나는, 그가 보지 않을 때 붓에 고춧가루를 문질러 두기도 했는데 이는 판 호흐를 발광하게 만든 행동이었습니다.”(943쪽 내용을 간략히 편집)

세크레탕은 친구들을 이끌고 평소에도 판 호흐를 건드리곤 했는데, 사건 당일에도 판 호흐를 놀리며 쫓아가는 중간에 우발적으로 총을 쐈다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실제로 세크레탕은 항상 카우보이 옷을 입고 다니며 총 쏘는 흉내를 내곤 했던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핀센트 판 호흐, 「삼나무가 있는 밀밭」(A Wheatfield, with Cypresses), 72.1×90.9cm, 1889, 런던내셔널갤러리 소장

타살설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

이러한 파격적 내용으로 점철된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가 2011년에 출간되자, 누구나 예상했듯이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출간 이후에 전개된 이야기가 더욱 흥미진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의 저자들은 학계의 공격에 시달렸는데, 아마 저자들의 ‘출신 성분(?)’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는 하버드 대학 ‘법학’ 교수이고, 스티븐 네이페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인문학’ 교수이다. 미술학계 밖에 있는 사람이 기존 미술학계 정설을 깨부수겠다고 나선 꼴이었으니 당연하지 않았을까. 이윽고 판 호흐 연구의 권위자인 루이 반 틸보르흐(Louis Van Tilborgh) 박사가 등판했다. 어쩌면 그는 학계 밖의 도발을 과학적으로 응징해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빼든 카드는 판 호흐의 총상을 치료한 의료인의 기록이었다. 반 틸보르흐에 따르면 “판 호흐의 상처 주위에 갈색과 보라색이 도는 후광 같은 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총구가 배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발사되어(즉 스스로 총을 몸에 대고 쏘아서) 화약 열로 인해 상처를 입은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 저자들은 가만있었을까? 그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마음으로 아예 총상 분야 최고 전문가인 미국의 병리학자 빈센트 디 마이오(Vincent Di Maio) 박사를 찾아가, 동일한 의료기록을 넘겼다. 결과는, 놀라웠다. 디 마이오 박사마저도 ‘판 호흐는 자살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그에 따르면, 기록에 적힌 ‘갈색과 보라색 후광 같은 원’은 총알이 살을 뚫고 들어갈 때 피부 아래 실핏줄이 터지면서 생겼거나, 바로 죽지 않고 살아남아 멍이 든 경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살하기 위해 총을 몸에 가까이 대고 쐈다면 총알 자국 주변에 탄약가루와 그을음 등이 문신처럼 생겨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나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어느 누구도 판 호흐의 몸에서 갈색 동그라미 찰과상은 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디 마이오 박사는 총을 쏜 사람의 옷이나 신체 일부에는 반드시 연소되지 않은 화약 가루가 남기 마련이지만, 판 호흐의 신체나 옷 어디에서도 화약 성분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타살설의 중요한 근거로 들었다.

이런 결과가 발표된 후, 분위기는 어떻게 변했을까. 단번에 기존 ‘자살설’을 뒤집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무시하지는 못할 학설이라는 표지는 얻게 되었다.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의 작은 승리였다고 할 법하다. 이때 책의 저자들에게 의미심장한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판호흐미술관의 큐레이터가 익명으로 보낸 편지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 생각으로는 판 호흐가 자신의 힘든 삶을 끊기 위해 아이들의 실수로 인한

사고를 덮어주려고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판 호흐의 자살이 미술 순교자의 마지막을 웅장하게 장식했잖아요. 그건 일종의 면류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판 호흐의 ‘타살설’을 믿고 있다는 고백의 편지인 셈이다.

핀센트 판 호흐, 「자화상」(Self-Portrait), 54.5×65cm, 1889, 오르세미술관 소장

학계 카르텔 너머에서 탄생한 ‘돌연변이’ 평전

하지만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의 저자들이 촘촘히 증명했음에도, 여전히 판 호흐의 ‘자살설’은 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왜일까. 판 호흐는 ‘자살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판 호흐의 독특한 아우라, 그의 전설과 신화를 완성하는 직소퍼즐 중 마지막 조각이 ‘자살’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이야기일까.

나는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가 탄생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저자들이 미술학계 밖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저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낸 익명의 큐레이터의 행동이 이를 방증한다. 그는 왜 공개적으로 책의 저자들의 손을 들어주진 못하는 걸까. 학계는 좁다. 모두가 선배, 스승, 동료로 끈끈히 묶여 있다. 그 상황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웠을 터. 반대로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의 저자들은 학계 카르텔에서 자유로웠기에, 압박 없이 연구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이 많고 많은 ‘빈센트 반 고흐’ 평전 중에서 단연 튀는, ‘돌연변이’ 책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다.

신화가 된 예술가들은 핀센트 판 호흐 말고도 많다. 그들에겐 또 어떤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인가. 신비스런 후광을 용감히 걷어낼, 또 다른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 같은 책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려본다.

글. 이유리(작가)

‘뒤집어 읽는 미술책’은 미술 전문 도서를 통해 미술가와 미술작품, 당대의 미술계가 품고 있던 풍부한 이야기들을 재미있고 친절하게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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