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받지 못한 사랑의 격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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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연출로 다시 만나는 오페라 ③
드미트리 체르냐코프 연출의 차이콥스키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러시아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물으면 알렉산더 푸시킨을 꼽는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나 레닌 같은 정치가, 대문호 중에서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를 넘어선다. 그도 그럴것이 19세기 러시아 오페라의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 중 절반 이상이 푸시킨 원작이다. 러시아 오페라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사랑을 받는 <예브게니 오네긴> 역시 푸시킨 원작이다. ‘응답받지 못한 사랑의 격통’을 멋지게 그려낸 드미트리 체르냐코프의 빼어난 연출로 이 걸작을 살펴본다.

엇갈린 사랑의 비극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예브게니 오네긴>(1878)은 역시 푸시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1837) 원작인 <스페이드 퀸>(1890)과 더불어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의 대표적인 오페라다. 교향악과 실내악 작곡가였던 차이콥스키는 오페라에서도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는데 이는 바로크 시대의 헨델, 고전주의 시대의 모차르트, 20세기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정도에서나 찾을 수 있는 무척 보기 드문 사례다.
극의 배경은 1820년대 러시아 시골이다. 타치아나와 올가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방 귀족의 딸이다. 자매의 성향은 아주 이질적이다. 타치아나가 내성적이고 책을 좋아하는 반면 동생 올가는 외향적이다. 올가는 렌스키라는 시인과 결혼을 약속했는데, 하루는 렌스키가 오네긴이라는 남자를 데리고 온다.
대도시 출신인 오네긴은 삼촌의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 이곳에 머물고 있지만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졌다. 공부도, 연애도, 도박도 얼마든지 해봤고 인생은 고리타분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시니컬한 사내다. 시골 생활은 더더욱 지루해하던 차에 외국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 렌스키를 알게 되어 유일한 친구로 삼은 터였다.
렌스키는 책을 많이 읽은 타치아나를 오네긴과 맺어주려 한다. 타치아나는 첫눈에 오네긴에게 반한다. 그동안 소설에서나 봤을 법한 타입의 남자가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수줍은 연정을 담은 편지를 밤새 써서 오네긴에게 보내고 두근거리며 답을 기다린다. 하지만 도회의 세련된 여인들과 사귀어본 오네긴에게 타치아나는 아직 촌티가 남은 소녀였을 뿐. 오네긴은 편지를 돌려주며 세련된 어법으로 완곡히 구애를 거절한다. 타치아나는 완전히 좌절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타치아나의 영명축일에 렌스키에게 이끌려 억지로 파티에 온 오네긴은 무도회에서 올가를 독차지하는 행동으로 렌스키를 도발하고, 질투심으로 상처받은 렌스키는 결투를 신청한다.
그리고 며칠 후 결투에서 렌스키는 목숨을 잃는다. 의도하지 않게 친구를 죽인 오네긴은 도의적 책임으로 6년간 해외로 떠돌았고, 그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 늙은 친척이자 전쟁영웅인 그레민 공작의 파티장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레민의 아내가 된 타치아나를 발견한다.
타치아나는 이전의 그 소녀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세련되게 변해 있었다. 이번에는 오네긴이 사랑의 열병에 빠진다. 밤새 편지를 써 타치아나에게 보내고 그녀를 찾아가지만, 타치아나는 사랑과 책임 속에 번민하다가 오네긴을 거절한다. 오네긴은 큰 수치심 속에 절망한다.

타치아나와 오네긴

깊이 있는 캐릭터 설정

드미트리 체르냐코프의 연출

모스크바 태생의 드미트리 체르냐코프(Dmitri Tcherniakov, 1970~ )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연극 연출가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21세기 들어 오페라 쪽에서 훨씬 큰 성과를 빚어낸 거장이다. 기존의 이야기를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여 무대에 올리는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연출자 중심의 오페라) 연출에서 천재적 감각을 발휘한다.
무대장치와 의상도 직접 디자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무대는 심심한 미니멀리즘을 피하는 대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의 무대에 약간의 변형만 가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1막 : 터져 오르는 타치아나의 감정
오프닝 장면에서 타치아나는 유리창에 손을 대고 바깥을 바라보는 뒷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소설에서 읽었던 멋진 남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외로운 여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머니 라리나 부인과 여동생 올가는 전혀 다르다. 수시로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타치아나와는 정반대요, 그녀의 외로움을 전혀 모르는 것만 같다.
렌스키가 오네긴을 데려왔을 때 타치아나는 물론 올가조차 그에게 반한다. 체르냐코프는 올가가 더 적극적인 관심을 표하고, 연인 렌스키를 시시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여준다.
2장에서 타치아나가 밤을 새워 편지를 쓰는 그 유명한 장면은 끝 부분에 이르러 놀라움을 더한다.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창문이 와락 열리더니, 샹들리에 불빛이 폭발하듯 꺼져버리는 연출로 타치아나 내면의 터져 오르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그 순간 누구나 언젠가는 겪었을 사랑의 격통과 환희를 느끼며 타치아나에게 공감하게 된다.

1막에서 타치아나가 편지를 쓰는 장면

2막 : 사랑을 잃고 싶지 않은 처절한 노래
1장 타치아나의 영명축일 무도회 장면은 올가를 유혹한 오네긴에 대한 렌스키의 질투가 핵심이다. 무도회에서 파트너를 바꿔 춤을 추는 것은 상식인데도 심약한 렌스키는 자기보다 잘난 오네긴이 연인을 채갈까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체르냐코프는 여기에서 놀라운 방법을 사용했다. 프랑스 노인 트리케가 부르는 축하 노래를 렌스키가 부르는 것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타치아나에게 바쳐진 노래를 자신이 대신 부름으로써, 올가의 집안 사람들에게 아부해서라도 사랑을 잃고 싶지 않은 필사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측은하기 짝이 없다. ‘응답받지 못한 사랑’은 타치아나만이 아니라 렌스키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다.
2장의 결투 장면도 체르냐코프는 실내 공간으로 처리했다. 무대를 좀처럼 바꾸지 않는 그의 스타일 때문이다. 오네긴은 렌스키와의 결투에서 그를 해칠 생각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되는데, 체르냐코프는 장총을 들고 빨리 결판을 내자는 렌스키를 오네긴이 말리다가 오발 사고로 상대가 죽는 것으로 처리했다.

2막에서 타치아나의 영명축일 축하 노래를 대신 부르는 렌스키

3막 : 뒤늦게 깨달은 사랑이 주는 큰 울림
친구를 죽이고 오랫동안 외국에 머물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오네긴. 체르냐코프는 시골에서 그토록 빛나는 남자였던 오네긴이 대도시의 화려한 사교계에서는 아웃사이더처럼 소외당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웨이터와 손님들은 물론 심지어 호스트인 그레민 공작도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뒤늦게 알아본 다른 손님들도 형식적인 인사만 나눌 뿐, 한때 이곳에서도 특이한 성격으로 소문났던 오네긴과 대화를 하려 하지 않는다.
마지막 3막 2장의 시작 장면에서 체르냐코프는 그레민 공작과 초조하게 대화하는 타치아나를 보여준다. 원작과 달리 오네긴과 있었던 과거의 문제를 남편에게 다 털어놓고 도움을 청한다. 그레민은 구석에 숨어 이후의 상황을 지켜보게 된다.
오네긴이 나타나 타치아나에게 자신과 함께 도망쳐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을 하소연한다. 타치아나는 그 요구를 거절했다가, 옛 사랑의 감정이 솟구쳐 결국 받아들일 뻔했다가, 다시금 현실을 깨닫고는 거절한다. 그 순간 그레민이 급히 나타나 타치아나의 팔짱을 끼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아내를 이해하고 보호할 줄 아는 남자! 남편감으로는 그레민이야말로 오네긴보다 백배 나은 남자가 아닐까.

3막 그레민 공작의 파티장

<예브게니 오네긴>은 드라마의 배경과 등장인물의 성격조차 크게 바꿔버리는 평소 체르냐코프의 급진적 성향과 비교하면 온건한 해석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오네긴, 타치아나, 렌스키, 올가, 라리나 부인, 그레민 공작의 캐릭터를 훨씬 깊고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써 굉장한 감동을 준다. 이 공연을 보고 격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사랑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 아닐까.

추천영상

2008년 볼쇼이 오페라의 파리 가르니에 실황

 

 

지휘 알렉산더 베데르니코프
연주 볼쇼이 극장 오케스트라 & 합창단
출연 마리우스 크비에첸(오네긴), 타치아나 모노가로바(타치아나), 안드레이 두나예프(렌스키), 마르가리타 맘시로바(올가), 마크발라 카스라시빌리(라리나 부인), 아나톨리 코르체가(그레민 공작)

코로나19로 2020년 10월 안타깝게 타계한 알렉산더 베데르니코프가 볼쇼이 극장의 음악감독이던 2008년에 지휘한 실황이다. 볼쇼이 극장 멤버 전원이 프랑스 파리의 가르니에 극장을 찾아와 공연했다. 타이틀 롤을 노래한 폴란드의 바리톤 마리우스 크비에첸을 제외한 모든 출연진이 러시아 가수들이다.
특히 타치아나 역을 맡은 타치아나 모노가로바 덕분에 ‘Tatiana sings Tatiana’가 되었는데, 그야말로 타치아나의 부활이라 할 정도로 노래와 외모, 연기까지 거의 완벽하게 어울린다. 알렉산더 두나예프도 유약한 시인 렌스키를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도록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늙은 라리나 부인 역을 맡은 마크발라 카스라시빌리는 1970~80년대 볼쇼이의 간판급 소프라노로 특히 타치아나 역으로 유명했던 명가수다.
최근에 한글 자막이 제공되는 블루레이로 재발매되었고, 26분짜리 보너스 영상이 수록돼 프로덕션의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글. 유형종(음악·무용 칼럼니스트)

‘명연출로 다시 만나는 오페라’는 현대적이고 도전적인 연출로 관객들에게 신선한 감흥을 안겨준 오페라 프로덕션을 유형종 칼럼니스트가 엄선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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