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탄생, 평범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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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예술가 열전 ⑦
허먼 J. 맹키위츠 : <맹크>(2020)

2020년 가을. 코로나19의 기승으로 전 세계 영화산업이 극도로 위축된 가운데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맹크>가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했다. 역사상 최고의 영화로 손꼽히는 명작 <시민 케인>을 둘러싼 평범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영화로, 우리가 80년간 알고 있던 빛과 그림자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어디서나 최고의 영화로 꼽히는 <시민케인>

지난 수십 년간 유수의 영화 잡지, 영화 사이트, 영화 단체들이 이른바 ‘역사상 최고의 영화’들을 뽑아 빅 10, 베스트 50, 톱 100 등의 리스트를 만들어 발표해놓은 것들이 있다. 워낙 줄 세우기와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대중들이고, 이런 기사는 영화 팬들에겐 일종의 인기투표 같아서 나름 공신력 있는 단체들이 내놓은 차트에 늘 설왕설래가 오가곤 한다.

재밌는 건 이 리스트들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금은동 메달권 영화’ 몇 개가 아예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권위 있는 단체일수록 <시민케인>(1941), <카사블랑카> (1942), <대부>(1972) 같은 고전작 서너 편이 돌아가며 1위를 차지하는 ‘조삼모사 순위’를 선정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

그러다 보니, 개봉한 지 거의 100년이 다 되어가는 이런 영화들이 정말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인지, 평론가들의 허세인지, 권위주의와 전관예우의 인습인지 격렬한 논쟁도 심심찮게 일어나곤 해서 영화 팬들에겐 언제나 질겅질겅 씹을 수 있는 새콤달콤한 풍선껌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가 금메달 단골손님 <시민케인>으로 들어서면 논쟁은 대개 파국으로 치닫고 마는데, 이 작품에 대한 평가도 제각각이고 해석도 분분한 데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적고 의외로 안 본 사람도 많아서 그만 토론이 싸늘하게 식어버리기 때문이다.

영화 <맹크> 속의 허먼 J. 맹키위츠

80년 만에 다시 비춘 빛과 그림자

<시민 케인>은 1941년 미국 영화사의 거목 오슨 웰스가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제작, 대본, 감독, 주연까지 1인 4역을 한 영화로 사실 오늘날에 봐도 비범한 구석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명작임엔 별 이론이 없다.

주인공인 찰스 포스터 케인이라는 백만장자의 흥망성쇠를 그려낸 이 흑백 영화는 당시 언론 재벌인 윌리엄 허스트를 모델로 삼았다는 논란이 증폭되면서 당시 미국사회에 큰 반향을 던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등장인물과 소재보다 영화적인 구성과 테크닉, 그리고 예술성이 인정받아 개봉한 지 꼭 80주년이 되는 지금도 영화학도들과 마니아들에겐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던 와중 2020년 가을. 코로나19의 기승으로 전 세계 영화산업이 극도로 위축된 무렵 데이비드 핀처(David Fincher) 감독의 영화 <맹크>가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했다. <시민 케인>이 영화 천재 오슨 웰스가 북치고 장구 쳐서 만든 작품이었고 허먼 J. 맹키위츠는 그저 대본의 감수 정도를 했다고 막연하게 생각한,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맹크>는 경종을 울렸다.

오슨 웰스는 치기 어리고 성질 급한 젊은 감독일 뿐이고 정작 <시민 케인>은 노련하고 의식 있는 작가 맹크의 손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영화 <맹크>는 우아하고도 정밀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할리우드 황금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완벽하게 고증하고 흑백으로 촬영해 그 영화적인 완성도에 관객과 평론가들은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영화 <맹크> 포스터

아는 만큼 보이지만, 몰라도 충분히 매력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크>는 진입장벽이 꽤 높은 영화다. ‘도대체 맹크가 뭐야? 밍크? 뭉크? 사람 이름이었어?’라는 질문을 나름 영화 좀 아는 사람들도 한다. 게다가 <세븐>, <파이트 클럽>, <나를 찾아줘> 같은 스릴 넘치고 흥미진진한 영화를 만들어온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최신작이라고 해서 덥석 영화를 본 사람들은 ‘감독의 변신’에 당황하기 십상.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맹크’ 허먼 J. 맹키위츠와 오슨 웰스, 그리고 영화 <시민 케인>을 알아야 하는 건 기본이고, <시민 케인>의 모델 윌리엄 허스트(William Hearst)와 매리언 데이비스(Marion Davies)의 염문도 이해해야 하며 무엇보다 1930~40년대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시스템과 당시 사회 분위기를 이해하고 있어야 납득이 가는 신(scene)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시민 케인>이 화성이나 금성 이야기인 사람들에게 <맹크>는 안드로메다쯤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봐도 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위대한 배우 게리 올드만(Gary Oldman)이 주인공 맹키위츠 역을 맡은 덕분이다. 지난 40년간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주연과 조연, 영웅과 악당(주로 악당)을 오가며 보여준 그의 명품 연기를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2시간 11분짜리 흑백영화를 기꺼이 관람했다.

보너스로, 매리언 데이비스 역을 맡아 1930년대의 아름답고 지적인 여성을 연기해낸 이제는 30대 중반의 원숙한 배우 아만다 사이프리드(Amanda Seyfried)의 연기를 보는 눈 호강도 선사한다.

<맹크>는 2021년 4월에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포함 총 10개 부문의 후보에 올라 올해 최다 노미네이션 영화가 되었고 촬영상과 미술상을 수상했다. 사이프리드 또한 꿈에 그리던 오스카 연기상 후보에 올랐지만 실력과 관록을 자랑하는 한국의 한 원로배우(윤여정)에게 밀려 수상은 하지 못했다.

일러스트레이션. 권오섭

재조명이 기대되는 우리네 영화사

서기 2100년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나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에 얽힌 비화를 엮어 영화가 나온다고 상상해보자. 80년이 지나도 논쟁하고 공부하고 평가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하고도 행복한 일일 것이다.

예술과 문화는 하루아침에 한두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이 80년 전 영화와 작가를 조망해 이야기보따리를 풀듯이 우리도 우리의 이야기를 찾고, 연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소감에서 배우 윤여정이 故김기영 감독에게 헌사를 보낸 건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었다. 김기영과 윤여정 그리고 <화녀>(1971)에 관한 영화가 나온다면 데이비드 핀처와 개리 올드만의 <맹크>보다 훨씬 재밌지 않을까?

무엇보다 안드로메다로 간 영화 팬들이 모두 지구로 돌아올 테니 생각만 해도 훈훈한 일이다.

글. 권오섭(영화 칼럼니스트)

‘영화 속 예술가 열전’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예술가들의 삶을 권오섭 작가의 독특한 시선으로 풀어내, 그가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보여주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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