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사이’에 숨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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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읽는 세계 연극 ⑩ 영국 편
해럴드 핀터의 <배신>
세계적인 문화예술 수도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영국 런던. 대중음악을 비롯해 문학, 영화, 미술, 공연,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예술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영국은 특히 극문학에 있어 셰익스피어 이래 약 500년간 차원이 다른 역사를 써내려 왔다.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일구어낸 영국 연극 특유의 감수성과 실험정신을 해럴드 핀터를 통해 짚어보자.

나라와 나라가 기차 몇 시간이면 서로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럽에서, 섬나라 영국의 위치는 다소 이질적이다. 물론 이제는 해저터널로 쉽게 대륙과 이어질 수 있지만 오로지 배를 타고만 넘어갈 수 있던 시절,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고립된 섬나라라는 지리적 특성은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전 영역에 두루 영향을 미쳤고, 영국이 자기들만의 전통과 문화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지리적 조건은 영국의 해양에 대한 관심과 기술을 발달시켜 이들이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엘리자베스 1세 통치 시기부터 강력한 해군과 함대를 바탕으로 신대륙 발견과 식민 지배를 시작한 영국은 이후 북아메리카와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로 적극 진출했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까지 세력을 넓혔다. 전 대륙에 걸쳐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다 보니, 24시간 중 어느 한 곳은 해가 떠 있었다는 데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란 수식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대영제국의 위상은 이제 흘러간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그 화려한 번영의 기반을 다졌던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에 배출한 한 작가 덕분에, 영국은 여전히 연극에서만큼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년 365일 전 세계 모든 나라의 극장을 통틀어 볼 때, 지구상에서 셰익스피어(W. Shakespeare)의 작품이 올라가지 않는 날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이다.

이제는 영국을 넘어 연극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셰익스피어를 필두로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피터 셰퍼(Peter Shaffer), 존 오스번(John Osborne), 카릴 처칠(Caryl Churchill), 톰 스토파드(Tom Stoppard), 데이비드 헤어(David Hare), 사라 케인(Sarah Kane) 등 수많은 작가들이 위대한 영국 극작의 전통을 이어왔고, 내셔널 시어터(National Theatre), 로열 코트 시어터(Royal Court Theatre) 등 런던의 주요 극장들은 각 시대마다 새롭고 도발적인 극작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해 왔다. 200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해럴드 핀터(Harold Pinter) 역시 이 ‘해가 지지 않는’ 영국 극작의 계보를 잇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런던에 위치한 영국 국립극장(National Theatre). 극장 운영과 레퍼토리 개발에 있어 전 세계 국립극장들에게 하나의 전형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해럴드 핀터의 연극 <배신>은 1978년 6월 15일 바로 이곳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당시 실제로도 부부 사이였던 페넬로페 윌튼(Penelope Wilton)과 다니엘 매시(Daniel Massey)가 ‘엠마’와 ‘로버트’를 연기했다.

매우 핀터스러운 핀터의 연극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해럴드 핀터의 작품은 비교적 자주 상연되는 친숙한 레퍼토리 중 하나지만, 사실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인물의 성격이나 동기를 과감하게 무시하고, 애매모호한 상황과 언어들을 쏟아내는 그의 작품들은 종종 관객을 미궁에 빠뜨리곤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핀터는 바로 그러한 이유로 새로운 연극적 감수성을 개척했다는 찬사를 받으며 200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실제로 문학, 연극 용어 사전에 그의 이름을 딴 ‘핀터레스크’(Pinteresque)라는 형용사가 올라가 있을 만큼 핀터의 극 세계는 남다르고 독특한 개성을 자랑한다.

전혀 극적이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은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존재의 위기와 위태로운 인간관계, 그 속에서 드러나는 거짓과 위선들. 특히 1978년 작 <배신>(Betrayal)은 바로 이러한 ‘핀터스러운’ 핀터 극의 특징을 간결하고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핀터는 “두 사람만 있으면 파워 게임이 존재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인간관계를 철저히 권력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작가였는데, 그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배신>은 두 친구 제리와 로버트, 그리고 로버트의 아내 엠마 사이에 벌어진 불륜을 통해 모든 관계를 파워 게임으로 바라보는 핀터의 시선을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제리, 로버트, 엠마 세 인물만이 등장하는 <배신>은 표면적으로는 세 남녀의 삼각관계와 불륜이라는, 다소 진부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각각 문학을 전공한 제리와 로버트는 대학 시절부터 함께해온 절친한 친구 사이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운동을 하고, 함께 씻고, 술을 즐기며 우정을 확인하고, 문학과 인생을 논하며 돈독한 관계를 이어왔다. 1968년, 로버트는 갤러리 큐레이터인 엠마와 결혼식을 올리고 집에서 파티를 여는데, 여기서 엠마에게 반한 제리는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대시를 하고, 엠마 역시 남편과 다른 분위기로 자신에게 접근하는 제리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한다. 결국 두 사람은 로버트 몰래 불륜 관계를 시작하고, 각자의 결혼 생활을 지키는 동시에 자기들만의 아파트를 마련해 틈틈이 밀회를 이어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여행을 떠난 이탈리아에서 엠마에게 보낸 제리의 편지가 로버트의 손에 우연히 들어오면서 로버트는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 채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엠마는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만, 로버트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엠마 또한 제리에게 아무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2년 후, 이후로도 꾸준히 만나던 엠마와 제리의 밀회가 뜸해지고, 두 사람은 결국 불륜을 시작한지 7년 만에 스스로 자신들의 관계를 끝내고 아파트를 정리한다. 그리고 다시 2년 후, 엠마는 로버트와 이혼에 합의한 뒤 오랜만에 제리를 불러 술 한 잔을 함께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연극이 바로 이러한 시간 순서를 정확히 거꾸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극의 첫 장면은 이혼하기로 합의한 엠마가 오랜만에 제리를 만나 술 한 잔을 함께하는 것으로 시작되며, 극의 마지막은 바로 엠마와 로버트의 결혼 축하연에서 제리가 엠마에게 다가가 유혹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일러스트레이션 · 정유나

무엇이 가장 큰 배신인가

해럴드 핀터의 <배신>에는 제목 그대로 수없이 많은 배신들이 등장한다. 표면적으로는 우정을 배신하고 친구의 아내를 유혹한 제리와 남편을 배신하고 제리와 불륜관계를 맺어온 엠마가 가장 큰 배신자처럼 보이지만, 한 장면 한 장면 따라가다 보면 제리와 엠마의 불륜 외에도 작품 안에 수많은 거짓과 배신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불륜을 남편에게 4년 전에 고백했으면서도 그 사실을 제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엠마, 훨씬 오래 전부터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음에도 내색하지 않았던 로버트, 몇 년간 이어진 동거를 (거의 일방적으로) 끝내버린 제리, 제리와 뜨겁게 연애 중이면서도 남편의 아이를 가진 엠마, 아내의 불륜을 눈감으면서 자신도 혼외 관계를 가져온 로버트. 이렇듯 세 사람은 끊임없이 상대를 속이고 진실을 숨기며 복잡한 관계를 이어나간다. 끝없이 얽히고설킨 그들의 거짓과 배신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대체 누가 누구를 배신한 것인지, 무엇이 진짜 배신인지 모호해지는 지경에 이른다.

한편 <배신>은 구조적으로 매우 독특한 형식을 보여주는데, 바로 제리와 로버트, 엠마의 삼각관계를 시간상 역순으로 그려낸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불륜 관계를 청산한 뒤 오랜만에 다시 만나 어색하고 서먹해하는 제리와 엠마의 재회로부터 시작되는 첫 장면은 그로부터 2년 전, 다시 1년 전, 이런 식으로 거꾸로 흘러가 엠마와 제리가 처음 키스를 하고 서로에게 끌림을 느끼던 9년 전의 장면으로 끝나게 된다.

주위가 안 보일 만큼 뜨거운 열정으로 타올랐다가 천천히 식으면서 변질되고, 결국 흔적도 없이 소멸해가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큰 ‘배신’은 엠마와 제리, 로버트 사이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바로 사랑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들 사이에 거리가 생기고, 거짓이 생기고, 그리하여 결국은 아무 감정도 없는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리는 이 씁쓸하고 허무한 과정이야말로 가장 슬프고도 본질적인 배신인 것이다.

사랑이 끝난 뒤에서 시작해 사랑이 싹트는 지점까지, 역순으로 흐르는 세 남녀의 사연은 이러한 씁쓸함을 한층 생생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극적 장치이다.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이 역순 구조가 ‘삼각관계’라는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소재를 새롭고 참신한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극이 진행될수록 점점 과거로, 더 과거로 향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과거사를 드러내는 동시에 현재 그들이 겪는 감정과 서로 숨기고 있는 진실을 깨닫게 해준다. 또한 이미 첫 장면에서 식어버린 정열의 초라한 끝 모습을 목격한 관객들은 극이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점점 더 뜨거워지는 제리와 엠마를 바라보며 로맨틱한 무언가를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자조와 환멸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영국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가 ‘제리’로 출연했던 영화 <배신>(1983)의 트레일러 영상

작가와 관객이 벌이는 퍼즐 게임

해럴드 핀터의 연극은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작품 <배신>에서 세 남녀가 나누는 대화 역시 수많은 침묵과 사이(pause)들로 가득 차 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침묵이라 할지라도, 다음 장면을 보고 다시 돌이켜보면 왜 그때 그(혹은 그녀)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때문에 이 연극은 관객의 적극적인 상상력이 극의 해석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관객은 공연 내내 마치 퍼즐 게임을 하듯이, 작가가 생략한 부분과 숨겨놓은 부분들을 찾아내고 침묵과 사이의 뉘앙스를 통해 인물의 진의를 파악해야 한다.

제리 : 자네한테 할 말이 있네. 중요한 거야.

로버트 : 말해보게.

제리 : 그러지.

사이

로버트 : 자네 얼굴이 너무 굳었네.

사이

무슨 일인데 그래?

사이

에마와 자네 얘긴 아니겠지?

사이

그 얘긴 다 알고 있어.

제리 : 그래. 나도… 들었어.

로버트아.

사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안 그런가? 몇 년 전에 끝난 일 아닌가.

제리 : 중요해.

로버트 : 그래? 왜?

제리는 일어서서 주위를 서성인다.

해럴드 핀터, <배신>, 《해롤드 핀터 전집 8》 중, 정경숙 역, 평민사, 2005.

이렇듯 의도적으로 인물과 대화에 있어 구체적인 원인과 결과를 제거한 채, 혹은 숨긴 채 진행하는 핀터의 연극은 담담한 사실주의 극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부조리해 보인다. 어쩌면 핀터가 바라보는 우리의 삶, 이 세상 또한 부조리극과 다를 바 없을는지도 모른다.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침묵과 알 수 없는 사이들로 가득 채워진 세계. 매우 ‘핀터스러운’ 핀터의 작품들이 여전히 난해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유 역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글. 김주연(연극평론가)

필자 김주연은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고, 월간 <객석>에서 연극 담당 기자로 활동하면서 『우리 시대의 극작가』(공저)를 출간했다. 연극학으로 박사 학위를 마친 뒤 현재 연극평론가와 드라마터그, 그리고 연극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명작으로 읽는 세계연극’ 시리즈는 세계 연극사에서 손꼽히는 희곡들을 국가별로 한 편씩 골라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 작가가 희곡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각해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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