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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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란 예술가의 작품에 대한 해명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예술가의 마음속까지도 들어가 볼 수 있어야 한다.
즉, 예술가가 창작에 쏟아 붓는 정열에 의해 받게 되는 엄청나게 큰 압력을 느끼면
평론가는 그것 또한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H.L. 멩켄, 미국의 저널리스트

밥 딜런 「Like a Rolling Stone

평론가의 글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사람들에게 기준을 제시해준다. 작품을 접한 개인들이 느낀 점을 대신해서 정확하고 유려한 문장을 통해 서술해 준다거나, 작품의 창작 의도를 전문가적 시점에서 재해석하여 대중들이 작품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말이다. 평론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문화와 예술에 대한 대중의 갈망을 이해하고,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사람들이 문화와 예술을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랜 과거부터 평론가와 평론을 위해 존재하는 매체와 모임은 존재해왔다. 사회지식인 계층의 한 축이 이루고 있던 그들은, 대부분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 교수이거나, 그 자신이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던 작가이거나, 평론을 위한 잡지를 펴내던 편집장들이었다. 이렇게 과거의 예술 문화 평론이 특정한 계층에 속하거나 특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라면, 오늘날은 ‘평론가’라는 직업은 존재할지라도 그 계층과 직업이 평론이라는 콘텐츠를 독점하지 않는다. 이제는 저마다 자유롭게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보는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극장에서 볼 영화를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있었다. 검색 포털 사이트의 영화 정보 페이지에는 관객 별점과 평가를 볼 수 있는 섹션이 있고, 이를 참고하여 볼만한 영화를 찾아보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가벼운 어투와 비속어로 영화에 대한 신랄한 평가를 던지는 글이나, 단순히 “재밌었다”는 식의 일기 같은 글이 대다수이긴 하나, 그 자신이 평론가가 된 듯, 자못 진지하게 영화에 대한 감상과 관전 포인트를 알려주는 글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문득 머릿속으로, 영화잡지를 정기구독하고 거기에 실린 편집장의 글과 평론가들의 비평문을 보며 볼만한 영화를 추천 받아왔던 십 수 년 전 과거가 생각이 나, 생경한 기분이었다.

이젠 사람들 누구나 평론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포털사이트, 블로그, 커뮤니티 등의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낮아진 진입 장벽, 대중과의 실시간 소통을 통해 빠르게 자신의 글을 써서 대중에 보여주고 확산시킬 수 있고, 그들 중 몇몇은 TV나 라디오 같은 매체에 출연할 정도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나 평론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은 평론가의 직업윤리적인 행동 규범을 퇴색시킨다. 평론가란 한 사람의 저널리스트로서 주관적 경험에 대한 객관적 서술, 그에 걸맞은 팩트체크로 작품에 대한 예술적인 보완점까지 찾아 제시할 수 있어야 하지만, 요즘은 너무나도 쉽게 평론가라고 불리울 수 있는 까닭에 그런 것들을 느끼기도 전에 글발만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기 때문이다.

요 근래, 모 유명 평론가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파면 팔수록 괴담’이라는 제목으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올라오는 그에 대한 글들은, 평론가로서의 자질과 과거 이력에 대한 비난과 조롱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가벼운 본질과 편협한 사고가 대중들에게 들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유명세에 취해 있던 그를 보며, 비평의 글을 쓴다는 것을 고급스럽게 보이는 문장과 소재들로 꾸며서 자신의 허영과 공명심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할 것이라면 차라리 초등학생 일기같이 “정말 재미있고 유익했다”라고 단순하게 쓴 글이 더 진솔하면서 발전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갖게 했다.

평론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보일 평론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어떤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글이 다른 누군가에게 평가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창작물과 예술에 대한 리스펙트가 없는 평론은 대중들에게 앞으로 더 혹독한 공격을 받을 것이다. 깍듯이 예의를 차린 신사에게는 욕 한마디 하기 어렵지만, 거칠고 예의 없는 불한당에게는 얼마든지 돌을 던질 수 있는 게 인지상정이니 말이다. 예술가의 고뇌와 창작의 고통을 이해하고, 발전적인 방향을 제시하면서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평론으로 주목 받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유려한 글발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글. 김승훈(TA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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