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앤’을 만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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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앤ANNE>

다음에 설명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주근깨, 빼빼 마른 체형, 그리고 양 갈래로 곱게 땋아 내린 빨간 머리. 전혀 모르겠다면 할 수 없지만, 세 가지 힌트만으로도 누군지 감이 온다면 정답을 맞힐 확률은 매우 높다. 정답은 바로 ‘앤’이다.

뮤지컬 <앤ANNE>의 각 장은 각기 다른 3명의 ‘앤’이 출연해 극을 이끌어간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앤의 성장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누구나 내면에 품고 있는 ‘앤’을 소환하도록 하는 설정이다.

한 세기 넘게 사랑 받은 소녀, 앤

‘앤’은 지금으로부터 111년 전인 1908년, 캐나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발표한 소설 <빨간 머리 앤>의 주인공이다. 소설은 고아 소녀 앤이 커스버트 남매에게 입양된 후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빨간 머리 앤>은 작가 몽고메리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으로 지금까지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지만, 다섯 번이나 출판 거절을 당하는 등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출판된 후 그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첫 출판 후 채 1년도 되지 않아 6쇄를 찍었고, 몽고메리는 이에 힘입어 1939년까지 앤을 주인공으로 한 후속작을 발표했다.

몽고메리는 총 8권의 앤 시리즈를 발표했고, 말년에 완성했으나 출판은 하지 못했던 <블라이스 가의 단편들>(The Blythes Are Quoted)도 2009년에 출판되었다. 한편, 2008년에는 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앤이 입양되기 전의 이야기를 담은 <빨간 머리 앤이 어렸을 때>(Before Green Gables)가 발표되었다. <빨간 머리 앤이 어렸을 때>는 비록 몽고메리의 작품은 아니지만, 몽고메리 후손들에게 앤 시리즈로 인증받았다.

몽고메리가 집필한 앤 시리즈 9권 중 6권은 앤이 입양된 후부터 중년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나머지 3권은 앤의 아이들과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각 편마다 제목이 다른데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빨간 머리 앤>은 시리즈 첫 편의 제목이다. <빨간 머리 앤>의 원제는 <Anne of Green Gables>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초록 지붕의 앤’ 정도가 된다. 여기서 초록 지붕은 앤을 입양한 커스버트 남매의 집을 가리킨다. 우리에게 원제보다 <빨간 머리 앤>이라는 제목이 익숙한 까닭은 1979년에 일본에서 제작된 TV 애니메이션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1985년에 처음 소개된 이 애니메이션은 80~90년대에 꾸준히 재방송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으며 <빨간 머리 앤>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은 고아에 예쁘지도 않지만, 평범한 현실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진솔한 모습이 사랑스럽기만 하다.

앤이 세상에 소개된 지 벌써 한 세기가 지났지만, 앤의 인기는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그 인기 요인은 이야기와 캐릭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빨간 머리 앤>은 앤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성장해가는 모습을 따라가면서 가족, 우정, 사랑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인 앤은 자신도 인정한 결점 투성이라는 것이다. 고아에, 예쁘지도 않고, (앤이 말하기에) 끔찍한 빨간 머리를 갖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끊임없이 자신 생각을 솔직하게 재잘거리고, 평범한 현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현실의 고통과 괴로움에 상상력을 더해 극복하는 앤은 사랑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그녀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데, 어쩌면 바로 이것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하는 근본적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앤은 소설 밖으로 뛰어나와 여러 장르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애니메이션 외에도 영화나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사랑받았다. 작품에 따라 조금씩 각색되었지만, 앤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외모나 성격은 거의 원작 그대로 재현되었다. 뮤지컬도 있다. 앤의 고향인 캐나다 샬럿타운에서 열리는 축제에서는 1965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뮤지컬 <빨간 머리 앤>을 공연하는 기록을 세우고 있다. 지난해에는 또 다른 뮤지컬이 뉴욕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 관객들 사이에서 잔잔하지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었다. 바로 극단 걸판이 만든 <앤ANNE>이다.

소박하다 못해 투박하기까지 하지만, 보는 내내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뮤지컬 <앤ANNE>. 덕분에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앤의 진솔함과 상상력을 닮은 뮤지컬

극단 걸판은 지난 2005년 안산에서 창단한 이래 연극, 뮤지컬을 넘나들며 꾸준히 창작극 작업을 펼쳐 왔으며, 2016년부터는 (재)안산문화재단 공연장 상주단체로 활약 중이다. <앤ANNE>은 극단 걸판이 2015년부터 선보인 ‘명랑음악극’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초연 이후 매년 꾸준히 공연되며 사랑받았다.

<앤ANNE>은 걸판여고 연극부 연습실에서 시작한다. 어떤 작품을 공연하게 될지 궁금해 하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빨간 머리 앤’을 공연할 것이라고 말한다. 학생들이 저마다 주인공 ‘앤’을 연기하겠다고 투닥거리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무대에는 ‘빨간 머리 앤’의 이야기로 바뀐다.

명랑하고 유쾌한 뮤지컬을 만들겠다는 극단 걸판의 취지에 걸맞게 <앤ANNE>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즐겁다. 극 설정이 고등학교 연극부 공연이다 보니, 극 중간에 역할 쟁탈전 같은 코믹한 장면도 곳곳에 삽입되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또 한 번에 긴 호흡으로 이야기가 이어지기보다는 짧은 호흡으로 빠르고 경쾌하게 진행되어, 오래 집중하기 어려운 어린이 관객이나 공연 관람이 익숙하지 않은 관객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앤ANNE>의 ‘빨간 머리 앤’은 극중극으로 진행되는데, 앤이 초록 지붕 집에 오는 날부터 학교를 졸업하는 날까지를 다룬다. 이야기는 크게 세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 장에서는 새로운 가족을 만나고, 친구를 사귀고,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고 또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앤의 모습을 담았다. 각 장의 사건과 이야기는 꽤 단순하고 명료하기에 사건의 전개보다는 각 상황에서 드러나는 앤의 감정들이 돋보인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까봐 생기는 불안, 누군가에게 처음 받아들여졌을 때의 기쁨, 외모 지적에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분노처럼 일상적으로 누구나 느끼는 감정들이 꾸밈없이 터져 나온다. <앤ANNE>은 이런 감정을 예측할 수 없는 타이밍에 과장된 음악과 만화적인 연출로 표현하는데, 언제든 자기 감정을 솔직하고 과장되게 표현하는 앤을 닮았다.

앤을 닮은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상상력이다. <앤ANNE>은 여러모로 관객들이 기대하는 뮤지컬과는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 뮤지컬 하면 화려한 볼거리와 음악을 기대하기 쉽지만, <앤ANNE>은 그런 뮤지컬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소박하고, 어떤 면에서는 투박하기까지 해서 약간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것이 <앤ANNE>의 매력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특유의 상상력으로 현실의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앤처럼 <앤ANNE>은 아주 사소한 아이디어로 큰 변화를 만들어낸다. 남자 역할을 위해 급히 섭외한 이웃 남고생은 갑자기 마차를 끄는 말로 변신하고, 칠판에 선을 그으면 교실이 금세 다른 장소로 변한다. 그렇다 보니 공연을 보는 내내 관객도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때가 많은데, 덕분에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앤ANNE>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각 장마다 앤을 연기하는 배우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앤의 성장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누구나 앤이 겪었던 일을 경험하진 않았지만 앤이 느낀 감정들은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것이다. <앤ANNE>은 음악, 연출, 상상력 등을 동원해 앤과 관객의 감정의 공감대를 단단하게 형성하며,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앤을 소환하기에 이른다.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품은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소녀. 동시에 주체적으로 삶을 꾸려나가며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는 사람. <앤ANNE>은 어른이 되면서 잊어버렸던 내 안의 ‘앤’을 상기시킨다. 극 초반 학생들이 앤을 소개하면서 부르는 ‘누가 앤이야, 내가 앤이야, 우리가 앤이야’라는 가사처럼 <앤ANNE>은 “바로 당신이 앤”이라고 전한다.

글. 최영현(스테이지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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