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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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발레단 <호두까기인형>

올해, 코로나19는 여전히 기세를 부리지만, <호두까기인형>이 돌아온다. 머지않아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리라는 기대는 조금 내려놓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일상의 힘을 믿기 위해 우리는 여느 때처럼 들뜬 마음으로 <호두까기인형>을 기다린다.

발레단에서 <호두까기인형>은 나이테 같은 작품이다. 연중에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이다가도 연말이면 한 해를 갈무리하는 의식처럼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엔 코로나19로 인해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의 공연이 모두 취소되었다. <호두까기인형>이 없는 연말을 보내며 발레 무용수 및 애호가들은 일상이 당연하지 않음을 절감했다. 올해, 코로나19는 여전히 기세를 부리지만, <호두까기인형>이 돌아온다.

유니버설발레단 <호두까기인형> 가운데 1막 ‘눈송이 왈츠’

결코 쉽지 않았던 <호두까기인형>의 탄생

<호두까기인형>(1892)은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작품이다. 전망은 밝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극장에서 극장장 이반 브세볼로즈스키(Ivan Vsevolozhsky),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Pyotr Tchaikovsky)의 드림팀이 <잠자는 미녀>(1889)를 성공적으로 선보인 후 곧바로 착수한 후속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창작자들은 작업에 들어가자마자 E.T.A. 호프만(Ernst Theodor Wilhelm Hoffmann)의 동화 <호두까기인형과 생쥐왕>을 바탕으로 각색한 대본이 발레에 적합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1막 슈탈바움 가문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는 아이들이 뛰노는 장면이 느슨하게 이어지고 2막 과자의 나라는 춤이 나열되는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이다. 다시 말해 1막은 이야기에, 2막은 춤에 치우쳐 있다.

여기에 주인공이 어린이라는 점도 낭패였다. 어린이는 어려운 춤을 출 수 없고, 주역 무용수인 사탕 요정은 2막 끝에서야 단 하나의 파드되(pas de deux)를 춤춘다. 여러모로 전형적인 ‘고전발레’ 양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창작자들의 개인적인 어려움도 이어졌다.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오페라가 극장 레퍼토리에서 석연치 않게 빠지자 기분이 상했고, 오랫동안 도움을 받은 후원자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과의 관계가 파탄난 데다 연이은 창작 작업에 지쳐 작곡을 1년 미루었다. 작곡에 다시 착수했을 때에는 여동생 알렉산드라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프티파에게도 난관이 이어졌다. 연이은 작업으로 지쳤을 뿐 아니라 15살 난 딸이 다리를 절단하고 합병증으로 죽었다. 딸의 끔찍한 수술과 죽음을 목격한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공연을 3개월 앞둔 시점에 병이 났다.

<호두까기인형>의 작곡가 차이콥스키

자유분방한 세계에서 고전발레의 세계로

위기와 절망 속에서도 작업은 진행되었다. 차이콥스키는 자신을 드로셀마이어에, 여동생을 사탕 요정에 대입하며 작곡에 의욕을 보였다. 마법사 드로셀마이어가 크리스마스 파티의 모든 소동을 꾸며내고 사탕 요정이 통치하는 과자의 나라를 만들어낸 것처럼, 그는 작품을 통해 여동생을 기렸다.

사탕 요정의 파드되가 유독 비장한 멜로디로 시작된다는 점, 파리에서 구한 건반악기 셀레스타로 “분수가 흩어지는 듯한 소리”를 구현하는 데 공들인 점은 여동생에 대한 차이콥스키의 애착을 보여준다.

한편 프티파의 후임으로 차석 발레마스터인 레프 이바노프(Lev Ivanov)가 합류했다. 프티파의 그늘에 가렸던 이바노프는 프티파가 꼼꼼히 설계한 세계 속에서도 시적인 환상이 가득한 ‘눈송이 왈츠’를 만들어냈다. 단순한 동작들을 복잡한 패턴으로 엮고 꼬는 방식으로 흩뿌리던 눈송이가 점차 굵어지며 눈보라로 휘몰아치다가 고요해지는 풍경을 생생히 구현했다.

어렵게 탄생한 작품이지만 초연은 환영받지 못했다. 비평가들은 ‘차이콥스키 최고의 발레곡이 어리석은 넌센스에 낭비되었다’거나 ‘어떤 조건에서도 발레라 불릴 수 없다’고 혹평했다. 무엇보다도 무질서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참을 수 없어 했다. <잠자는 미녀>의 왈츠에서 줄 맞춰 화환을 들어 올리는 아이들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아이들의 발레이지만 아이다움은 용인되지 못한 것이다.

<호두까기인형>이 품었던 유년의 자유분방함과 달달한 몽상은 러시아 혁명을 거치며 퇴색되었다. 1919년 개혁파 안무가였던 알렉산드르 고르스키(Aleksandr Gorskii)는 19세기풍의 장식을 벗기고 사실적인 이야기로 만들었다. 과자의 나라가 클라라의 꿈이었을 뿐이라는 설정으로 극의 논리성을 강화하고, 클라라와 호두까기인형 역할을 어린이가 아닌 성인 무용수가 맡게 하여 러브라인을 삽입했다.

1934년에 선보인 바실리 바이노넨(Vasili Vainonen)의 버전 역시 고르스키의 맥을 잇는다. 그는 웃음과 장난이 가득한 세계를 질서정연한 고전발레의 세계로 바꾸었다. 1막에서 왕자와 공주, 쥐왕이 등장하는 인형극을 삽입하여 클라라가 앞으로 겪을 모험을 엿보게 하고, 2막에선 클라라가 사탕 요정의 춤을 구경하는 대신 직접 사탕 요정이 되어 춤추게 함으로써 전체 작품을 클라라의 성장담으로 정리했다.

바이노넨 버전은 오늘날 마린스키발레단 및 세계 여러 발레단에서 공연하는 버전의 토대가 되었다. 어린이들은 클라라에 감정이입하여 모험을 겪고 성인 관객 역시 클라라의 춤을 감상할 수 있기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버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드로셀마이어로 대변되던 초현실적인 뉘앙스나 어린이들의 떠들썩함이 옅어진 것은 아쉽다.

유니버설발레단 <호두까기인형> 가운데 1막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

위기를 겪어낸 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1986년부터 매년 선보여온 유니버설발레단의 <호두까기인형> 역시 바이노넨 개정을 바탕으로 하되 발레단의 역대 예술감독인 애드리언 델라스(Adrienne Dellas), 로이 토비아스(Roy Tobias), 올레그 비노그라도프(Oleg Vinogradov), 그리고 유병헌의 개정이 켜켜이 쌓여 있다.

뉴욕시티발레단의 창립단원이던 토비아스가 조지 발란신 버전에 따라 어린 클라라와 설탕 요정을 구분했었다면, 키로프발레단(현 마린스키발레단)의 예술감독을 역임한 비노그라도프는 키로프의 바이노넨 전통에 따라 어린 클라라와 성인 클라라를 나눴다. 국립발레단이 볼쇼이발레단의 유리 그리고로비치 버전을 채택하여 성인 무용수가 어린 클라라부터 성인 클라라까지 모두 소화하는 것과 구별된다. 그러고 보면 <호두까기인형>처럼 발레단의 혈통과 지향점을 드러내는 작품도 드물다.

바이노넨 버전의 중심축은 클라라가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변신하는 장면이다. 순진했던 소녀가 위기의 상황에 개입하여 용기 있는 행동으로 세상을 바꾼다. 쥐왕에게 밀리는 호두까기인형을 돕기 위해 슬리퍼를 던지는 데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긴 전투가 끝난 후 클라라와 호두까기인형은 서로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어른이 된다. 그들은 변했다. 위기를 겪어낸 자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한 해를 건너뛰고 돌아온 <호두까기인형>도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지겨운 돌림노래로 치부할 수 없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 지켜낸 일상이니 말이다.

유니버설발레단 <호두까기인형> 가운데 2막 ‘과자의 나라’ 로즈 왈츠

글. 정옥희(춤연구자)
사진 제공. 유니버설발레단

고양문화재단에서 알려드립니다

이 포스트에 소개된 프로그램 가운데 일부 혹은 전부는 코로나19 확산 상황에 따라 (포스트 제작 당시와 달리) 일정이 변경되었을 수 있으며, 추후에도 진행 여부 및 일정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이 점 널리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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