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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어 읽는 미술책 ②

학창 시절, 미술 교과서를 수놓았던 서양미술 대가들을 기억하는가.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각자의 기억을 더듬어보길 바란다. 당장 피카소, 빈센트 반 고흐, 미켈란젤로 등 눈부신 이름들이 떠오를 것이다. 모두가 서양미술사에서 빠질 수 없는 위대한 예술가들이다. 그런데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모두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는 점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의 반은 여성이라고 하는데, 왜 이제껏 우리가 보고 듣고 배워왔던 위대한 예술가들은 죄다 남성일까. 여성들은 서양미술사에서 무슨 이유로 약속이나 한 듯 증발했을까.

예술의 객체로 대접받았던 여성 화가들

요한 조퍼니(Johan Zoffany, 1733~1810)의 그림 「영국 왕립미술원 회원들」은 이 의문을 푸는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영국 왕립미술원 회원들」은 1768년 왕립미술원 설립을 기념하여 창립회원들을 그린 그룹 초상화이다. 그런데 의외의 사실이 있다. 그림 속에서 여성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창립회원 명단에 앙겔리카 카우프만(Angelika Kauffmann, 1741~1807)과 메리 모저(Mary Moser, 1744~1819)라는 두 명의 여성 화가가 있었으니 더욱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조퍼니는 「영국 왕립미술원 회원들」에 그녀들을 분명히 그려 넣었다. 어디 있을까? 답은 오른쪽 벽 상단에! 조퍼니는 두 여성 회원의 상반신 초상화를 배치함으로써 왕립미술원 회원들을 ‘모두’ 담아낸 것이다.

이 그림은 당시 여성 화가들의 처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그림 속에서 왕립미술원의 남성 회원들은 미술에 관한 열띤 논의를 하고 있지만, 두 여성 회원은 이 토론에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영국 왕립미술원 회원들」에서 카우프만과 모저의 초상화는 그저 부조 작품이나 석고상들과 나란히 놓여 있다. 즉 예술 생산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표현된 셈이다. 「영국 왕립 미술원 회원들」에서 카우프만과 모저가 그려진 방식은 서양미술사 속에서 여성 화가들이 어떻게 대우받아왔는지 은연중에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 조퍼니, 「영국 왕립미술원 회원들」(The Academicians of the Royal Academy), 101.1×147.5cm, 1771~1772년, 캔버스에 유채, 영국 로열컬렉션 소장

여성 화가들의 자화상은 생존신고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대의 분위기가 그랬다. 남성은 기성 화가의 작업실에서 일을 하거나 아카데미에 다니며 기술을 익히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지만, 여성의 경우 배움의 길이 열린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19세기 후반까지 대부분의 미술학교는 여성의 입학을 제한했으며, 결혼 후 여성이 경력을 지속할 수 있는지 여부는 순전히 남편의 손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여성 화가들은 늘 ‘있었다’. 이처럼 온 세상이 여성 화가의 존재 자체를 기를 쓰고 거부하는 것 같은 분위기에서도 말이다. 이 책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이 그 사실의 증거다. 책의 저자인 미술사학자 프랜시스 보르젤로(Frances Borzello)는 “여성 예술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언하고 주장했다”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의 놀라움은 점점 더 커져갔다. 많은 수의 자화상이 있다는 데 놀랐고, 그 다양성에 놀랐다. 소심함뿐 아니라 독창성에도 놀랐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화상은 내 눈으로 목격한 증거, 즉 여성의 자화상은 남성의 자화상과 다르며, 부족한 교육과 미온적인 지원을 이야기해온 전통적인 여성의 역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요청해왔다.”(21쪽)

그렇다면 여성들은 백인 남성이 만든 서양미술사에서 어떻게 목소리를 내어왔는가. 역사 속에서 누락된 채 정당한 자리를 박탈당한 여성 화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남았나. 보르젤로가 소환한 여성 화가들의 자화상은, 그런 의미에서 여성 화가들의 생존신고서와 다름없다. 그 생존신고서에서 여성들을 대하는 당대의 태도와 관습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는 건 필연일지 모른다.

프랑스의 화가 마리니콜 뒤몽(Marie-Nicole Dumont, 1767~1846)의 자화상이 대표적이다. 마리니콜 뒤몽은 화가의 딸이었다. 물감 냄새가 배어 있는 집에서 자라서인지 그녀는 자연스레 붓을 들었다.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은 딸이었기에 어쩌면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겠다는 야망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혼 뒤 그린 자화상에서 그녀는 웬일인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보르젤로는 그녀의 그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용수 같은 그녀의 자세와 그에 반응하는 아기의 뻗은 팔은 미소 짓게 만든다. 그녀는 아들이 누워 있는 요람의 베일을 들어 올림으로써 아기가 그녀가 그리고 있는 초상화만큼이나 중요한 창조물임을 암시한다.”(112쪽)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프랜시스 보르젤로 지음, 주은정 옮김, 368쪽, 아트북스, 2017

가부장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그녀들의 노력

이뿐 아니다. 그림 속 그녀가 캔버스에 한창 그리고 있는 인물은 남편 프랑수아 뒤몽. 남편의 시선 아래에서, 마리니콜 뒤몽은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아들을 돌본다. 마치 자신의 본분은 ‘현모양처’라는 걸 잊지 않았다는 듯이.

그녀가 이런 방식으로 자화상을 그린 연유는 무엇일까? 마리니콜 뒤몽처럼 재능이 충만한 여성조차 당대의 가부장적 시선을 의식하며 작업해야 했던 것이다. 미술계에서 여성들은 기득권 남성 집단이 충분히 ‘좋다’고 여길 때에만 내부에 진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세기 동안 ‘좋다’의 항목 안엔 여성 화가의 작품이 훌륭한 질을 담보해야 한다는 것뿐 아니라 남성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도 함축돼 있었다.

따라서 여성 화가들은 자화상을 그릴 때, 남성들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부분까지도 고려해야 했다. 재능과 숙련된 기술 외에도, 가부장 사회가 만족하고 용인할 만한 ‘증표’를 매번 짜내야 했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르젤로는 여성 화가의 자화상을 남성 자화상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장르로 보아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일례로 프랑스의 화가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Élisabeth Vigée Le Brun, 1755~1842)의 「자화상」을 보자. 20세기 이전 여성 화가들이 상대적으로 드물었다는 사실은 뒤집어 말하면 그들이 상당한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당시 남성 컬렉터들은 탐욕적으로 여성 화가의 자화상을 소유하는 데 열을 올렸다.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남성이 보기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외모의 여성 초상화가’라는 개념에 남성 컬렉터들이 일제히 매료됐기 때문이다.

비제 르브룅은 남성들이 원하는 이 ‘신기루 같은’ 이미지에 부합하려 노력했다. 현재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 중인 비제 르브룅의 「자화상」은 그 노력의 결과다. 「자화상」 속 비제 르브룅의 모습은 가부장 사회가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을 만큼, 온화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캔버스에 붓질을 하는 ‘화가’의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이 그림은 인기를 끌었고, 앞다퉈 이 그림을 원하는 남성들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그녀는 1790년에 그린 이 작품을 6점이나 복제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보르젤로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은 타당해 보인다.

“여성의 자화상이 보여주는 다양성은 여성은 뛰어난 모방가이기는 하지만 독창성은 없다는 오랜 믿음이 거짓임을 드러낸다. 당대의 지배적인 여성성의 개념에 부합해야 된다는 요구 속에서도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고 신념을 밝히며 당대의 기준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빼어난 이미지를 찾는 데 이들은 용케 성공했다.”(299쪽)

마리니콜 뒤몽, 「작업 중인 미술가」(L’auteur à ses occupations), 1791년께, 캔버스에 유채, 비질 프랑스혁명박물관 소장

여성 화가들의 계보를 잇고 엮어

그토록 사기가 꺾이고 교육적인 기회와 보상을 박탈당했음에도 일정 비율의 여성들이 그 상황을 이겨내며 예술 분야의 직업을 찾으려 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미술사학자 그리젤다 폴록(Griselda Pollock)의 말마따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이나 죄책감이라는 내적인 마귀들과 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조롱이나 선심에 찬 격려와 같은 외적인 마귀들과 싸우는” 상황에서 이뤄낸 성취니 더욱 값지다. 하지만 이러한 분투에는 한계가 있다.

남성 화가들은 남성 스승과 남성 선배, 남성 동료 간의 유대관계 속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일궜다. 하지만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 화가들은 여성들만의 계보를 만들어낼 수 없었기에, 홀로 각개전투를 해야 했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역사책과 미술관은 여성의 업적을 (무의식적이든 의도적이든 어쨌든)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젊은 여성들이 ‘여성 선배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그렸는지’ 배울 기회를 앗아갔다.

미국의 현대화가 주디 시카고(Judy Chicago, 1939~ )는 저서 <여성과 미술>에서 “현대 젊은 여성 미술가들은 미처 그것이 과거의 것인 줄 모르고, 1970년대 페미니즘 미술의 주제와 개념을 반복하고 있다. 과거의 작업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라면 정말 기쁠 테지만, 실정은 그렇지 못하다. 여성 미술가들이 여성 미술의 전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이러한 반복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짚었다. 즉 여성들은 선배가 일궈놓은 터전 위에서 시작하지 못하고, 다시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을 반복해야 했던 것이다.

본보기가 없으면 성취하기 힘들다. 맥락이 없으면 평가하기 어렵다. 동료가 없으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제 선배 여성 화가들이 세운 과거의 업적 위에 새로운 것을 더하기 위해선, ‘계보’를 통해 후배 여성 화가에게 그 결실을 건네주는 것에 진력해야 한다. 그래야 남성 화가들의 작품만 소개하는 ‘희한한’ 미술 교과서가 없어지지 않겠는가. 보르젤로의 책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은 이 ‘계보’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의의가 충분하다.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 「자화상」(Self-portrait), 99×81cm, 1790년, 캔버스에 유채,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소장

글. 이유리(작가)

‘뒤집어 읽는 미술책’은 미술 전문 도서를 통해 미술가와 미술작품, 당대의 미술계가 품고 있던 풍부한 이야기들을 재미있고 친절하게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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