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알아야 할 역사, 함께 불러야 할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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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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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0일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토크콘서트
‘역사와 음악의 만남 – 우리가 몰랐던 노래 이야기’
우리나라 대한민국.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나라 이름 ‘한’(韓)에서 유래한 국호로
1897년, 새로운 근대국가와 독립국가의 염원을 담아 탄생한 대한제국을 계승한 이름이기도 하다.
이 대한제국의 출범과 함께 탄생한 많은 노래들 가운데 28곡을 발굴해 함께 불러보고자 한다.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올해, 고양문화재단에서는 우리의 독립정신과 민족혼이 서려 있는 노래 28곡을 함께 불러보는 뜻깊은 콘서트를 개최한다. 대한제국과 임시정부의 애국가, 3.1운동에 관한 노래, 독립군가와 광복군가,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임시정부 학교의 노래 등 ‘우리가 몰랐던 노래’를 통해 항일운동의 역사·문화적 의의를 돌아보는 자리이다. 6월 20일(목)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고양시교향악단, 고양시립합창단, 고양시립소년소녀합창단, 카운터테너 정세훈의 연주로 진행되는 이 공연은 역사와 음악의 만남을 시도하는 토크콘서트 형식으로, 28편의 연주곡을 함께 선곡한 역사학자 이태진(서울대학교 명예교수)과 음악학자 민경찬(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대담도 마련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자랑스러운 역사와 음악 이야기를 28곡의 노래와 함께 펼쳐낼 두 학자로부터 이번 공연의 취지, 그리고 이번에 발굴한 28곡의 노래를 통해 우리가 이어가야 할 정신에 대해 들어보자. [편집자주]

음악학자 민경찬의 기고

숭고한 정신은 노래를 만들고, 노래는 그 정신을 고취하고

노래를 통한 애국·구국·독립운동의 역사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매우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노래를 통해 애국운동, 구국운동, 독립운동을 전개한 역사’다. 그것은 자생적으로 발생되었고, 계층을 불문한 우리 민족 구성원 대부분이 참여하였으며,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근대국가와 독립국가를 꿈꿨던 대한제국 시대에 ‘애국가 운동’이 전개되면서 수많은 애국가가 등장하였다. 우리는 나라사랑, 민족사랑의 노래를 불렀고, 국민 누구나 잘 사는 평등한 근대국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노래를 불렀고, 더 이상 강대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강력한 독립국가가 되기를 염원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 가운데에는 한때 우리의 국가(國歌)로 불린 「애국가」도 있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점령당했을 때는 이에 저항하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연해주, 멀리는 하와이, 나아가 미국 본토까지 우리 민족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일제의 만행에 항거하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자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렸다. 독립정신을 노래에 담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어도, 국민의 정신은 빼앗기지 않았다.

3.1운동 당시 사진을 수록한 적십자의 팸플릿 중 한 장.
“공원에서 독립 시위 중인 조선인들은 손을 들고 만세를 외치는 듯 보이며, 무장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설명되어 있다. (출처 : WIKIMEDIA COMMONS)

1919년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계기로, 음악을 통한 구국활동과 독립운동은 보다 체계화되었다. 임시정부의 중요한 정책 중 하나가 바로 ‘노래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애국가」 제정은 물론 각종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여러 애국지사들이 공식적 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이들 노래는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신문, 잡지, 노래집 및 민족학교의 음악교과서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다. 덕분에 독립운동 현장에서는 항상 다양한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노래를 통해 독립의 정신을 더욱 고취시킬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임시정부 내에 작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인데, 그럼에도 수많은 노래가 등장했다. 우리의 민요를 비롯해 우리나라에 유입된 외국 선율에 새롭게 가사를 붙여 ‘항일가요’, ‘독립운동가’ 등의 노래를 만들었던 것이다. 가사에 맞는 노래 선율을 그때그때 선택하여 불렀기 때문에 오히려 음악적 정서가 매우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도 이 같은 방법으로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이 창설된 후로는 그 양상이 다소 달라진다. 광복군 안에 전문 작곡가와 작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또 다른 형태의 구국노래인 ‘광복군가’가 만들어지고 보급되었다. 그리고 노래를 통한 항일구국활동을 체계적으로 전개시켜 나갈 수 있었다.

1919년 10월 11일 촬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왼쪽)과 1940년 9월 17일 거행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오른쪽).
임시정부 사진의 앞줄 가운데는 안창호 선생이며, 한국광복군 사진의 앞줄 가운데는 김구 선생이다. (출처 : WIKIMEDIA COMMONS)

우리 근대음악의 특징, 구국의 노래

노래를 통해 애국·구국·독립운동을 전개한 역사는 외국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지만, 우리처럼 자생적으로 발생하여 민족 구성원 대부분이 참여하고,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진행이 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배경에는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으로 언어와 문자로는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다”(<대한제국 애국가> 서문에 나오는 말), “나라의 흥망성쇠는 국민의 정신에 달려 있고, 국민의 정신을 감동시켜 움직이게 하는 데는 노래가 최고다”(1916년 하와이에서 발행한 <애국창가> 서문에 나오는 말) 등 예로부터 ‘노래’를 중요시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애국가’, ‘애국계몽가요’, ‘독립운동가’, ‘독립군가’, ‘항일가요’, ‘광복군가’ 등과 같은 구국(救國)의 노래가 발달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국민을 사랑하자”는 내용의 노래도 있고, “전지전능하신 신(神)께 우리나라가 독립부강하고 자유로운 나라로 되게 해주십사 기원”하는 내용의 노래도 있다. 또 “열심히 공부하여 실력을 배양하자”는 노래도 있고, 민족의 혼을 일깨우는 노래도 있다. 망국의 비애를 다룬 노래도 있고, 정든 조국과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서정적인 슬픈 이별의 노래도 있다. 독립운동가와 독립군의 용맹스러운 영웅담을 다룬 서사적인 노래도 있고, “일본과 싸워 이겨 독립을 쟁취하자”는 군가풍의 노래도 있다.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는 노래도 있고, 조국 독립의 희망을 알리는 노래도 있다.

나라를 빼앗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조국 독립을 염원하고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이러한 노래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우리 민족이 식민지라는 어둡고 지난한 터널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모두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고귀한 정신적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민족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많은 분들이 희생하며 만들어 놓은 고귀한 정신적 문화유산을 계승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러한 것들이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올해! 우리의 역사가 숨 쉬고, 우리의 민족혼이 스며있는 이런 노래들을 발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 줄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 6월 20일(목)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개최되는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토크콘서트 ‘역사와 음악의 만남 – 우리가 몰랐던 노래 이야기’는, 바로 이런 노래들을 다시 부르면서 그 뜻을 되새겨 보는 시간이다.

시대 순으로 엮은 연주곡목은 다시 ‘일제강점기의 「애국가」’, ‘우리 민족이 애창한 애국창가’, ‘3·1운동의 노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만든 애국의 노래’, ‘정세훈이 부르는 애국의 노래’, ‘신흥무관학교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교의 노래’, ‘독립군가와 광복군가’, ‘순국선열추모가 및 개선가’ 등으로 나뉜다. 일제강점기에 국가(國歌)로 불렀던 세 편의 「애국가」를 비롯하여, 그 항목에 맞는 노래들로 선곡 및 구성을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같이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노래 부르기’ 코너를 마련해 출연자 전원과 관객 전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애국가>, <독립군가>, <압록강 행진곡>을 불러볼 예정이다.

이번에 연주되는 모든 곡들은 곡의 해설이 담긴 악보집을 만들어 관객들에게 무료로 제공해 드리고자 한다. 노래가 많이 불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 노래들을 만들고 부르면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의 숭고한 뜻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더불어 이번 ‘역사와 음악의 만남’을 계기로 우리에게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역사로서 역할하기를 소망한다.

6월 20일(목)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개최되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토크콘서트
‘역사와 음악의 만남 – 우리가 몰랐던 노래 이야기’의 출연자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고양시교향악단, 고양시시립합창단, 카운터테너 정세훈, 고양시립소년소녀합창단.

글. 민경찬(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역사학자 이태진의 기고

민국(民國)의 이념이 담긴 우리 첫 국가(國歌)의 탄생

유교 왕정 속의 근대 지향 – 18세기 ‘민국’(民國) 정치 이념의 정립

한민족은 고대부터 외국인들에게 “노래와 춤을 즐긴다”는 평판을 받았다. 중국 위(魏) 나라의 역사 《위지》(魏志)의 외국 열전 가운에 <동이전>(東夷傳)은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면서 동이족 곧 한민족이 모여서 노는 모습을 “발로 땅을 밟고 어루만지듯 손짓 한다(蹈之撫之)’고 하였다. 춤사위가 그대로 연상된다. 오늘날 K팝, 방탄소년단의 DNA는 그 유전의 역사가 아주 오래다고 하겠다.

고려, 조선 시대에는 농경이 여러 형태의 농악이 발달했지만, 국가를 위한 노래가 따로 생성되지는 않았다. 종묘의 제례에서 연주되는 아악이 있었지만, 그것은 재위 중의 왕이 선대 왕들의 신위 앞에 선치(善治)를 맹세하는 경건한 음률이었다. 그 주악의 공간에는 왕과 왕정을 보필하는 신하들만 있었다.

나라의 안전과 발전을 기원하는 노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에 ‘국민’이 탄생하면서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 사람들이 부른 “상제(上帝; 하느님)여 우리 황제를 보호하소서”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국가(國歌)가 이에 해당한다. 이 노래는 곧 종묘 담장 안이 아니라 백성의 생활공간에서 울려 퍼졌다.

조선왕조는 18세기 영·정조 시대부터 그 왕정이 ‘근대’ 지향성을 보였다. 두 임금은 어가를 타고 거리로 나와 직접 백성 만나기를 자주 하였다. 궁성을 나온 영조와 정조는 소민(小民) 보호 정치를 외쳤다. 당시 사대부, 사족의 대민(大民)들의 당파 싸움이 왕실을 위협하기까지 하는 현실의 잘못을 지적하고, 소민을 보호하는 것은 요·순 이래 왕정의 의무라고 외쳤다. 조선왕조 정치사에 ‘소민 보호 정치’가 한 획을 긋는 역사였다.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란 수필을 지어 임금과 백성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였다. 만천 곧 수많은 하천을 백성(소민), 명월 곧 밝은 달을 군주로 비유하여 밝은 달이 수많은 하천에 하나씩 다 담기는 것을 임금과 백성의 관계라고 하였다. 명월을 군주인 나이자 태극이라고 하여 태극이 음양, 사괘, 팔괘로 분화하여 1,742만 여에 달하는 괘의 숫자를 놓고 나의 백성의 수라고 하였다. 백성은 곧 군주의 분신이라는 이 논지에서 어찌 ‘근대’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정조는 백성은 곧 임금과 함께 나라의 주인이란 뜻으로 ‘민국’(民國)이란 단어를 새로 만들어 즐겨 사용하기도 하였다. ‘민국’의 민은 백성 곧 소민, 국은 임금을 뜻하는 조어이다. 그때까지 많이 사용하던 ‘국가’(國家)란 단어가 귀족 ‘가문’들을 많이 의식한 것에 비해 큰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민국’(民國)의 개념으로 근대적 정치 지향을 보인 영조(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www.gogung.go.kr)와
정조(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Encyves Wiki)

19세기 ‘민국’ 정치 이념의 수난과 고종(高宗)의 국가 대열 정비

1800년 정조 임금이 승하한 후 소민 보호 정치는 시련기에 접어들었다. 세도가들의 관료조직을 이용한 수탈 정치가 심해지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소민 가운데 ‘만민보광’(萬民普光)이란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구세를 알리는 천주교에 가까이 가는 부류도 늘어났다. 소민 지도자로서 그 구원의 길을 전통사상에서 찾아 동학(東學)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정조를 뒤이은 군주들, 곧 순종, 효명세자(익종), 헌종은 하나같이 정조의 ‘민국’ 정치 이념을 계승하고자 애썼지만 어린 나이에 세도정치의 벽을 무너뜨리지 못하였다.

1863년 흥선대원군의 아들 이재황(李載晃)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아직 11세의 소년이어서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의 보호를 받았다. 신정왕후는 신왕의 뜻을 물어 효명세자, 헌종 양대의 숙원이던 경복궁 중건을 결정하고 왕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공사 총책으로 임명하였다. 대원군은 이를 통해 10년간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폐쇄적인 대외정책을 일관하였고, 1873년에 성인이 된 왕이 친정(親政)을 선언하여 권좌에서 물러났다.

청년군주 고종은 아버지가 ‘일본이 황제를 칭하였다’는 이유로 국서 접수를 거부했던 것을 잘못으로 비판하고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섰다. 그는 한 나라가 황제를 칭하는 것은 그 나라의 문제로서 이웃나라가 간섭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청년 군주 고종은 나라의 문을 열어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하루 속히 받아들여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일본이 먼저 시작한 서양문물 수용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종은 더 나아가 서양 열강으로부터 직접 선진 문물을 배우고자 1882년 미국과의 수교를 필두로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와 잇따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선대의 민국정치 이념의 회복 속에 국제사회에 자주 독립국가로 진입하기 위한 토대 닦기였다.

1880년대까지 고종은 사대부 자제들에게 영어를 배우게 하고 서양을 공부하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1890년대 동학교도들이 교조신원운동을 일으키고 1894년에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모든 백성이 새로운 국가 건설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고쳐 생각하였다.

군주는 1896년 1월 ‘홍범14조’에서 조선이 중국과의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주 독립국인 것을 천명하고 문벌을 따지지 않는 인재 등용, 새로운 교육에 관한 조서(詔書) 등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이때 내린 왕의 지시는 하나같이 국한문 혼용 문장으로 쓰였다. 국한문 혼용의 교서(敎書)는 민국이념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키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1896년 2월의 ‘교육조서’(敎育詔書)는 덕육(德育)·체육(體育)·지육(智育)의 삼육 교육을 표방하였다. 영국의 존 로크가 처음 내세운 이 교육론은 18세기 미국의 중등교육에서 크게 활용되었던 것인데 19세기 말엽, 조선의 군주가 왕조의 중흥을 위해 이를 채택하였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고종은 이어서 한성사범학교를 세워 교사를 양성하고, 각지에 소학교 설치령을 내렸다. 나라를 튼튼히 세우기 위해서는 소민, 대민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한 뜻이었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 출범과 애국가 탄생

근대로 향한 고종의 정치는 일본의 침략정책으로부터 큰 시련을 여러 차례 겪어야 했다. 일본의 명치(明治) 시대 정부는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양 문물을 속히 받아들여 국력을 키워 서양 열강에 앞서 주변국을 먼저 차지해야 한다는 침략론으로 무장하였다. 1894년 7월에 일으킨 청일전쟁은 본격적인 선점전략의 실행이었다. 일본은 이때 이미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 하였지만, 조선 군주 고종이 미국의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정신에 입각, 이를 제지해 주기를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이 끝난 뒤, 친일정권을 세우기 위한 음모로 왕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왕은 이런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러시아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공사관으로 일시 거처를 옮긴 가운데 경운궁(慶運宮; 현 덕수궁)을 새로 지어 1897년 2월에 이곳으로 환궁한 다음, 10월에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재출범시켜 안으로 자부심을 높이고 밖으로 자주 독립국의 위상을 높일 전기를 마련하였다.

앞서 고종은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즉위식에 민영환을 특사로 보내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차관 도입을 교섭시켰다. 고종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는 보전하는 길은 영세 중립국을 승인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하자면 서양 열강의 잣대인 문명국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고종은 같은 해 9월 말부터 서울 도시개조사업에 착수하였다. 종로, 남대문로의 길을 넓히고 그 위에 전차를 달리게 하였다. 아시아에서 드물게 보는 근대화의 성과였다. 대한제국의 본궁으로 지은 경운궁 앞에는 미국의 대통령궁(백악관) 앞처럼 방사상 도로 결절점이 만들어지도록 하여 그곳에 궁궐의 동문으로 대안문(大安門, 현 大漢門)을 높이 세웠다. 그 앞의 광장은 시민의 집회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영조와 정조의 ‘민국’ 정치 이념을 계승하고자 했던 고종(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www.gogung.go.kr)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서양 열강 사이에서 문명국으로 인정받고자 노력했다. 종로와 남대문로에 전차를 달리게 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사진은 보신각 앞에서 승객을 태우는 당시의 전차 모습(출처 : WIKIMEDIA COMMONS).

광무황제 고종은 1901년 독일인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를 초빙하였다. 일본 정부와 계약이 만료되어 귀국하는 그를 서울로 오게 하여, 군악대를 창설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창설된 양악대는 6개월 만에 경운궁에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주악을 울렸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수도 서울에서 서양 악기로 우렁찬 노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는 즉위 40주년이 되는 이듬해 1902년 10월에 서울에서 국제 이벤트를 열 생각이었다.

양악대 창설은 이 행사를 더 웅장하게 할 뜻이었다. 지금까지 국교를 수립한 외국의 특사를 초빙하여 1주일간 축하 행사를 벌이면서 대한제국이 문명화된 모습, 특히 기독교가 공인된 상황을 보게 하면서 중립국 승인의 튼튼한 발판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해 여름 동아시아 전역에 콜레라가 돌아 외국 손님을 초빙할 수가 없었다. 행사는 이듬해 봄으로 한 차례 연기되었지만 전염병 상황은 개선되지 않아 칭경식은 국내 행사로 그치고 말았다.

이 행사를 위한 준비에서 정부는 국가(國歌) 제정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여기서 의논된 사항들이 군악대장 프란츠 에케르트에게 넘겨졌다. 그는 넘겨받은 자료에서 한국인들의 정서를 읽고 이를 반영하여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상제 곧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시어 오래 사시는 가운데 그 위엄과 권위를 세계에 떨치면서 오래도록 나라의 복록이 누려질 수 있도록 상제여, 우리 황제를 도와주십시오”라는 간절한 여망을 담았다.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와 「대한제국 애국가」의 가사

1902~03년 국제 이벤트 무산 이후 대한제국 황제는 은밀하게, 러시아의 찬동 아래 일본을 상대로 중립국 승인 외교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한반도의 배타적 차지를 목표로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응하지 않았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개전과 동시에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군사강점 상태가 되었다. 전승국이 된 일본은 그 무력을 배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하나씩 빼앗아갔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에 강제로 빚을 지워 경제적으로 올가미를 조였다. 1907년 2월부터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국민의 의무로서 나라 빚 갚기에 나서자고 하였다. 의무를 먼저 말한 국민의 탄생,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의 주변국 선점 침략정책을 이기지 못하였지만, 국가와 국민 탄생의 역사는 매우 고귀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18세기 영조·정조 시대 이래 쌓여온, 군주와 백성 간의 한 몸을 지향한 오랜 노력의 결실이었다.

글. 이태진(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이 기사는 6월 20일(목)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공연되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토크콘서트 ‘역사와 음악의 만남 – 우리가 몰랐던 노래 이야기’의 프로그램 북에 실린 이태진 교수와 민경찬 교수의 글을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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