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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읽는 세계 연극 ⑩ 체코
바츨라프 하벨의 <청중>
체코 프라하의 야경.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카를 다리를 건너로 언덕 위에 우뚝 솟은 프라하 성이 보인다. 훗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이후 분리된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의 장례식이 바로 프라하 성의 제3정원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 이루어졌다.

도도히 흐르는 블타바 강과 그 위에 드리워진 고색창연한 카를 다리, 구석구석 역사의 흔적이 아로새겨진 구시가 골목과 그 너머 언덕에서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장엄한 프라하 성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을 둘러봐도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곳, 바로 체코의 수도 프라하다. 유럽 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며 사시사철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도시지만, 사실 프라하의 역사는 이런 평화롭고 낭만적인 풍경과는 거리가 먼 비극과 격동의 세월로 점철되어 왔다.

특히 히틀러의 침공으로 시작된 나치 독일의 지배와 종전 후 이어진 소비에트 공산 정권의 간섭과 억압, 체코의 민주화를 향한 첫 발걸음이었던 ‘프라하의 봄’과 이를 무참히 짓밟은 1968년 소련의 탱크 진압, 공산주의 붕괴 이후 비폭력 시위로 이뤄낸 ‘벨벳 혁명’과 슬로바키아 분리에 이르기까지, 숨 가쁘게 이어져 온 체코 현대사의 무대였던 프라하는 피와 눈물, 승리와 화해가 공존하는 격변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현장 한 가운데, 체코가 자랑하고 사랑하는 정치가이자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이 있다.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 카를 차페크, 드보르작, 스메타나, 알폰소 무하 등 체코가 배출한 예술가들은 수없이 많지만, 연극이라는 예술세계와 정치라는 현실사회를 모두 아우르며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체코인들에게 하벨의 존재는 특별하다.

 

2011년 12월 18일 바츨라프 하벨의 사망 당시 AP통신의 리포트 영상. 극작가에서 비폭력 저항가로, 민주화된 체코의 초대 대통령으로, 체코는 물론 세계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하벨의 생애를 요약해주고 있다.

체코의 새 역사를 연 장본인

1936년, 프라하의 부유한 엔지니어 가문에서 태어난 바츨라프 하벨은 이로 인해 오랫동안 여러 불이익을 당해야만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체코는 이미 공산주의 지배하에 있었고, 부르주아 출신 성분이라는 이유로 하벨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못하고 화학실험 견습직원으로 일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역시 출신에 발목이 잡혀 원하던 연극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채, 극장의 무대 기술자로 일하면서 어깨 너머로 연극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배운 연극을 토대로 1963년에 그가 발표한 희곡 <가든 파티>(The Garden Party)가 호평을 받으면서 하벨은 극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어서 발표한 <비망록>(The Memorandum)이 뉴욕 공연에서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면서 체코뿐만 아니라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그러나 1968년, 체코의 민주화를 향한 개혁운동이었던 ‘프라하의 봄’이 소련의 탱크에 진압당하고, 후사크 공산주의 정권의 검열과 억압이 심해지면서 하벨은 극장으로부터 나와 격동의 체코 현대사 한가운데에 서게 된다.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는 문서를 발표한 대가로 하벨의 모든 작품은 체코 내에서 상연금지를 당하고, 하벨은 ‘국가 전복’ 혐의로 기소되었다. 1970년 하벨의 작품은 브로드웨이에서 인기를 얻으며 오비상(Obie Awards)을 수상하지만, 서구의 관심과 평가가 높아질수록 하벨에 대한 체코 정부의 압박은 더욱 가중될 뿐이었다.

1977년, 체코 민주화운동의 주역인 ‘시민 포럼’의 단초가 된 ‘77헌장’의 주요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하벨은 다시 한 번 국가전복죄로 투옥되고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기에 이르지만, 이미 체코 시민 사회와 서구 민주 진영에서 하벨의 이름과 영향력은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만큼 견고한 위치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1989년, 소비에트 정권 붕괴 이후 동구권이 하나 둘 민주화 사회로 돌아설 무렵, 체코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루게 되고, 이른바 이 ‘벨벳 혁명’을 통해 하벨은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이후 분리된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다.

대통령 재임 시절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체코의 민주화 및 경제 발전에 힘쓴 하벨은 퇴임 이후 다시 극작가로 돌아가 2007년 <리빙>(Leaving)을 집필해 큰 화제를 모았으나, 2011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국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체코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지도자 및 문화예술 인사들이 두루 찾아와 정치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체코 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이 위대한 거인을 기억하고 기렸다. 한편 하벨 사후 체코 정부는 모든 체코 국민의 자유로운 이동과 여행을 가능하게 만든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프라하 국제공항의 명칭을 ‘바츨라프 하벨’ 공항으로 바꾸었는데. 그리하여 하벨은 이제 프라하에 도착하는 누구라도 가장 먼저 접하는 이름이 되었다.

자서전적 경험을 담은 3부작

하벨은 평생 동안 총 18편의 희곡을 남겼는데, 그 중 대부분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체코의 민주화가 진행되는 격동의 시기에 쓴 것들이고, 그 이후에 쓴 희곡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쓴 <리빙>이 유일하다. 극작가로서 하벨은 자서전적인 작품을 많이 쓴 것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하벨 스스로도 자신의 극작에 대해 살면서 보고, 듣고, 관심 있고, 고민되는 것에 대해서만 쓴다고 밝힌 바 있다. 대부분의 희곡 작품이 직‧간접적으로 그의 삶과 경험을 담아내고 있지만, 특히 <청중(접견)>(Audience, 1975), <초대>(Unveiling, 1975), <항의>(Protest, 1978), 로 이루어진 세 편의 단막극 시리즈에는 모두 하벨의 자화상 같은 인물인 바넥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어, 일명 ‘바넥 시리즈’라고 불린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청중>에는 정부의 명령으로 양조장에서 육체노동을 하고 있는 지식인 출신 바넥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하벨은 1974년 트루드노프 맥주 공장에서 9개월 동안 일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완성했다. 양조장의 지식인 노동자 바넥과 하층 계급 출신이지만 현재 양조장의 책임자인 슬라덱, 두 사람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작품은 하벨의 희곡에 일관되게 드러나는 관료주의와 권력자의 위선, 불가능한 의사소통 등의 테마를 블랙 코미디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부조리하게 이어지는 대화와 반복되는 상황 등을 통해 ‘체코 부조리극의 효시’라 평가받는다.

슬라덱 : 실례지만 뭘 썼다구요?

바넥 : 연극 대본입니다..

슬라덱 : 연극 대본… 그럼 어디 극장서 공연도 했나요?.

바넥 :

슬라덱 : 음.. 연극 대본이라.. 허허허 가만 있자, 거 우리 양조장 얘기도 한 번 써보지 그래요?

바넥네.

(사이)

슬라덱 : 하여간 생각도 못했죠?.

바넥 : 뭘 말입니까?

슬라덱 : 술통을 굴리게 될 줄 말이에요..

바넥 : 아 뭐…

슬라덱 : 이런 게 모순이라는 거죠?.

바넥 : 아 네….

바츨라프 하벨 작, 오세곤 역, <청중>, 예니, 2000년 중

일러스트레이션 · 정유나

반성의 시선으로 들여다본 지식인의 초상

하벨의 저항 방식은 일반적인 민주화 투사와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는 20여 년이 넘게 정부의 탄압을 받고 감옥에도 여러 차례 들락날락했지만, 실제 행동에서나 글에서나 과격하고 투쟁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다. 그는 언제나 비폭력, 비무장으로 정부와 경찰에 맞섰고, ‘77헌장’을 비롯해 그가 작성한 대부분의 선언문과 연설문 역시 차분한 논리와 담담한 어조로 점철되어 있다.

하벨은 평생에 걸쳐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그러한 전체주의가 야기하는 공포와 불안,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지레 비겁한 선택을 하게 되는 상황들을 비판하고자 했다. 또한 이러한 비판의 대상 역시 후사크 정부와 공산당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서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 어떤 식으로든 체제에 순응해가는 지식인 모두를 아우르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 또한 그 비판의 시선에서 예외로 두지 않는다.

<청중>에서도 교양 있는 지식인 계층인 바넥은 무식하고 다혈질인 상사 슬라덱 앞에서 시종일관 공손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은근히 그를 무시하는데, 슬라덱이 술통 굴리기가 아니라 창고지기를 시켜주겠다고 제안하자 솔깃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그의 비위를 맞추려 든다. 마지막 장면에서 바넥은 결국 스스로의 양심에 걸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며 그 제안을 거절하지만, 그럼에도 하벨은 이러한 장면을 통해 육체적 피로와 고통 앞에 자신도 모르게 나약해지는 지식인의 모습을 패러디하며 스스로를 거침없이 희화화한다.

슬라덱 : 이봐요, 내가 만약 창고지기 자릴 준다면, 잘 맞겠죠? 괜찮겠죠? 어쨌든 교육도 받았고 또 정직하잖소. 일생 동안 노동자들하고 술통을 굴리고 싶진 않을 거요. 따뜻한 방안에서 지내는 거예요. 창고 정리를 한다고 대낮에 문을 닫아놓고, 그런 다음 조용히 연극 대본에 쓸 거짓말도 생각하고. 또 낮잠을 좀 잔들 누가 알겠소? 자, 어떻소?

바넥 : 정말 가능한 겁니까?.

슬라덱 : 안될 게 뭐요? 여기 책임자는 난데..

바넥 : 물론 뭐든 가릴 처지는 못 됩니다만,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면야 더 이상 바랄 게 없죠. 사실 그 일이야, 타이프도 치고 외국어도 몇 개는 하니까… 정말이지 지하실은 너무 춥습니다. 특히 습관이 안 된 사람한텐요.

슬라덱 : 그럼 됐네. 회계는 볼 줄 알죠?

바넥물론입니다. 네 학기나 들은 걸요.

슬라덱 : 그래요? 그럼 당연히 잘 보겠군..

바넥 : 물론이죠.

슬라덱 : 따뜻한 데서.. 대낮에 문을 닫고… 일생 동안 노동자들하고 술통을 굴리고 싶진 않을 테니까..

바넥 :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면야…

바츨라프 하벨 작, 오세곤 역, <청중>, 예니, 2000년 중

이 작품뿐만 아니라 마지막 극작인 <리빙>에서도 하벨은 자기 자신이 모델임이 분명한, 퇴임 총리를 등장시켜 우스꽝스런 장면들을 만들어내고 현실을 패러디한다. 권력에 순응하거나 거기에 속해 있는 지식인의 위선과 변명을 통찰하고 비판해온 하벨의 시선은 언제나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해 있다.

격동의 체코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체코 민주화에 앞장섰으면서도 승리에 취해 있거나 그것을 만끽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스스로의 태도를 반성하고 책임을 지고자 하는 하벨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그를 존경 받는 정치가이자 재능 있는 작가로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일 것이다.

글. 김주연(연극평론가)

필자 김주연은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고, 월간 <객석>에서 연극 담당 기자로 활동하면서 『우리 시대의 극작가』(공저)를 출간했다. 연극학으로 박사 학위를 마친 뒤 현재 연극평론가와 드라마터그, 그리고 연극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명작으로 읽는 세계연극’ 시리즈는 세계 연극사에서 손꼽히는 희곡들을 국가별로 한 편씩 골라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 작가가 희곡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각해보는 칼럼으로
이번 체코 편 ‘바츨라프 하벨의 청중’이 마지막 연재입니다.
그동안 ‘명작으로 읽는 세계연극’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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