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만에 읽는 세계명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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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 <오만과 편견>이 4월 24일(토)~25일(일) 고양어울림누리 별모래극장에서 공연된다. 오직 두 명의 배우가 단 두 시간 만에 세계적인 명작 소설을 무대에 써내려 간다. [편집자 주]

원작소설보다 나은 연극 찾기란

고전소설을 무대화하는 시도는 공연계에서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는 작업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 묵직한 러시아 소설을 비롯해 5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 <레미제라블>, 브론테 자매와 제인 오스틴의 영국 소설 등은 희곡만큼이나 자주 무대화가 이루어지는 명작소설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원작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는 일이 많은데, 그도 그럴 것이 짧게는 100페이지에서 길게는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원작 소설의 방대한 스토리와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관계, 그리고 촘촘한 언어와 심리 묘사를 무대 위에 생생하게 구현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건들을 무대 위에 다 풀어놓다 보면 극의 긴장감이 떨어지고, 그렇다고 주요 사건만 가져가면 극의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니, 참으로 난감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소설의 서술적 언어와 연극 언어의 특성이 다르기에 두 언어의 호환 또한 쉽지가 않다. 이 모든 조건들을 고려할 때, 조안나 틴시(Joannah Tincey) 각색, 애비게일 앤더슨(Abigail Anderson) 연출(국내 버전은 박소영 연출)의 연극 <오만과 편견>은 상당히 영리한 방식으로 이 쉽지 않은 작업을 산뜻하게 성공시킨 예라 할 수 있다.

영국의 유명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브록(C.E. Brock)의 <오만과 편견>의 삽화 카드
(출처 : WIKIMEDIA COMMONS)

영리한 각색이란 이런 것 

제인 오스틴의 원작 소설 출판 2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이 연극(2014년 영국 솔즈베리 극장에서 초연)은 무엇보다 영리한 각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원작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연극적 묘미를 느낄 수 있는 방식을 택했다. 일단 원작에 대한 새롭고 파격적인 시선을 제시하거나 현대적인 해석을 선보이겠다는 욕심을 버린 채, 오롯이 원작의 스토리를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무대 위에서 들려주는 데 초점을 맞췄고, 덕분에 무대 위에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를 남길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대사와 내레이션, 그리고 캐릭터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 작품은 오직 두 명의 배우로 하여금 극중 대부분의 인물들을 번갈아 연기하게 하고, 그들의 대사뿐만 아니라 인물 설명 및 내레이션까지 해당 캐릭터가 소화하게 만듦으로써 빠른 극 전환과 속도감 있는 진행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원작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이야기 자체의 의미를 파고들기보다는 두 명의 배우가 퀵체인지로 선보이는 여러 등장인물의 각기 다른 매력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 것 역시 각색의 영리함을 느끼게 해주는 지점이다.

사실 <오만과 편견>은 젊고 아름가운 베넷 가의 딸들이 우여곡절 끝에 멋지고 부유한 신랑을 만나 결혼에 성공한다는 줄거리로, 당시 영국 사회의 결혼 풍속과 결혼에 대한 사회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들의 관심은 결혼에 집중되어 있으며, 여기서 결혼은 낭만적인 사랑과 연애의 결과라기보다는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비춰진다.

덕분에 이 작품은 당대 영국 사회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사회문화적 시선이란 평가를 받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과 안정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데이비드 바래시(David P. Barash) 같은 진화심리학자들에 의해 진화심리학의 표본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연극은 이러한 원작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파고들거나 현대적인 해석을 내놓기보다는, 200년이 지난 지금의 눈으로 봐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매력 넘치는 극중 인물들을 무대 위에 생생히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칫 해석의 차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오해의 여지들을 영리하게 피해간다.

영리한 각색으로 원작 소설의 매력을 살려낸 연극 <오만과 편견> (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제공)

두 배우가 들려주는 수십 개의 목소리

각색과 더불어 이 작품을 한층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역시 무대를 가득 채우는 두 배우의 매력과 열연이라 할 수 있다. 연극 <오만과 편견>에는 성별도 이름도 알 수 없는 A1과 A2라는 배우만이 출연한다. 이 두 명의 배우가 번갈아가며 주인공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를 비롯해 엘리자베스의 엄마, 아빠, 자매들, 친구, 그리고 다아시의 친구와 여동생, 고모 등 무려 21명의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4월 고양어울림누리 공연에는 정운선, 백은혜, 홍우진, 신성민, 이형훈 등 다섯 명의 배우가 A1과 A2로 출연한다.

순간순간 마술처럼 변화하는 이들의 연기 변신은 두 배우의 엄청난 집중력과 유연한 리액션, 정밀하게 계산된 시간과 동선이 어우러져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극을 이끌어간다. 특별한 의상 체인지나 분장의 변화도 없다. 오로지 손수건 하나, 혹은 모자와 지팡이 등 사소한 소품과 옷섶의 변화만으로 수많은 인물들을 오가며 정확하게 인물의 포인트를 잡아내는 배우들의 연기야말로 이 연극을 생생한 매력으로 가득 채우는 일등공신이다.

여기에 수많은 남녀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펼치는 젠더 프리 액팅(gender free acting) 역시 관극의 즐거움을 더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방금 전까지 호들갑스러운 버넷 부인을 연기하던 배우가 다음 순간 진지한 영국신사 빙리가 되어 왈츠를 청하고, 차갑고 오만한 다아시를 연기하던 배우가 등을 돌리는 순간 수다쟁이 리디아가 되어 머리카락을 배배 꼬는 식이다. 21명의 캐릭터를 굳이 여성, 남성으로 나누지 않고 두 배우가 돌아가면서 연기하게 만든 덕에 모든 인물이 성별을 넘어서 하나의 캐릭터로 보이는 효과가 생겼다.

두 시간 가까이 되는 공연 동안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수많은 캐릭터 사이를 넘나드는 배우들을 보고 있자면 저러다 실수하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하다가도 자연스레 감탄이 터져 나온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연극이란 결국 배우의 예술이고 배우의 예술일 수밖에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소설의 이야기를 무대로 가져오면서 궁극적으로는 오롯이 배우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게 만들다니, 역시 참으로 똑똑한 작품이다.   

두 배우가 젠더 프리 액팅으로 수많은 남녀 캐릭터를 표현한다 (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제공)

글. 김주연(연극평론가)

고양문화재단에서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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